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의 엔딩은 죽음뿐-91화 (91/243)

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91화

“공작 각하, 법정입니다.”

버럭 소리를 지르려던 그에게 법무 대신이 주의를 줬다.

공작이 거칠게 씨근덕거리며 간신히 입을 다물었다. 그 심정이 이해가 갔다.

황태자 놈에게 목이 베어 왔던 막내딸이 갑자기 ‘연모’의 감정을 갖고 있다고 고백하다니.

나 같아도 환장스러울 것이다.

“화, 황태자 전하와 공녀가……!”

내 한마디가 일으킨 파장은 대단했다.

적막했던 회의장 안이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

그 속에서 나는 충격으로 굳어진 또 하나의 파란 눈과 마주쳤다.

데릭이 두 주먹을 꽉 쥔 채 나를 뚫어져라 응시하는 중이었다.

‘당장 뛰쳐나와서 멱살이라도 잡을 기세네…….’

새카만 머리 위가 위태롭게 깜빡이기 시작했다.

그에게서 퍼져 나오는 엄청난 기세에 등골이 섬찟했다.

‘22%’에서 더 떨어지면 사실 위험하긴 했다.

나도 모르게 연신 그의 머리 위를 흘깃대고 있을 때였다.

“조용! 다들 자중들 하시오!”

탕, 탕, 법무 대신이 의사봉을 내리치며 소란스러운 장내를 가라앉혔다.

“에카르트 공녀, 계속해 진술하시오.”

“……그런데 얼마 전, 전하께 제가 이별을 고했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유체이탈 화법을 사용했다.

마치 내가 그런 게 아닌 듯, 남 얘기를 하는 듯.

“전야제에 참석한 분 중 그것으로 연회장에서 전하와 제가 다투는 것을 분명 본 사람들이 있을 거예요.”

“그러고 보니 사냥 전야제에서 본 것 같기도…….”

몇 명이 잊고 있던 게 생각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때 크게 말하기를 잘했어.’

중요한 건 황태자와 공녀의 엄청난 스캔들이었다.

나는 허겁지겁 본론으로 돌아갔다.

“곰 사냥 직후, 황태자 전하를 해하러 온 암살자들을 맞닥뜨렸습니다.”

“그, 그런……!”

“암살자에게 쫓기던 중 전하께선 그들의 공격으로 부상을 당하셨고, 수세에 몰려 절벽 아래로 같이 떨어졌습니다.”

가보일 자작과는 판이한 진술에 귀족들은 모두 혼란과 충격에 빠졌다.

나는 기세를 몰아 가보일 자작을 돌아보며 물었다.

“저는 분명 곰과 암살자 외에는 석궁을 쏜 적이 없는데, 제 석궁에 맞아 기절하셨다는 분들은 대체 어떤 영문인지를 모르겠네요.”

“거, 거짓말입니다! 저, 저는…… 저희는 분명 공녀님께…….”

가보일 자작은 누가 봐도 수상하리 만치 말을 더듬었다.

엘렌 후작이 굳은 얼굴로 재빨리 말을 받았다.

“하지만 공녀의 말대로라면 좀 이상한 부분이 있지 않소이까.”

“무엇이요?”

“전하께선 지금 원인을 알 수 없는 혼수상태에 빠져 계시오. 진찰을 본 황궁의가 말하길, 겉으로 드러난 부상은 경미하여 다른 이유가 있을 거라더군.”

“네. 그런데요?”

나는 황태자와 연인이었다고 주장한 사람치곤 퍽 심드렁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만약 공녀의 주장대로 암살자의 습격을 받아 전하께서 부상을 당하셨고, 그로 인해 절벽에서 떨어졌다면 수색대가 찾아낼 때까지 이동이 불가해야 마땅하지.”

“…….”

“하지만 황태자 전하와 공녀는 다음 날 숲의 초입 근처까지 걸어온 상태이지 않소. 그 직후 황태자 전하께서 쓰러졌지. 그건 마치…….”

엘렌 후작은 의미심장한 투로 말끝을 흐렸다.

‘그건 마치, 네가 일부러 따로 유인해 독살이라도 시도한 것 아니냐.’

다 하지 않은 뒷말은 뭐 대충 예상이 갔다.

엘렌 후작은 암살의 증거가 없다고 굳게 믿고 있는 듯했다.

‘사실, 뭐 맞는 말이지.’

고대 마법 지도를 찾지 못하고 황태자가 쓰러져 버렸다면, 여태 동굴을 빠져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장내에 숨 막히는 정적이 내려앉았을 무렵.

“이보시오, 엘렌 후작!”

불현듯 공작이 ‘탕!’ 의자 팔걸이를 치며 노성을 토해 냈다.

“가만히 지켜만 보니 도가 지나치군. 감히 누굴 모함하는 게요! 그럼 내 여식이 황태자 전하를 음해하려 들기라도 했다는 거요, 뭐요!”

“꼭 따님만의 독단적인 행동이라고 볼 수는 없지요.”

“이, 이런 건방진……!”

“말씀이 심하십니다, 각하. 저는 타당한 의심을 하는 것뿐입니다.”

엘렌 후작이 분통을 터뜨리는 공작을 향해 얄밉게도 이죽거렸다.

그리고 내게로 다시 시위를 돌렸다.

“에카르트 공녀, 그대가 말해 보시오. 전하께서 어찌하여 정신을 잃으신 건지.”

“독에라도 당하신 건가 보죠.”

나는 무표정한 얼굴로 대꾸했다.

내가 이렇게 대놓고 답할 줄은 몰랐는지 엘렌 후작의 낯이 확 달라졌다.

“그, 그걸 공녀가 어떻게 확신하지? 꼭, 공녀가 전하께 독을 사용하기라도 한 것처럼 들리는군!”

“글쎄요. 그건 제가 암살자로부터 빼앗아 온 증거물을 조사해 보면 알 수 있겠지요.”

“뭐, 뭐라?!”

여유로운 태도를 고수했던 후작이 그 순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증거가 있었다니……!”

“암살자에게 습격을 받았다는 공녀의 진술이 사실이란 말이오?”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를 만큼 장내가 폭발적으로 뜨거워졌다.

“거, 거짓이요! 다, 다 거짓으로…….”

그 와중에도 가보일 자작만이 눈치 없이 사람들을 회유하려 들었다.

“재판관님. 황태자 전하를 해치려 했던 암살자의 단도를 증거물로…….”

널널하게 묶인 손으로 품 안에 있는 단도를 꺼내며 말을 내뱉는 순간이었다.

문득 눈앞이 환해지더니.

〈SYSTEM〉 ~메인 퀘스트 : 사냥제의 퀸이 되어 보자!~

[세 번째. 암살자 밝혀내기] 퀘스트를 진행하시겠습니까?

(보상 : 모든 남자 주인공들의 호감도 +7%, 명성 +70)

[수락 / 거절]

시스템 창을 읽은 나는 눈을 번뜩였다.

‘모든 남주 호감도 7%……!’

지금까지 했던 빌어먹을 퀘스트 중 역대급으로 후한 보상이었다.

〈SYSTEM〉 메인 퀘스트임으로 5초 후 자동 수락됩니다.

〈SYSTEM〉 5

나는 채 1초가 지나기도 전에 [수락]을 연타했다.

보상도 후한 데다, 지금까지 해 왔던 빌어먹을 퀘스트들에 비해 수월한 난이도였기에 수락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와 동시에 네모 창 안의 글씨가 새로이 바뀌었다.

〈SYSTEM〉 [두 번째. 암살자로부터 황태자 지키기] 퀘스트 보상으로 얻은 [암살자의 증표]의 주인을 찾으십시오.

[보기]

1. 엘렌 후작

2. 가보일 자작

3. 툴렛 남작

4. 켈린 백작

나는 느닷없이 뜬 객관식에 내심 놀랐다. 당연히 1번이 정답일 줄 알았기 때문이다.

앞서 훑었던 엘렌 후작가의 문양과 단도에 새겨진 문양이 일치했기에.

하지만 이 망할 게임이 그리 단순하게 진행될 리 없었다.

“에카르트 공녀. 하려던 말을 계속하시오.”

뒤늦게 재판관이 나를 불렀다.

방금 전까지 시끄럽게 떠들어 대는 귀족들의 입을 다물게 하느라, 그는 다소 지쳐 보였다.

덕분에 내가 말을 하다 우뚝 멈춘 것을 이상하게 여기진 않는 것 같았다.

나는 품에 있는 단도의 모습을 빠르게 되새겼다.

엘렌 후작가의 문양이 새겨진 단도를 쓰고, 비단실로 꼬아 만든 장식 선물을 암살 도구에 달 만큼 어리석은 자.

게다가 비단실의 색은 낯익은 파란색이었다.

정답을 추론하긴 어렵지 않았다.

‘3번!’

나는 재빨리 보기 중 하나를 눌렀다.

마지막까지 끈질기게 황태자를 찔러 죽이려 했던 이는 다름 아닌, 켈린 영애의 약혼자였다.

〈SYSTEM〉 정답! 이제 [암살자] 세력을 밝히십시오!

새 글씨가 떠오름과 동시에 나는 입을 열었다.

“황태자 전하를 찔렀던 암살자의 단도를 증거물로 제출합니다.”

시스템 창으로 인해 품에서 꺼내다 멈춘 단도를 당당하게 꺼내 들었다.

“그게 암살자의 단도라는 것을 어,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이오!”

“엘렌 후작가의 문양이 칼날 하단에 새겨져 있습니다.”

“뭐, 뭐라?!”

나는 문양이 법무 대신과 상석에 앉아 있는 고위 귀족들에게 잘 보이게끔 앞으로 쭉 쳐들었다.

엘렌 후작이 입을 떡 벌렸다.

“게다가 이 비단실의 주인이 누군지 추적하면 암살을 사주한 세력 전체를 알 수 있겠지요.”

말을 마저 이으며 단도의 손잡이를 살며시 흔들었다.

그 끄트머리에 매어진 파란색 비단 장식이 내 손짓에 따라 달랑달랑 흔들렸다.

“저, 저건…… 켈린 영애가 얼마 전에 만들었다고 자랑한 장식인데…… 어머나.”

비단 끈을 알아본 도르테아 부인이 무심결에 말을 하다가 아차하며 서둘러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하지만 이미 들릴 대로 다 들린 후였다.

“모, 모함이오!”

“모, 모함이에요!”

엘렌 후작과 켈린 영애는 무슨 ‘이구동성’ 게임이라도 하듯 거의 동시에 ‘모함’을 부르짖었다.

“공녀가 툴렛 남작과 그의 동료들을 기절시킨 후 빼앗아 온 걸지 어찌 안단 말……!”

“공녀님께서 직접 곰을 사냥하시는 것을 제가 목격했습니다.”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