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87화
* * *
“후작님!”
엘렌 후작의 카바나에 그의 보좌관이 급히 들어섰다.
“에카르트 공녀가 방금 전 숲에서 홀로 돌아왔다 합니다! 그 자리에서 바로 체포되어 감옥으로 압송되었습니다.”
“홀로? 그럼 황태자는? 황태자는 어떻게 되었다는가!”
“공녀의 증언으로 쓰러진 황태자도 발견해서 황태자궁으로 긴급 이송되었습니다.”
“상태는?”
“아직 정신을 못 차리고 있다 합니다. 그리고, 귀를 좀…….”
귀를 대주는 엘렌 후작의 위로 보좌관이 허리를 숙여 속삭였다.
“……세작의 말로는 독에 의한 것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답니다. 하지만 몸에 경미한 상처들이 군데군데 있는 것을 확인했답니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노인의 얼굴이 환해졌다.
격전을 대비하여 몇몇 무기에 독을 발라 두라 지시하길 잘했다.
먼 사막 나라까지 쥐 잡듯이 뒤지고 뒤져 찾아낸 독이었다.
독효가 곧장 나타나지 않고, 하루 이틀 후 서서히 퍼지는 것이기에 혹여 암살 실패 시 용의 선상에서 벗어나기 알맞았다.
‘어쩌면 이대로 초상을 치를 수도 있겠군.’
엘렌 후작이 행복한 미래를 상상하다 불쑥 날카롭게 눈을 빛냈다.
“뒷수습은 잘했겠지? 절벽에서 흔적이 끊겼다며.”
“네. 흔적을 따라 숲을 샅샅이 뒤져 떨어진 무기들을 모두 회수했습니다. 레일라 신국인들은 황비님의 궁 지하에 잘 숨겼습니다.”
“잘했다. 깨어난 자들은 아직도 쓰러지기 직전의 기억을 못 한다는가?”
“네, 후작님.”
“차라리 잘됐어…….”
엘렌 후작은 눈을 번뜩였다.
이번 거사까지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던가.
전쟁에서 돌아온 황태자는 제일 먼저 2황자파와 지하 세력과의 유착을 끊어 내기 시작했다.
때문에 예전처럼 암살단을 고용할 수 없었다.
하여 2황자파의 주력 세력인 여섯 가문에서 야망을 품은 사내들을 차출할 수밖에 없었다.
사냥 대회를 거사 시일로 잡고, 그들을 수도 귀족으로 탈바꿈시킨 후에 암살 훈련을 시켰다.
그중 한 명이 엘렌가의 먼 방계, 툴렛 남작이었다.
하지만 고작 대여섯 명으로는 황태자를 상대할 수 없었다.
마침 레일라 신국과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다.
지원해 준다던 놈들을 황궁 안으로 들이기 위해 황비까지 동원됐다.
그리하여, 무려 20명에 달하는 수의 암살자를 황태자 놈에게 보냈는데…….
- 뭐, 뭐라! 모두, 기절했다고?!
뒷수습하러 보낸 시종들로부터 암살자들이 모조리 기절한 채로 발견됐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던 엘렌 후작은 기절하는 심정이었다.
다행히 황태자와 같이 있었던 목격자이자 조력자를 찾아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 석궁에 맞으면 백치가 된다고 협박했어요. 남작님을 이렇게 만든 건 그 여자가 틀림없어요!
백치가 된 약혼자를 보고 분개하여 소리치던 켈린 영애의 증언과 더불어 공녀의 행방이 묘연했다.
게다가 황태자라면 분명 암살자들을 칼로 도륙 내었을 터.
암살을 실패한 것도 모자라, 목격자가 존재한다는 사실에 2황자파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어느 때에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지 않은가.
“……이제 공녀에게 뒤집어씌우는 일만 남았군.”
엘렌 후작이 꾀를 냈다.
역으로 유일한 목격자인 공녀에게 죄를 뒤집어씌우기로.
어차피 공녀는 ‘공작가의 미친개’라 불리며 평판이 최악 중 최악을 달리는 중이니, 사람들을 납득시키는 것은 쉬울 것이다.
처음엔 ‘귀족 시해’로 선수를 쳐서 논점을 흐리려 했지만, 마침 황태자마저 의식 불명에 빠졌다.
레일라 신이 도운 것이 분명했다.
“꼴 보기 싫은 에카르트 놈들에게도 한 방 먹일 수 있겠어!”
엘렌 후작은 흡족한 얼굴로 킬킬 웃었다.
어차피 가장 중요한 건 당장 용의 선상에서 벗어나는 일이었다. 그래야 후일을 도모할 수 있으니.
그런 의미에서 암살 실패의 주범인 공녀는 아주 좋은 먹잇감이었다.
에카르트의 미친개에게 시선이 쏠린 사이 신국에서 보내 온 암살자들을 황궁에서 내보내고 모든 증거를 인멸한다.
사경을 헤매는 황태자가 이대로 죽으면 금상첨화겠지만, 당장 죽지 않더라도 상관없었다.
지금껏 시도했던 수많은 암살 시도처럼, 증거가 없으면 황태자의 주장은 아무 의미도 없으니까.
“귀족 시해뿐만 아니라 황족 시해도 뒤집어씌우는 게 좋겠지.”
놈이 깨어났을 땐, 암살과 관련된 자들은 입도 벙긋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완벽한 계획에 엘렌 후작은 속이 후련하다는 듯한 얼굴로 다시 한번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그나저나 툴렛 쪽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다던가?”
“네. 여전히…….”
“쯧, 쓸모없는 놈 같으니라고!”
말끝을 흐리는 보좌관의 모습에 엘렌 후작이 혀를 찼다.
“비싼 용혈을 구해다 먹여서 사람 구실 좀 하게 만들었더니, 어째 전보다 더 정신이 빠졌어!”
툴렛 남작은 본디 어렸을 때부터 발달이 늦은 지진아였다.
명색이 황비의 외가씩이나 돼서 거사에 내놓을 사내가 없다는 게 말이 되지 않았다.
찾다 찾다 결국, 머리는 좀 아둔하지만 신체 건강한 방계를 데리고 왔다.
비싼 돈을 들여 마력이 잔뜩 응축된 용혈로 만든 총명탕을 먹이고, 켈린 쪽과 약혼도 시켜 수도 귀족답게 만들었다.
‘이제야 사람 구실을 좀 하나 했더니…… 쯧쯧.’
못마땅한 표정으로 입을 씰룩거리던 엘렌 후작이 문득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단 툴렛 남작 쪽으로 가지.”
* * *
툴렛 남작의 카바나 안은 여전히 혼돈의 도가니였다.
“마력 부작용입니다.”
진찰을 본 황궁의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말했다.
“마력 부작용……? 그, 그럼 어떻게 되는 거란 말이오!”
“단기간 몸이 마력에 과도하게 노출되어 일시적으로 뇌 기능이 떨어진 겁니다. 시간을 두고 차차 회복하는 수밖에…….”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없다고 유감을 표한 황궁의가 카바나를 빠져나갔다.
“헤헤, 헤헤. 숲에서, 사, 사냥의 여신을 봤다. 헤헤, 헤헤…….”
“제발 정신 좀 차려 보라고요!”
침을 질질 흘리는 정신 나간 약혼자를 바라보는 여자가 신경질적으로 소리를 질렀다.
안절부절못하고 서 있던 켈린 백작이 그런 딸을 달랬다.
“글로리아, 아가. 진정하여라.”
“이게 다 무슨 꼴이에요, 아버지! 창피해서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없다고요!”
“글로리아…….”
“그러니까, 왜 이번 사냥 대회에 그 미친년이 참여하는 꼴을 가만 보고 계셨어요!”
글로리아는 파란 머리를 마구 헝클이며 분을 참지 못했다.
켈린 백작은 차마 다이아몬드 광산을 받으며 ‘더는 그 일을 언급하지 않는다.’라는 조건이 붙었다고 실토할 수 없었다.
“헤헤, 헤헤. 여신님! 여신님…….”
그 와중에도 엘렌 후작의 조카는 침을 질질 흘리며 정신 나간 소리를 뇌까렸다.
그때였다.
“켈린 백작.”
툴렛 남작의 카바나 안으로 한 인영이 들어섰다.
“후작님, 오셨습니까.”
“앉아 있게.”
엘렌 후작이 일어나 인사를 하려는 두 사람을 보고 손사래를 쳤다.
“영애도 와 있었군. 마침 잘됐소.”
“밖이 소란스럽던데, 무슨 일…….”
“에카르트 공녀가 돌아왔네.”
후작의 말에 켈린 백작 영애가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그 여자, 지금 어디 있어요?!”
“긴급 체포돼서 지금 감옥으로 압송됐지. 신이 도운 게야.”
득달같이 일어서는 켈린 영애를 후작이 잘 달랬다.
“이제 가장 중요한 건 영애의 증언뿐이야. 잘할 수 있겠지?”
“네, 그럼요! 티 파티 자리에 저만 있던 것도 아닌걸요!”
켈린 영애는 분노로 몸을 떨며 고개를 끄덕였다.
티 파티에서 에카르트 공녀와 무슨 일이 있긴 있었는지, 뿜어져 나오는 적개심이 불같기 그지없었다.
“영애만 믿겠네.”
“에카르트 쪽이 심히 반발할 텐데 괜찮겠습니까, 후작님? 게다가 황태자 전하께서 금방 정신을 되찾으시면 어쩌시렵니까.”
켈린 백작만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우려를 표했다.
에카르트는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걱정 말게. 증거물도 없고, 유일한 목격자이자 당사자인 황태자마저 사경을 헤매고 있으니까.”
그러나 엘렌 후작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켈린 백작의 어깨를 두드렸다.
“게다가 황제 폐하께서도 수도에 아니 계시지 않나. 여차하면 암살도 뒤집어씌워 꼴 보기 싫은 에카르트 놈들을 제거할 수 있을지도.”
이 위기는 오히려 기회였다.
‘암살 실패’로 인한 해결책을 위해 이미 판을 모두 짜 둔 상태였다.
본래는 곰의 피를 본 황태자가 갑자기 미쳐 날뛰며 툴렛 남작을 비롯한 귀족들을 공격하였다고 발뺌할 작정이었다.
어차피 그쪽은 황태자 한 명뿐이고 이쪽은 귀족이 여러 명인 실정이다.
목격자 하나 없는 깊은 숲에서 일어난 일이니, 막무가내로 우기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뜬금없는 에카르트 공녀의 등장과 의식을 잃어버린 황태자로 인해 오히려 상황이 썩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설령 황태자가 눈을 뜨더라도 이전처럼 날뛰기 힘들 걸세. 깨어나기 전에 이미 모든 일은 끝나 있을 테니.”
허공을 향한 엘렌 후작의 눈빛이 음험하게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