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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엔딩은 죽음뿐-89화 (89/243)

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89화

나는 이를 꽉 깨물고 뇌까렸다. 반쯤은 충동적인 언행이었다.

철창 사이로 보이는 파란 눈이 서서히 커졌다.

그리고 그 순간.

‘호감도 -3%’

[호감도 26%]

호감도가 떨어졌다. 나는 그것을 아무런 표정 없이 응시했다.

떨어진 호감도와는 달리, 놈은 내 말을 바로 알아듣지 못한 듯했다.

“……뭐?”

한발 늦게 되묻는 얼굴이 조금 얼떨떨해 보였다.

“돌아가세요.”

한 방 먹였지만 통쾌함 같은 건 전혀 들지 않았다.

“더 이상 당신이랑 할 말 없으니까.”

“페넬로페 에카르트.”

풀네임을 부르는 목소리가 한층 더 낮아졌다.

‘호감도 -2%’

[호감도 24%]

30%에 근접했던 호감도가 떨어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하지만 후회는 없었다. 애당초 엑스 친 놈이었다.

그간 일말의 기대감도 없었다고 자신할 수 있는데.

그런데 자꾸만 일그러지는 표정을 가다듬기 힘들었다.

“이번 일은 제가 알아서 할 테니까 소공작님께서도 수습해 주실 필요 없어요. 이제껏 그래 왔듯 그냥 내버려 두세요. 죽든지, 감옥에 갇히든지.”

“너, 그게 무슨…… 페넬로페!”

내 방자한 어투에 데릭이 버럭 화를 내려 했지만, 나는 더 듣기 싫어 휙 몸을 돌렸다.

위험 수위를 넘나드는 발언이었지만 이제 와 철회할 생각 따윈 없었다.

죽지만 않는다면, 빌어먹을 호감도가 더 떨어지든 말든 알 바 아니다.

신경질적으로 철문을 등지고 침상 위에 앉았을 때였다.

뚜벅뚜벅-. 얼마 후 멀어지는 발 소리가 들렸다.

“하.”

기가 막혔다.

가란다고 진짜로 명목상의 여동생을 감옥에 내팽개치고 떠나가는 걸음에는 미련 하나 느껴지지 않아서.

‘……그래. 넌 원래 이런 놈이었지.’

데릭에게 두 번째로 받은 선물을 보석함에 따로 고이 보관해 둘 때, 나는 사실 우리의 관계가 조금쯤은 나아지고 있다고 여겼다.

딱히 기존의 인상을 벗어나기 위한 노력을 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천둥벌거숭이’ 소리를 들을 만한 행동도 하지 않았으니까.

비록 게임에서 요구하는 남녀의 애정 관계로 발전하지는 못하더라도, 남매간의 우애 정도는 나아져도 괜찮을 거라 생각했다.

그편이 엔딩을 볼 때까지 버티기도 수월할 테니까.

하지만 그건 모두 나만의 착각이었다.

‘적선하듯 주는 네 도움 같은 거 없어도 알아서 잘 해결할 수 있어.’

나는 어느새 텅 빈 철창 너머를 싸늘한 눈으로 노려보며 생각했다.

뚝.

어디선가, 잡고 있던 끈 하나가 끊어지는 듯한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 * *

감옥에서 하룻밤을 보낸 나는 이른 아침, 배식된 간단한 식사를 마치고 기사들에게 이끌려 회의장으로 이동했다.

귀족 남성 7명을 이유 없이 습격 한 흉악범치곤, 퍽 후한 대우였다.

‘과연 VIP라 이건가.’

양 손목을 포박한 밧줄이 썩 널널했다.

게다가 황궁 내의 회의장 안으로 들어서는데도 여타 몸수색도 없었다.

‘석궁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하는 철부지 영애라고 생각한 거겠지.’

모순되는 놈들의 취급이 좀 웃겼다.

“페넬로페 에카르트 공녀 입장하십니다.”

시종의 알림과 함께 대회의장의 거대한 문이 천천히 열렸다.

뚜벅뚜벅.

안으로 들어서는 내 모습에 웅성거리던 장내가 빠르게 고요해졌다.

정무에 참여하는 고위급 귀족들이 모두 착석해 있는 상태였다.

꼿꼿이 허리를 세운 채 그 앞을 스쳐 지나가던 나는, 무언가를 발견하고 눈을 번쩍 빛냈다.

명패처럼, 각 가문의 문양이 새겨진 판이 자리마다 꽂혀 있었기 때문이다.

‘다행이야.’

상석으로 갈수록 문양 패는 화려해졌다.

곁눈질로 정신없이 그것들을 살펴보던 나는, 거의 끄트머리에 이르렀을 때에서야 찾고자 하던 것을 발견했다.

‘저기 있다!’

칼에 새겨진 문양과 일치하는 문양이었다.

그 뒤에 앉은 인간을 확인하자 긴장이 확 풀렸다.

스토리대로 잘 진행되고 있다는 확신을 얻었기 때문이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무심결에 고개를 돌리던 나는, 반대편 상석에 앉아 있던 이들을 발견했다.

공작과 그의 장남이었다.

눈이 마주치자 공작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양손이 묶인 채로 회의장 안에 끌려 온 수양딸의 모습이 착잡하게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반면에 데릭 쪽은 아무런 표정 변화가 없었다.

[호감도 22%]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2%가 더 떨어져 있었다.

결과적으로 총 7%의 호감도가 하락했다.

당장 데드 엔딩까지 이어지는 것은 아닌지라, 크게 와 닿진 않았다.

그러나 그건 이곳에 온 지 꽤 오랜 시간이 흐른 탓이었다.

게임 초반이었으면 숨이 턱 막힐 만큼 엄청난 하락 폭이 맞긴 했다.

‘신경 안 써.’

나는 놈의 까만 정수리로부터 냉정하게 고개를 돌렸다.

내겐 그깟 엑스 친 놈의 호감도보다 지금 이 에피소드를 타파하는 일이 더 중요했다.

“모두 자중하시오.”

그때 재판을 시작하려는 모양인지 앞쪽에서 진중한 목소리가 들렸다.

황제가 앉는 황좌가 놓여 있는 최상석보다 한층 아래에 놓인 간이 단상 앞에, 머리와 수염이 하얗게 센 노인이 서 있었다.

“황제 폐하께서 출타 중이신 상황에서 황태자 전하마저 옥체 미령하신 탓으로, 본 법무 대신이 재판을 주관하게 됐소. 이에 이의를 제기할 이가 있다면 손을 드시오.”

황태자가 전쟁에 나간 이후 종종 있던 일이었으므로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게다가 게임에서 법무 대신은 청렴하고 철저한 원리원칙주의자라 나오기 때문에 재판을 주관하기 적합한 인물이었다.

내겐 손해 볼 것 없는 일이다.

“페넬로페 에카르트 공녀.”

“네.”

“그대는 이번 사냥 대회 도중, 7명의 귀족 시해 혐의로 이 재판장에 서게 됐소. 대잉카 제국인의 명예를 걸고 성실하게 재판에 임할 것을 맹세하시오.”

“성실하게 재판에 임할 것을 맹세합니다.”

나는 순순히 대꾸했다. 그러자 법무 대신이 고개를 돌려 누군가를 불렀다.

“그럼 피해자들의 진술부터 시작하지. 가보일 자작.”

먼 끝 쪽에 앉아 있던 남자 하나가 일어나 내 옆쪽으로 다가왔다.

재판관을 향해 짧게 묵례한 그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곧장 진술을 시작했다.

“어제 저를 포함한 7명은 합심하여 곰을 잡기 위해 금색 표식 구역 깊숙한 곳까지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운 좋게도 정말 곰을 맞닥뜨렸지요.”

“…….”

“정신없이 곰과 사투를 벌인 끝에 잡기 직전이었습니다. 갑자기 페넬로페 공녀님이 나타나 저희에게 석궁을 겨누며 그 사냥감을 넘기라고 협박을 하는 게 아닙니까!”

“저런…….”

“말세군, 말세야. 쯧, 쯧.”

이곳저곳에서 혀를 차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흘끔 확인한 공작의 얼굴이 아까보다 더더욱 굳어져 있었다.

“우리가 먼저 잡은 사냥감이니 다른 곰을 같이 찾아보자고 설득했는데도 요지부동이었습니다.”

“계속하시오.”

“그러던 중 툴렛 남작이 공녀님께 따지기 위해 나섰고, 그 순간 공녀님이 망설임 없이 석궁을 쐈습니다!”

“세상에!”

탕-!

그때 공작의 반대편에 앉아 있는 엘렌 후작이 책상을 쾅 내리치며 분통을 터뜨렸다.

“어찌 그리 잔악무도할 수가 있단 말인가!”

그 주변에 있는 귀족들이 모두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옳소, 옳소!’ 하고 동조했다.

그에 힘입은 가보일 자작이 더욱더 열연을 펼쳤다.

“당황한 저희들이 우왕좌왕하는 틈에 공녀님은 차례대로 석궁을 쏘았고, 저희는 모두 기절해 버렸습니다. 눈을 뜨니 야영장으로 돌아와 있는 상태이고, 저의 하나뿐인 친우인 툴렛 남작은…… 크흡!”

가보일 자작은 정신이 나간 툴렛 남작이 안타까워 미칠 것 같다는 듯 얼굴을 가리며 고개를 돌렸다.

나를 ‘황태자 암살자’로 몰아넣게 된 퍼즐들이 하나하나 맞춰지고 있었다.

나는 한 편의 희극을 구경하듯 그 모든 상황들을 관조했다.

최후, 극이 클라이막스에 올랐을 때 판을 뒤집어엎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때였다.

“이의 있습니다.”

가만있는 당사자를 대신해서 누군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호감도 22%]

자리에서 일어난 데릭이 차분히 입을 열었다.

“페넬로페의 석궁은 살상용이 전혀 아닙니다.”

어제 꺼지랬다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진짜 꺼진 사람치곤 정말로 의외였다.

난 갑자기 일어서서 나서는 그를 멍하니 응시했다.

“볼트 또한 단순한 소동물 사냥용으로, 기절시키는 마법과 석궁에 맞기 전의 단기 기억을 상실하게 만드는 마법만 걸려 있습니다.”

“…….”

“그런데 페넬로페가 쏜 석궁에 맞았다면서, 어떻게 맞기 전의 일들을 그리도 상세히 기억하는지 의아하군요.”

“그, 그런……! 거, 거짓말 마십시오!”

가보일 자작이 벌게진 얼굴로 반박했다. 너무 정곡을 찔려서 그런 듯했다.

그와 달리 데릭은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대답했다.

“거짓이 아닙니다. 석궁에 직접 마법을 새긴 마법사를 회의장 밖에 대기시켜 둔 상태이니 불러들여 확인하지요.”

“소공작님. 아무리 팔은 안으로 굽는다지만 역성이 너무 심한 거 아니십니까? 마법사를 매수해 두었을지 어찌 압니까!”

“의뢰를 맡길 때 써 뒀던 계약서가 있…….”

아예 준비하지 않은 건 아닌지 데릭은 곧장 반발하려 했다.

그러나 가보일 자작이 버럭 소리 지르다시피 말을 끊었다.

“게다가 공녀님이 직접 백치로 만드는 마법이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는 증인들이 있습니다! 재판관님, 증인들의 증언을 듣는 것을 허락해 주십시오!”

주변이 술렁였다.

귀족들은 명예를 중시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기에 우습게도, 돈으로 매수가 가능한 마법사보다 귀족의 증언을 더 신뢰했다.

“허락하오.”

법무 대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회의장의 문이 열리고, 세 사람이 걸어 들어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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