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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엔딩은 죽음뿐-92화 (92/243)

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92화

그 순간, 회의장 문이 벌컥 열리더니 누군가 빠른 걸음으로 걸어와 단상 옆 비어 있는 자리에 앉았다.

“늦어서 정말 죄송합니다. 신병을 넘겨받은 아이 중 하나가 발작을 일으킨지라…….”

[호감도 32%]

뷘터가 멋쩍은 얼굴로 늦게 나타난 것에 대한 사과를 읊조렸다.

‘그러고 보니…… 쟤도 고위 귀족이긴 했지.’

나는 그가 자리에 있는지 없는지도 몰라서 조금 얼떨떨한 얼굴로 그를 응시했다.

“베르단디 후작! 그, 그게 무슨 소리요!”

뷘터가 채 자리에 완전히 착석하기도 전에 엘렌 후작이 숨넘어갈 듯 물었다.

“재판관님. 제가 목격한 것에 대해 진술해도 되겠습니까?”

뷘터는 엘렌 후작에 대한 답 대신, 차분하게 손을 들고 법무 대신을 향해 양해를 구했다.

“허락하오.”

허락이 떨어지자, 그가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엊그제 공녀님이 실종되기 전, 금색 표식 구역에서 불곰에 맞서 홀로 용맹하게 사냥하는 모습을 목격했습니다.”

“모, 모함입니다! 베르단디 후작은 그 주변에서 본 적도……!”

“어허, 가보일 자작!”

탕, 탕!

법무 대신이 의사봉을 쳤다.

“자중 좀 하시오! 다른 이가 진술 중이지 않소.”

그러면서 자꾸만 입을 여는 가보일 자작에게 짜증스럽게 소리쳤다.

“계속하시오, 베르단디 후작.”

“하지만 공녀님께선 볼트가 떨어지셨는지 석궁을 쏘는 것을 중간에 잠시 멈추셨습니다.”

“…….”

“자칫 위험한 상황으로 이어질 것 같아 공녀님께 도움을 드리기 위해 나서려는 순간, 황태자 전하께서 나타나 곰의 목을 베었습니다.”

거짓말이라기엔 그는 너무나도 내 상황과 일치하는 진술을 했다.

그때, 정말로 어딘가에서 그가 나를 지켜보고 있었단 소리다.

나는 뷘터의 진술에 새삼 소름이 끼쳤다.

‘역시, 내가 생각했던 게 맞았어.’

빌어먹을 ‘돌발 퀘스트’는 불곰에서 끝이 아니었던 것이다.

황태자가 먼저 나서지 않았더라면 필연적으로 뷘터, 아니면 데릭, 레널드 놈들을 돌아가면서 만났을 게 뻔했다.

그러면서 결정적인 순간에 남주 놈들이 나타날 때까지 나는 끊임없이 날뛰는 맹수를 상대했어야 할 테지.

‘미친 게임 같으니라고…….’

등골이 오싹해져서 남몰래 몸을 떠는 동안, 뷘터는 차분히 진술을 마쳤다.

“두 분께서 진중한 대화를 나누시는 것 같기에 저는 자리를 옮겼습니다. 제가 본 것은 여기까지입니다.”

회의장 안은 다시 충격의 도가니가 몰아쳤다.

“그렇다면 가보일 자작의 말이 다 거짓이란 소리가 아니요?”

“공녀의 진술이 사실이었군.”

“세상에, 툴렛 남작이 황족 시해범이었다니…….”

나는 술렁이는 주변을 돌아보며 흘긋 에카르트 쪽을 곁눈질했다.

공작의 얼굴은 다른 이와 별 다를 바 없었다.

의외인 것은 데릭의 얼굴이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놈의 얼굴이 천천히 일그러졌다.

놀랍고 충격적인 것보다는, 분노한 것에 가까워 보였다.

끝내 믿지 못했던 망나니 같은 양동생의 말이 진실이었다는 것이 화가 난 것인지.

아니면, 내가 앞서 말한 ‘황태자와 밀회하기 위해 만났다.’는 말이 사실이라 화가 난 건지는 몰랐다.

다행인 건, 처참하게 구겨진 놈의 얼굴과는 달리 느릿하게 깜빡이던 호감도는 끝내 변동이 없다는 것이었다.

‘봐.’

나는 눈을 피하지 않고 보란 듯이 고개를 쳐들었다.

‘네 같잖은 도움 따위 없어도, 나 혼자서 충분히 알아서 할 수 있으니까.’

서늘하게 식은 눈으로 그를 마주 보던 중.

탕, 탕-!

“판결을 내리겠소!”

소란스러운 인파 사이로 재판관이 위엄 있게 외쳤다.

“이 사건과 관계없는 제3의 목격자가 존재하고, 그 증언이 용의자였던 공녀의 진술과 일치하고 있소.”

“…….”

“게다가 공녀가 가지고 있는 증거물이 너무나도 명백한 바.”

판결 직전, 주위가 쥐죽은 듯 고요해졌다.

법무 대신은 잠시 숨을 돌리고 마저 이어 말했다.

“조사를 받아야 할 이들은 에카르트 공녀가 아닌 툴렛 남작, 가보일 자작을 포함한 7명의 귀족들, 그리고 엘렌 후작일 듯하오.”

“재, 재판관님! 이의 있습……!”

“황태자 전하께서 아직도 의식 불명이신 상태요. 이것은 황족 시해 미수로 이어질 수 있는 중대한 사건이니, 그와 관련된 귀족들을 모두 구금할 것을 명하오!”

탕, 탕, 탕-.

법무 대신의 손에 들린 의사봉이 세 번의 소리를 내며 판결을 확정 지었다.

그 순간이었다.

〈SYSTEM〉 ~메인 퀘스트 : 사냥제의 퀸이 되어 보자!~

[세 번째. 암살자 밝혀내기] 퀘스트 성공!

〈SYSTEM〉 보상으로 [모든 남자 주인공들의 호감도 +7%]와 [명성 +70]를 얻었습니다.

(명성 total : 200)

‘됐어. 끝났어!’

나는 두 주먹을 꽉 쥐고 환호했다.

“황제 폐하께 즉시 이에 관한 전갈을 보내야겠소. 발터 경! 명령을 바로 이행하시오!”

재판관은 이어서 단상 바로 옆에 앉아 있던 근위대장을 불렀다.

그러자 회의장의 문이 열리면서 우르르 기사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이, 이건 모두 모함이오, 모함!”

포박하기 위해 다가오는 근위병들을 보며 엘렌 후작이 발작하듯 고개를 저었다.

“난 아니오! 투, 툴렛 저 자식이 독단으로 저지른 일이오! 난 관계없는 일이오!”

“저, 저는 모르는 일이에요! 왜, 왜 저까지……!”

그것은 파란 머리 또한 마찬가지였다.

팔이 뒤로 꺾인 채 거칠게 제압당하던 그녀는 정신없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저를 도와줄 만한 이를 찾는 것이다.

그러나 켈린 백작가는 귀족 회의에 참석할 수 있을 만큼 세가 강한 가문이 아니었다.

어쩌다 엘렌 후작에게 줄을 대서 도약을 노린 것 같은데…….

그러기 위해 권력의 중심인 에카르트 공녀를 짓누르고 사교계를 휘어잡으려던 것임이 분명하다.

‘내가 작년처럼 멍청하게 당하고만 있을 거라 생각했겠지.’

나는 흉한 몰골로 질질 끌려가는 그녀를 냉정하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 게임 속 최고 악녀는 나야.’

관련된 자들이 모두 근위병에게 끌려 나가고 슬슬 회의장이 정리되는 양상을 띠었다.

빠져나가는 몇몇 귀족들이 말을 걸고 싶은지 연신 나를 흘깃댔지만, 워낙에 살벌한 얼굴을 하고 있는지라 다가오는 이는 없었다.

“공녀님. 증거물을 주시겠습니까?”

그때, 근엄하게 생긴 중년의 근위대장이 직접 내게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여기요.”

나는 순순히 들고 있던 칼을 넘겼다. 그것을 품에 챙긴 그는 이내 다른 것을 요청했다.

“포박도 풀어드리겠습니다. 손을 좀 주십시오.”

얇은 밧줄에 묶인 양손을 내밀자 그가 ‘실례하겠습니다.’ 하고 내 양 손목 위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무어라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짧게 중얼거렸다.

그러자 두 손목을 연결한 채 묶여 있던 밧줄이 스르륵 풀려 바닥에 떨어졌다.

근위대장은 내게 묵례한 후 그것을 챙겨 들고 떠났다.

‘뭐야. 마도구였어?’

어쩐지 허술하게 묶어 뒀다 했더니. 시동어 없이는 절대로 끊거나 풀 수 없었던 것이다.

‘VIP’라고 착각했던 아까 전의 내가 떠올라 머쓱해졌다.

긴장이 풀려서 그런지 묵직한 피로감이 목 뒤를 엄습했다.

휴식이 필요했다. 서둘러 회의장을 빠져나가기 위해 막 뒤로 돈 차였다.

“페넬로페 영애.”

누군가 내 앞을 막아섰다.

[호감도 39%]

결 좋은 은발 위로 흰 글씨가 반 짝였다. 훌쩍 오른 호감도가 흡족했다.

“……후작님.”

생각해 보니 뜬금없이 나서 준 뷘터에게 고마워해야 했다.

어쨌든 그가 나서 확인 사살을 해 준 덕에 판결이 더 빨리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내게 ‘천둥벌거숭이’처럼 석궁 쏜 것을 인정하라며 강요했던 누구와는 다르게 말이다.

“도와주셔서…… 감사했습니다.”

나는 살며시 고개를 숙이며 감사 인사를 전했다.

“덕분에 누명을 빨리 벗을 수 있게 되었네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한 것뿐입니다.”

뷘터는 이전에 내가 했던 말을 인용하여 답했다.

“게다가 전야제에서 저를 도와주신 것에 대한 은혜를 갚을 수 있어 기쁩니다.”

문득 웃음이 새어 나왔다.

뷘터를 만날 때마다 매번 ‘답례’를 해야 한다는 소리를 듣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는 정말로 뼛속까지 철저한 상인이었다.

“후작님은 매번 셈이 정말로 확실하시네요.”

“…….”

갑작스레 터져 나온 웃음에, 군청색 동공이 약간 커졌다.

그는 말없이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좀 민망해져서, 나는 띠고 있던 웃음을 지웠다.

“받지 않는다고 했지만 그래도 주신 답례, 이번에는 감사히 받겠습니다.”

“…….”

“그럼 이만.”

다시 한번 고개 숙여 인사하고 그를 스쳐 지나가려 하던 때였다.

“그럼 필요할 때 다시 찾아와 주시는 겁니까?”

불현듯 그가 입을 열었다. 우뚝, 걸음이 멈췄다.

“신뢰를 완전히 회복했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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