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93화
나는 천천히 그를 다시 돌아보았다.
그는 지금, 상단에서의 일을 꺼내고 있었다.
‘……뭐지? 떠보는 건가?’
내가 먼저 알아보는 상황을 만들 생각만 했지, 그가 직접 자신의 정체를 밝히리란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
게다가 이렇게 대놓고 떠볼 줄은 더더욱.
나는 잠시 뭐라고 대답하면 좋을지 고민했다.
뷘터는 여전히 보험이라 할 수도, 그렇다고 엑스라 칭할 수도 없는 존재였다.
나는 결국 모호하게 대꾸했다.
“딱히 다시 찾을 만한 일이 생길 것 같진 않은데요.”
“역시, 알고 계셨군요.”
곧장 답이 돌아왔다.
역시, 떠본 게 맞았다.
“……제가 사람들의 특징을 잘 기억하는 편이어서요.”
나는 애매한 미소를 지으며 그와 눈을 지그시 마주쳤다.
“아.”
예상치 못한 한 방이었는지, 그로부터 미약한 신음이 새어 나왔다.
노멀 모드의 여주가 써먹었던 터무니없는 설정을 변명 삼은 것이었다.
눈동자 색으로 후작과 마법사가 동일인물임을 알아맞히다니…….
그러나 직접 겪어 보니 이 게임 속 세상에서는 나름대로 개연성이 있었다.
상인을 무시하는 오만한 귀족들은 가면을 쓴 정보상의 눈동자 색까지 일일이 기억하지 않기에.
“입조심이 걱정되시는 거라면, 아이들에 대한 기억을 지우셔도 돼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가 나를 떠본 이유에 대해 대강 추측한 나는 미련 없이 말했다.
뷘터는 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것이 아니라…….”
말끝을 흐리던 그는 내 쪽으로 불쑥 손을 뻗었다.
“……영애는, 마주칠 때마다 다쳐 계시는 것 같군요.”
기다랗고 견고한 손가락이 목덜미에 닿을 듯 말 듯 스쳤다.
“아.”
따끔한 통증에 나도 모르게 신음이 튀어나왔다.
뷘터는 내 짧은 신음에 움찔하며 손을 거뒀다.
이번엔 그 대신 내가 손을 들어 그 자리를 어루만졌다.
손에 까슬까슬한 피딱지가 느껴졌다.
생채기가 나서 레널드가 약을 발라 줬던 곳이다.
그때는 아무런 감각도 못 느꼈는데, 이번에는 화끈거리는 통증이 피어올랐다.
나도 모르는 새에 같은 자리를 또 쓸린 듯했다.
연신 상처를 어루만지자, 뷘터가 진중한 어투로 말했다.
“만지지 마십시오. 혹시 모르니 치료소를 가시는 것이…….”
“페넬로페.”
그때였다. 누군가 나를 불렀다.
뷘터에게 향했던 고개가 반사적으로 돌아갔다.
[호감도 29%]
퀘스트 보상 덕분에 어느새 하락하기 전과 같이 복원된 호감도.
데릭 놈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다가오고 있었다.
‘공작은 먼저 갔나 보네.’
비어 있는 그의 곁을 바라보며 나는 조금 의외라고 생각했다.
“안녕하십니까, 소공작님.”
뷘터가 다가온 데릭에게 살짝 묵례하며 인사했다.
바로 내게 용건을 밀어 붙이려던 데릭이 멈칫하다가 마지못해 고개 숙여 마주 인사했다.
“아까 전 증언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후작님.”
“아닙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었는걸요.”
“제 여동생과 무슨 할 얘기가 있는지 모르겠으나, 가족끼리 긴히 모여야 할 일이 있으니 그만 데리고 가 봐도 되겠습니까.”
“그러시군요.”
다소 예의 없는 데릭의 발언에도 뷘터는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순순히 물러섰다.
“영애, 그럼 하던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아니요. 그러실 필요 없어요.”
그런 뷘터의 손목을 살며시 잡아 붙든 것은 다름 아닌, 그와의 대화를 파하려던 나였다.
“마저 대화 나누시죠, 후작님.”
“페넬로페 에카르트.”
데릭 놈이 얼음장 같은 음성으로 내 이름을 불렀다.
검은 머리칼 위로 느릿하게 호감도가 깜빡거리기 시작했다.
“……이게 뭐 하는 짓이냐.”
뷘터의 손목을 붙잡고 있는 내 손을 발견한 데릭의 얼굴이 무시무시하게 변했다.
미묘해지는 뷘터의 표정을 뒤로한 채, 나는 서늘한 눈으로 데릭을 마주 보았다.
“저는 더 나눌 얘기 없다고 말씀드렸을 텐데요.”
“……보는 눈이 많다.”
데릭의 양턱에 불끈 힘이 들어갔다.
“그 손 놓고 당장 따라와.”
그 소리를 들은 순간,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이것이었다.
‘내가 왜 저 명령을 들어야 하는 거지?’
나는 정말로 놈과 더 할 말이 없었다.
가문에 피해를 준 일도 없었고, 저지른 일도 말끔히 해결해 놓은 상태지 않은가.
“언제는 보는 눈, 안 보는 눈 구별하셨나요?”
나도 모르는 새 삐딱한 웃음이 절로 튀어 나갔다.
“다들 저를 보고 병석에서 일어난 지 얼마 안 돼 온전치 못한 사람인 줄 알겠죠. 신경 쓰지 마세요.”
“너…….”
내 변호라고 지껄였던 말을 토대로 비아냥거리자, 깔끔하게 넘겨 올린 이마 위에 핏줄이 솟았다.
뷘터는 꽤 좋은 방패막이었다.
다른 이들의 이목이 영 신경 쓰이는지, 데릭은 섣불리 나를 끌고 가려 들지는 않았다.
그는 크게 숨을 들이쉬며 가까스로 화를 누그러뜨렸다.
“그래, 인정하지.”
“……뭘요?”
“내 생각에 착오가 있었다.”
“…….”
“하지만 지금껏 네 행실을 돌이켜 보아라. 그간의 네 평판과 무도함을 생각하면, 누구든 그렇게 판단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하.”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무슨 할 말이 남았을까 했더니.’
고작 변명과 탓뿐이었다.
나를 끝까지 믿지 않고, 내게 사실 여부를 확인할 생각도 없이 날 ‘귀족 시해범’으로 몬 것에 대한.
게임을 할 때 내가 동경했던 이성적인 냉미남 남주는.
이토록이나 졸렬한 놈이었다.
“소공작님껜 참 쉽네요.”
“……뭐?”
“귀족 시해란 누명을 씌우는 것도, 정신이 온전치 못한 천둥벌거숭이로 모는 것도.”
“…….”
“모든 걸 다 제 탓으로 치부하면, 쉽게 해결할 수 있으니까요.”
내 빈정거림에 데릭의 눈이 부릅떠졌다.
호감도가 위태롭게 깜빡이기 시작했다.
“저한테 하실 말씀이, 네가 잘못 처신해서 누명을 쓴 거니 남 탓하지 말라는 소리뿐인가요?”
“페넬로페 에카르트.”
‘호감도 -2%’
[호감도 27%]
쉽게도 올랐다. 쉽게도 떨어지는 호감도는 내게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했다.
바닥을 기는 이 기분으로는, 한 번에 한 10%까지 떨어져도 괜찮을 것 같았다.
놈의 얼굴이 흉악하게 일그러졌다. 반면에 나는 미소를 만면에 띠운 채 싱긋 웃었다.
“걱정 마세요. 저도 다 제 탓이란 걸 알아요. 그러니 저 혼자 알아서 수습한 거겠죠.”
“너 혼자 하겠다는 수습이 결국, 에카르트의 이름에 먹칠하는 것이었나? 황태자 전하와 밀회라니. 어디 할 말이 없어서…….”
“그럼 뭘 어떻게 했어야 하는데요?”
나는 정말로 알 수가 없어서 어깨를 으쓱였다.
“우연히 맞닥뜨린 곰과 사투를 벌이는 중, 우연히 지나가던 황태자 전하께서 그 곰의 목을 베어 주신 와중에 우연히 암살자를 만나 같이 쫓겼다…….”
“…….”
“이렇게 진술해야 했을까요?”
나는 전날 밤 데릭에게 말했던 정황을 그대로 읊었다.
사실대로 말하는 것뿐이지만 이렇게 말했다면 아무도 믿지 않았을 것이다.
엘렌 후작이 그렇게 몰아갔을 테니까.
“그래서 그대로 황족 시해범이 됐어야 속이 시원하시겠어요?”
“비약하지 마라.”
가까스로 분을 참고 있는지, 데릭이 잇새로 짓씹듯 뇌까렸다.
내게로 쏘아지는 눈빛에 시퍼런 살기가 담기기 시작했다.
“일찍이 증거물이 있다는 말을 했더라면, 가문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터무니없는 스캔들 없이도 해결할 수 있었겠지.”
“그런 터무니없는 스캔들까지 지어내도록 만든 게 누군데요.”
나는 이를 악물고 악착같이 대꾸했다.
“제게 증거물이 있다는 말을 할 틈은 주셨고요?”
표정 관리를 하기 힘들었다.
나는 내가 엉망진창이 된 얼굴로 입꼬리만 간신히 들어 올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옆쪽에서 뷘터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럼에도 멈출 수 없었다.
“아무것도 듣지 않으셨잖아요. 모함이란 말도, 해결할 방법이 있다는 말도, 힘겹게 털어놓은 진실조차.”
“……페넬로페.”
“듣지 않은 건 소공작님이시잖아요. 왜요, 이것도 제 탓이라고 하시 게요?”
너무 격양된 탓일까. 나는 남들 앞에선 ‘오라버니’라고 불러야 한다는 것조차 상기할 틈이 없었다.
- 소공작님. 이번 일은 명백한 모함이에요. 해결할 방법이 있어요. 사실 제게…….
- ……제게 어떤 이유가 있어서 정당방위를 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으세요?
- 지나가던 황태자 전하께서 난항을 겪고 있는 저를 도와 곰의 목을 베어 주셨어요.
황태자와 밀회니, 연인이니.
그것들을 입에 담는 것을 가장 피하고 싶던 것은 바로 나였다.
그러나 밤새 머리를 쥐어짰지만, 내겐 그것이 한계였다.
어쩌면, 더 좋은 방법이 있을지도 몰랐다.
데릭의 명민한 머리와 에카르트의 이름을 빌렸더라면, 훨씬 더 괜찮은 증언으로 입을 맞출 수도 있었다.
그러기 위해 나는 분명 데릭에게 암살자의 증표를 넘기려 마음먹었었다.
하지만 그것들을 무시하고 끝내 혼자 알아서 수습하도록 만든 것은 바로 네가 아니던가.
“하실 말씀 다 끝나셨으면 저는 이만 후작님과 마저 대화를 나누고 싶은데요. 아시다시피, 재판의 증언과 관련해서 긴히 얘기를 나누던 중인지라.”
“대화가 부족했다.”
뷘터를 끌고 당장이라도 떠날 기세처럼 보였는지, 데릭이 앞을 막아서며 다소 성급하게 답했다.
“너도 알다시피, 상황이 무척 급박하게 돌아갔고 우리 쪽에 전달된 정보들은 극히 제한됐었다.”
“…….”
“저들은 계속해 에카르트를 황족 시해의 배후로 몰고 있었고, 암살을 위해 네게 석궁을 훈련시켰다는 말도 안 되는 낭설이 기정사실화되었지.”
데릭은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나는 그게 어제의 연장선처럼 느껴졌다.
“너를 바로 감옥에서 빼내기 위해선, 빠르게 일을 마무리 짓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을 뿐이야.”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건진 모르겠지만 전 괜찮아요, 소공작님.”
나는 단호한 어투로 즉답했다.
“어차피 일말의 기대도 안 했으니까.”
그 순간, 데릭의 얼굴이 처참하게 구겨졌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언제나 무표정했던 그의 얼굴에 분노보단,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선명하게 떠올라 있었다.
“……페넬로페.”
그가 꽉 잠긴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그리고.
[호감도 32%]
깜빡이던 호감도가 휙 상승했다.
나는 조금 놀란 채로 그것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잠깐 가졌던 흥미도 빠르게 털어냈다. 그리고 이내 짧은 묵례로 그를 일별했다.
“가시죠, 후작님.”
뷘터의 손을 이끌고 지나치는 동안, 데릭은 석상처럼 굳은 채 우두커니 서 있기만 했다.
그가 다시 나를 붙잡는 일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