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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엔딩은 죽음뿐-88화 (88/243)

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88화

* * *

나는 들고 있던 석궁을 압수당한 채, 그대로 기사들에게 끌려가 황궁 북쪽 탑에 갇혔다.

다행히도 흉악범들이 갇힐 법한 지하 감옥은 아니었다.

재판 직전의 귀족들이 머무르는 곳인지 나름 청결하고 준수한 방이었다.

문에 달린 철창만 아니었다면 감옥이라고 믿기 어려울 것이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냐…….’

방 안을 대충 둘러보던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침상에 걸터앉았다.

‘데릭 놈이 얼마나 지랄을 할지…….’

나는 솔직히 귀족 시해범으로 몰린 것보다, 음산하게 읊조리던 데릭 놈이 더 걱정됐다.

- 또 가문에 먹칠을 한다면, 감옥에 구금되는 것으로 끝나지 않을 테니까.

가문에 먹칠을 하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했는데, 기어이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

“하하.”

나는 체념하고 웃었다.

이 미친 게임의 스토리가 대체 어디까지 뻗어 나갈지 모르겠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건, 지금 내가 처한 상황은 에피소드 중 하나라는 것이다.

나는 주섬주섬 재킷 안쪽에 넣어 두었던 단검을 꺼냈다.

과연 나는 새도 떨어뜨리는 에카르트의 세가 무섭긴 했다.

들고 있던 석궁은 압수했을지언정 공녀의 몸을 수색하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그렇기에 내가 지금 이렇게 침착할 수 있는 것이리라.

“암살자의 증표라…….”

동굴 안에서는 정신이 없어서 보상을 미처 자세히 살피지 못했다.

황태자를 찔렀던 독 묻은 단도의 칼날 하단에는 알 수 없는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모르긴 몰라도 어느 가문을 상징하는 문양이 분명했다.

- 공녀! 지금 뭐 하는 짓거리지?

- 왜 위험하게 멀쩡한 머리를 칼로 자르는 건데?

머리카락을 잘라 솔로 쓰려고 할 때, 덥석 손을 잡아채던 황태자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땐 참으로 유난이구나 싶었는데…….

‘이미 독이 묻은 걸 알고 있었던 건가.’

나는 조금 착잡해진 기분으로 단도를 이리저리 돌려 가며 관찰했다.

문양뿐만 아니라, 단도의 끄트머리에는 파란색 비단실을 꼬아 만든 장식도 달려 있었다.

안녕을 기원하며 누군가 선물해 준 듯한 모양새였다.

“……이제 이 문양이 어디 건지만 알아내면 악녀라는 시련을 딛고 일어난 영웅이 되는 건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던 나는 일단 단도를 다시 재킷 안에 고이 집어넣었다.

암살의 증거물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누군가의 눈에 띄어 봤자 좋지 않을 테니까.

그 순간이었다.

“페넬로페 에카르트.”

불현듯 감옥의 철창 사이로 누군가가 나를 불렀다.

음산한 횃불 아래 드러난 서늘한 푸른 눈.

“……소공작님?”

데릭이었다.

나는 얼떨떨한 심정으로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 문 앞에 다가섰다.

감옥이라는 특수 환경 때문일까.

분명 내게 폭언을 하러 온 것이 분명할 텐데, 근 이틀 만에 다시 본 그 얼굴이 퍽 반갑게 느껴졌다.

나는 우선 그의 머리 위부터 확인했다.

[호감도 29%]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더 떨어지거나 하지는 않은 상태였다.

천만다행이었다.

“곰에게 석궁을 쐈다던데.”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을 적.

족치기의 시작인지 데릭이 입을 열었다.

“아, 네. 그건…….”

마지못해 변명을 하려던 순간이었다.

“어디…… 다친 덴 없느냐.”

문득 내 귀로 듣고도 믿기 힘든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생소한 눈으로 데릭을 다시 보았다.

그의 얼굴은 무표정하기 그지없어, 지금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을지 예측할 수 없었다.

다만, 보자마자 구박을 하는 게 아닌 걱정의 말을 꺼내 주는 것에 갑자기 턱, 목이 메었다.

어쩌면 나도 모르는 사이, ‘귀족 시해범’이 된 이 상황이 퍽 억울했던 건지 모른다.

“아버지나 소공작님은…… 괜찮으세요? 레널드 오라버니는…….”

“레널드는 네 석궁 볼트에 마법을 새긴 마법사를 데리고 오기 위해 급히 황궁을 나갔다. 살상용이 아닌 것부터 입증해야 하니까.”

“죄송해요. 일을 크게 만들어서…….”

나는 다소 힘없이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와 달리 머리는 재빠르게 돌아갔다.

어쨌든 ‘진짜 공녀’가 등장하기 전까지 에카르트의 일원들은 ‘가짜 공녀’를 비호해 왔다.

비록 그것들이 쌓이고 쌓여 죽음까지 이어지게 만들었지만…….

‘어쩌면 지금 데릭에게 증표를 넘기는 게 해결책일 수도 있겠어.’

생각을 마친 나는 그에게 단도를 넘기기로 마음먹었다.

“소공작님. 이번 일은 명백한 모함이에요. 해결할 방법이 있어요. 사실 제게…….”

“페넬로페 에카르트.”

그에게 어제 하루 동안 겪었던 일을 소상히 털어놓으려고 막 입을 연 찰나였다.

데릭이 불쑥 말을 끊었다.

“네가 쏜 석궁에 맞았다는 증언자가 여섯이 넘은 상태다.”

“……네? 그게 무슨…….”

“게다가 사건 당일에 참여한 티 파티에서도 석궁을 들고 백치로 만들어 버리겠다고 여인들을 겁박했다지.”

나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벌써 소문이 그렇게 파다하게 났단 말인가.

“그, 그건…….”

“네 석궁은 뇌전이 터져 기절하고, 기억을 잃는 마법만 걸려 있는 상태지.”

“…….”

“하지만 켈린 백작 영애의 약혼자이자 엘렌 후작의 조카뻘인 툴렛 남작이 네 화살을 맞고 정말로 정신이 나갔다.”

“네?!”

“침을 줄줄 흘리며 진분홍빛 머리칼을 가진 사냥의 여신을 찾는다더군.”

“허…….”

황당하기 그지없는 소리에 입이 절로 떡 벌어졌다.

‘어떻게 된 거지? 암살자 중 그 파란 머리의 약혼자도 있었다는 소리인가?’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심각하게 고민했다.

켈린 백작의 정파가 어느 쪽인지, 툴렛 남작이란 놈이 누군지 몰랐다.

하지만 황비의 외척인 엘렌 후작의 ‘조카’라는 것에서 대충 답이 나왔다.

“그러니 왜 티 파티에서 사실과 다른 말을 했는지, 아니.”

내가 생각에 잠긴 사이, 데릭은 이미 추측을 모두 끝낸 듯했다.

“이번엔 또 뭐 때문에 심기가 뒤틀려서 귀족들을 향해 석궁을 쏘았는지 말해.”

“…….”

“정상참작이라도 해야 하니까.”

그 순간 머릿속이 멍해지면서, 말문이 턱 막혔다.

나는 당연히 데릭이 내게 자초지종을 물을 줄 알았다.

지금, 이 상황이 억울한 누명을 벗고 과거의 악명을 떨쳐내는 에피소드로 이어질 줄 알았으니까.

그러나 데릭의 말은 꼭.

‘……내가 심보가 뒤틀려 귀족들을 쏜 게 기정사실이란 가정하에 말하고 있는 것 같잖아.’

물론 내가 석궁을 쏜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복면을 쓴 암살자들을 향해 쏜 것이지, 얼굴을 드러낸 귀족들을 향해 난사한 게 아니었다.

뭐라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입을 뻐끔대던 나는 허탈한 목소리로 물었다.

“……제게 어떤 이유가 있어서 정당방위를 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으세요?”

“기절한 채 시종에게 실려 온 가보일 자작이 증언하기를.”

데릭은 서늘한 얼굴로 즉답했다.

“힘을 모아 곰을 잡고 있던 자신들의 앞에 느닷없이 나타난 네가, 사냥감을 빼앗겠다며 석궁을 난사했다더군.”

“뭐라…… 고요?”

“곰마저 날뛰는 통에 미처 피할 틈도 없었다고 읍소하던데.”

“하, 그걸 믿으세요?”

나는 헛웃음을 터뜨리며 되물었다.

진짜 페넬로페였더라도,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상식적으로 고작 귀족 영애 혼자서 그 많은 인원들을 어떻게 처리한단 말인가?

‘물론 그러긴 했지만.’

그러나 시스템에 의한 게 아니었다면, 지금쯤 난 황태자와 손잡고 황천길을 거닐고 있었을 것이다.

“내가 믿고 안 믿고는 중요한 게 아니지.”

그러나 데릭 놈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더 큰 문제는, 일각에서 네가 황태자를 암살하기 위해 목격자들을 모두 제거했던 게 아니냐는 괴소문이 퍼지고 있다는 것이다.”

“암살……?”

갈수록 점입가경이다.

나는 황당하다는 심정을 감추지 않고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냈다.

“제가 황태자 전하를 암살해서 득 볼 게 뭐가 있는데요?”

“널 앞세워 에카르트를 제거하려는 목적이겠지.”

“소공작님. 우선 암살자는 제가 아니라, 그쪽 무리였어요.”

데릭과 대화의 초점이 점점 빗겨 나가고 있음을 인지한 나는, 진실부터 말했다.

“그 곰은 제 사냥감이었고요. 지나가던 황태자 전하께서 난항을 겪고 있는 저를 도와 곰의 목을 베어 주셨어요.”

“…….”

“상식적으로 저 혼자서 어떻게 그 많은 수의 남성들을 쓰러뜨릴 수 있겠어요? 그런 터무니없는 소리를 믿는 자가 있다는 것이 놀랍네요. 조사하다 보면 뻔히 밝혀질 진실을…….”

“진실은.”

불현듯 데릭이 내 말을 끊으며 낮은 음성으로 읊조렸다.

“진실은 네가 귀족들과 곰에게 석궁을 쏜 일이 있느냐, 없느냐야.”

나는 그의 입술에 못 박았던 시선을 들어 천천히 그를 마주 보았다.

“……소공작님.”

“그리고 유일하게 네 말이 사실임을 증언해 줄 황태자가 지금 독 때문에 사경을 헤매고 있다는 것이 진실이지.”

“……독이요?”

나는 황태자가 독으로 인해 쓰러진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랐다.

하지만 그보다 더 놀란 것은, 나를 대하는 데릭의 태도였다.

흔들림 없이 나를 보는 시리도록 푸른 눈.

‘아.’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놈에겐 애초에 나에 대한 일말의 믿음도 없었다는 사실을.

“천둥벌거숭이의 짓궂은 장난이라면 어떻게든 수습 가능한 선이다.”

바꿔 말하면 그 이상으로는 수습할 수 없다는 소리였다.

“하…….”

허탈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런 줄도 모르고 나는, 외면하지 않고 감옥을 찾아와 준 놈이 내심 고맙고 또 반가워서…….

하나뿐인 증거물을 넘길 생각이나 하고 있었다.

“소공작님께서는…… 애초에 제가 무슨 말을 하든 믿으실, 아니.”

“…….”

“사람들이 떠들어 대는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저에게 확인할 생각도 없으셨군요.”

“괴소문이 더 확산되기 전에 빠르게 마무리 짓는 편이 좋다.”

데릭은 한결 목소리를 누그러뜨렸다.

토라진 어린 여동생을 달래는 듯한 그 모습이 퍽 익숙해 보였다.

“그래야 너도 거기서 바로 빠져나올 수 있을 테니까. 괜히 질질 끌다간 오히려…….”

“아니요.”

나는 차갑게 가라앉은 시선으로 그를 마주 보았다.

“그냥 저를 귀족 시해범으로 모는 편이 수습하기 쉽고 편할 테니 그렇겠죠.”

“페넬로페.”

“저 미친년은 원래 숨 쉬듯 패악을 일삼는 못 돼 처먹은 계집앤 걸 잘 알지 않느냐.”

“너…….”

“사실과는 관계없이 저를 세상에서 둘도 없는 쓰레기로 만들고 돈 몇 푼 뿌리면, 다들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테니 이러시는 거잖아요.”

“입조심해라.”

적나라한 어투에 데릭이 딱딱하게 턱을 굳혔다.

“지금 누구 때문에 일이 이렇게 됐는데, 그딴 식으로 함부로 지껄이는…….”

“함부로 지껄이는 건 내가 아니라 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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