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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엔딩은 죽음뿐-90화 (90/243)

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90화

드르르륵-

휠체어처럼 바퀴가 달린 의자가 바닥에 끌리면서 조용한 장내에 소란을 일으켰다.

왜소한 남자 하나가 그 위에 눕듯 앉아 있고, 파란 머리가 오만한 표정으로 그것을 끌며 걸어왔다.

도르테아 백작 부인이 도도한 표정으로 그 옆을 따랐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으로 나를 노려보며 피식 조소하는 파란 머리의 모습에서 악의가 철철 흘러넘쳤다.

‘대체 누가 악녀인지…….’

나는 점점 이 망할 에피소드가 억울해지기 시작했다.

게임 속 최고의 악녀라더니, 지금 가만있는 공녀를 모함하고 있는 건 저 악의 무리가 아닌가!

“으, 흐헤! 여, 여신이다! 여신!”

하지만 그 억울함은 곧 휠체어 위에서 펄떡이는 남자로 인해 와장창 부서졌다.

“여신님! 헤에, 여, 여신님!”

남자가 침을 질질 흘리며 내게로 허우적거리며 손을 뻗었다.

“가, 가만히 있어요!”

“어머나, 세상에!”

켈린 영애가 사색이 되어 제 약혼자를 붙들었다.

도르테아 부인은 기겁을 하고 한발 물러섰다.

결국, 시종이 툴렛 남작의 입과 손을 천으로 묶은 후에야 소동은 잠잠해졌다.

“크흠. 켈린 영애, 증언하시오.”

법무 대신이 헛기침하며 술렁이는 분위기를 진정시켰다.

“티 파티에서 에카르트 공녀님이 저희에게 석궁을 겨누면서, 맞으면 백치가 되는 마법이 걸렸다고 밝히셨어요.”

파란 머리는 기다렸다는 듯 나를 쏘아보며 입을 열었다.

“그 자리에는 주최자인 도르테아 부인을 포함해서 여러 가문의 부인 들과 영애들이 함께 있었습니다. 그렇죠, 부인?”

“네, 네. 저도 그렇게 듣기는…….”

도르테아 부인은 내 눈치를 살살 보며 소심하게 답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흠칫 몸을 떨며 입을 다물었다.

나는 그런 그녀를 향해 비죽 웃어 보였다.

‘다행이도, 아직 내 협박이 유효한 것 같네.’

긍정적인 반응이었다.

파란 머리의 분에 찬 증언이 끝나자, 법무 대신이 곧장 내게 질의했다.

“에카르트 공녀. 켈린 영애의 진술에 이의 있소?”

“없습니다.”

나는 짧게 대답했다.

아니나 다를까 곧바로 엘렌 후작의 진영에서 비꼬는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허!”

“쯧쯧, 작년에 이어서 또…….”

“말세요, 말세. 공작 각하는 대체 자식 교육을 어떻게 하는 모양인지…….”

순식간에 내겐 썩 불리한 분위기가 형성됐다.

“재판관님!”

그때, 데릭이 다시 한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다급한 어투로 나를 변호했다.

“사실 제 하나뿐인 여동생은 병석에서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나는 놈의 말에 눈살을 찌푸렸다. 멀쩡한 나로서는 달갑게 느껴지지 않은 변명이었기에.

“게다가 실종됐다가 돌아온 지, 이제 하루가 지난 상태입니다. 당연히 현재 일어난 상황들을 제대로 분별할 능력이……!”

“저는 지극히 제정신이에요.”

더는 못 들어 줄 것 같아, 나는 데릭의 말을 불쑥 끊으며 앞으로 나섰다.

“증언들이 모두 끝났으면 이제 제 진술을 할까 하는데요.”

“페넬로페……!”

데릭이 험악하게 나를 불렀지만, 나는 가뿐히 무시하고 재판관을 바라보았다.

법무 대신이 고개를 끄덕이며 허락했다.

“공녀의 진술을 시작하시오.”

“우선, 켈린 영애의 증언 빼고는 하나부터 열까지 제가 겪은 일과는 현저히 다르군요.”

“그, 그런……!”

“자중하시오, 가보일 자작.”

내 말에 가보일 자작이 버럭 반박하려 들었다.

그러나 법무 대신의 주의에 금방 입을 다물었다. 덕분에 나는 수월히 말을 이을 수 있었다.

“게다가 켈린 영애가 증언한 상황 또한, 티 파티에서 으레 일어나는 사소한 농담과 장난이었을 뿐인데…….”

나는 주변을 둘러보며 최대한 얄밉게 보일 수 있도록 어깨를 으쓱거렸다.

“이런 식으로 매도를 당하다니 심히 유감스럽네요.”

“매, 매도라니요!”

켈린 영애가 나를 째려보며 날카롭게 소리쳤다.

“정말 너무하시네요, 공녀님! 사람한테 석궁을 겨눈 것이 어떻게 사소한 장난이에요?!”

“먼저 석궁 솜씨를 뽐내 달라며 요청했던 것은 영애가 아니었나요? 그리고, 장난인지 아닌지는 도르테아 부인께서 증언해 주실 거예요.”

나는 태연히 답한 후, 눈알을 뒤룩 뒤룩 굴리며 서 있던 도르테아 부인 쪽으로 돌아섰다.

“마지막에 부인께서 제 농담에 동감하시면서 직접 웃음을 주도하셨거든요. 그렇죠, 부인?”

나는 피어나는 꽃처럼 활짝 웃으며 무언의 압박을 가했다.

“지금 제가, 없는 말을 지어내고 있나요?”

“아, 아니요! 네, 네……. 그렇긴 했죠…… 물론 공녀님께서 농담이라 말씀하시긴 했는데…….”

“도르테아 부인!”

파란 머리가 비명을 지르다시피 그녀를 불렀다.

도르테아 부인은 혼비백산한 얼굴로 더듬거리다가 결국 입을 다물었다.

티 파티에 짧은 시간 머물렀지만, 주최자인 도르테아 부인을 판단하기엔 충분했다.

그녀는 누군가를 골리고 괴롭히는 것을 즐기긴 했지만, 절대 앞장서서 나서지 않는 야비한 인간이었다.

켈린의 뒤에서 은근히 말을 보태며 부추기던 것만 생각해도 쉽게 파악할 수 있었다.

이번에야말로 나를 골로 보낼 수 있다는 켈린의 설득에, 티 파티에서 겪은 수모도 갚을 겸 말을 보태러 나온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저런 인간들은 자신에게 정면으로 화살이 쏠리는 것을 못 참기 마련이다.

‘게다가 저 여자는 나를 무서워하지.’

무언의 압박이 제대로 먹혀들었다.

나는 통 나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쭈뼛거리는 그녀를 보며 삐져나오는 웃음을 숨기지 않았다.

“하지만, 재판관님! 공녀님은 작년에도 제게 활을 쏠 뻔한 전적이…….”

“재판관님. 가보일 자작이 주장하는 불곰은 처음부터 제 사냥감이었습니다.”

나는 켈린이 물타기를 하려 들기 전에 재빨리 화제를 전환했다.

완전히 상반된 주장이었다. 법무 대신은 곧바로 눈을 빛내며 흥미를 가졌다.

“흠, 계속 말해 보시오.”

“제가 석궁을 쏘았고 완전히 제압하는 것이 여의치 않자, 황태자 전하께서 목을 베어 주셨습니다.”

“아, 아닙니다! 공녀님의 말은 모두 거짓……!”

가보일 자작이 황급히 고개를 저으며 외쳤다.

“곰의 사체를 보면 답이 나오겠죠.”

나는 칼같이 그의 말을 잘랐다.

“가보일 자작의 주장대로 여럿이서 공격을 했다면, 사체에 그 흔적이 남아 있을 것 아니겠습니까?”

“바로 확인을 해 보겠소. 데니스 경. 부검사와 곰의 사체를 확인하고 오게.”

“네!”

내 타당한 주장에 법무 대신은 곧장 회의장 내 시립 중이던 기사 한 명에게 명령했다.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혼신의 연기를 하던 가보일 자작만이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해 어물거렸다.

“그, 그건…… 다, 단번에 목을 베어서 그런 것입니다…….”

앞뒤가 안 맞는 것은 물론, 말도 안 되는 주장이었다.

그 또한 제 말에 자신이 없는지, 점점 목소리가 작게 수그러들었다.

“그럼 에카르트 공녀는 어째서 황태자 전하와 숲속에 같이 있던 거요?”

그때였다. 불쑥 왼쪽에서 들려 온 나이 든 음성에 나는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드디어 본체가 등장하셨구만.’

꼭두각시가 성에 차지 않았는지, 엘렌 후작이 초조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황태자 전하와 공녀는 일면식도 제대로 없는 사이인 걸로 알고 있는데. 뜬금없이 두 사람이 같이 사냥을 했다는 게 믿기지 않는군.”

엘렌 후작이 던진 의문에 ‘그건 그렇지.’ 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좌중들이 보였다.

사실, ‘황태자 암살범’으로 몰렸음을 알고 난 후부터 저 부분을 필히 걸고넘어질 거란 걸 예상했다.

내게 ‘암살자의 증표’가 있더라도, 단둘이 곰 사냥을 하게 된 경위에 대해 모두가 납득할 만한 설명을 하지 않으면 안 됐다.

왜냐하면, 그와 만난 것은 모두 게임 제작자의 안배였기 때문이다.

‘우연히’라는 말로는 석연치 않음을 풀 수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누명을 씌운 놈들에게 꼬투리 잡힐 여지만 줄 뿐이다.

하여 나는, 작은 의심의 싹조차 남기지 않고 짓밟기 위해 눈물을 머금고 입을 열었다.

“황태자 전하와는…… 밀회를 하기 위해 만났습니다.”

‘이건 내가 말하는 게 아니다. 시스템이 시킨 거다.’

나는 이를 꽉 깨물고 억지로 웃으며 유체이탈 화법을 썼다.

“저와 전하는 사실 서로를 향해 연, 연모…… 의 감정을 가지고 있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소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도저히 못 하겠어!’

위기였다. 하지만 여기서 입을 다물면 이상하게 여길 것이 분명했다.

어떻게서든 이 위기를 타파해야 한다.

“……큼, 서로에게 연모의 감정을 가지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간신히 목을 가다듬고 말을 마쳤을 때였다.

“뭐, 뭣이?!”

쾅-!

그 순간 오른쪽 테이블에서 책상을 부술 듯한 굉음이 울려 퍼졌다.

공작이 찢어질 듯 커다래진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페넬로페 에카르트! 그, 그게 대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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