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94화
회의장 밖을 빠져나온 나는, 사람이 없는 한적한 곳에 이르렀을 때에서야 손을 놓고 뷘터에게 사과했다.
“죄송해요, 후작님. 실례가 많았습니다.”
본의 아니게 나와 데릭 사이에 끼어 봉변을 당한 그에게 사과의 말을 건넸다.
뷘터는 아무 말 없이 나를 바라보다,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리고 내게 내밀며 뜬금없는 말을 꺼냈다.
“울지 마십시오.”
“……네?”
영문 모를 소리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손을 들어 얼굴을 더듬었다.
물기는커녕, 며칠간 잠을 설친 탓에 꺼칠해진 피부만 만져졌다.
당연했다. 나는 전혀 울고 있지 않으니까.
“그게 무슨 말씀…….”
“고운 눈에서 슬픔이 가져 있는 것이 제게 줄 답례라고 말씀드렸는데.”
“…….”
“영애의 눈은 항상 웃음보단 슬픔만 가득하군요.”
뷘터의 말에 까맣게 잊고 있었던 그와의 첫 만남이 떠올랐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얼굴이 와락 일그러지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사실 거짓말이었다.
나는 감옥에 찾아온 데릭이 내 말을 듣고 도와주길 기대했다.
빌어먹을 하드 모드인 것을 알면서도, 게임이니 현실과는 다른 점이 있을 거라고.
개연성 상관없이 극적인 변화가 있을지 모른다고.
“……그러게요.”
나는 힘없이 웃으며 꽤 늦은 대꾸를 했다.
“제게도 과연 마음 놓고 웃을 수 있는 날이 올까요.”
엔딩을 본 후 이 게임에서 탈출하기 직전까진 아마,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자조 섞인 말을 중얼거리며 고개를 막 든 그 순간이었다.
어디선가 서늘한 바람이 몰아쳤다.
뷘터의 손바닥 위에 놓여 있던 접힌 손수건이 바람결을 따라 두둥실 떠오르더니 ‘화악!’ 하고 펼쳐졌다.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뷘터의 손바닥 위, 허공에서 장난을 치듯 천 자락이 이리저리 접혔다.
휙휙, 구겨지고, 묶이고, 부풀기를 반복하던 그것은 마침내, 작은 토끼 모양으로 변했다.
“어…….”
나는 눈을 크게 뜬 채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얇은 손수건으로 이루어진 토끼가 천천히 뷘터의 손바닥 아래로 낙하했다.
작은 귀가 인사를 하듯 쫑긋거렸다.
눈으로 보고도 좀체 실감 나지 않은 장면이었다.
“두 손 좀 펴 주시겠습니까?”
문득 뷘터가 부탁조로 말했다.
나는 얼떨떨한 얼굴로 천천히 두 손을 들어 펼쳤다.
그러자 뷘터의 손바닥 위에 놓여 있던 토끼가 깡총 뛰어 내 손바닥 위에 사뿐히 착지했다.
진짜 살아 있는 생물체라도 되는 양 내 손바닥에 얼굴을 비비는 모습이 기이하게만 느껴졌다.
그러다 번뜩 뷘터가 황궁 안에서, 그것도 후작의 모습으로 마법을 썼 다는 자각이 들었다.
“……그런데 막 이러셔도 되는 거예요?”
나는 불안한 눈으로 휙휙 주변을 둘러보았다.
인적 드문 곳이었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보는 사람도 없는데, 뭐 어떻습니까.”
뷘터는 내 반응에 심상하게 답했다.
‘어차피 다 까발려진 거, 이제 그냥 막 나가기로 한 거니?’
내게 비밀을 밝힌 지 얼마나 됐다고. 너무 극단적인 태도 변화가 아닌가.
나는 미심쩍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 정도는 기본 중의 기본이라 마력도 거의 사용하지 않으니 들킬 일은 없을 겁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러자 뷘터가 어색한 미소와 함께 변명처럼 덧붙였다.
“그보다…… 동물, 싫어하십니까?”
그의 물음과 함께 토끼가 폴짝폴짝 내 손바닥 위에서 뛰어올랐다.
그러다 발라당 배를 까뒤집으며 애교를 피웠다.
천으로 만들어진 무생물에 불과했지만, 움직임은 영락없는 아기 토끼와 같았다.
그 모습에 작게 미소가 지어졌다.
“……좋아해요.”
“이제야 웃으시는군요.”
순순히 답하자, 뷘터가 말했다.
나는 그제야 그가 이것을 내게 보여 준 이유를 알게 되었다.
나를 위로하기 위해서였다.
불현듯 가슴이 울렁거렸다.
나는 내 손바닥 위에서 뒹구는 손수건 토끼에게서 시선을 옮겨 그와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그를 향해 처음으로 사심 없는 환한 웃음을 지어 주었다.
“고마워요, 후작님.”
찰나, 그의 동공에 한차례 파동이 일었다. 그리고,
[호감도 44%]
5%. 그의 호감도가 꽤 큰 폭으로 상승했다.
나는 차오른 은빛 머리칼 위, 게이지 바를 보며 얼굴 만면에 띠운 웃음을 천천히 지웠다.
[노멀 모드에서 마법사는 여주가 슬프거나 기분이 안 좋을 때마다 귀신같이 나타나 기상천외한 마법들을 선보인다.]
이런 와중에도 온전히 이 순간을 즐기는 게 아닌, 그를 다시 보험으로 삼을 생각이나 하는 내가.
조금 허탈하게 느껴졌다.
* * *
황태자 암살 시도라는 엄청난 일이 벌어졌지만, 사냥 대회는 계속해서 진행되었다.
정확한 내막을 아는 것은 재판에 참여한 소수의 고위 귀족들뿐.
게다가 타국인들까지 대거 참여한 상황이었다.
전야제 때 벌어진 피습 사건에도 강행했던 사냥 대회인데, 또 문제가 터져 완전히 중단된다면 잉카 제국의 위신이 말이 아닐 터.
때문에 주최자 없는 사냥 대회가 계속되었다.
우승자 선발까지는 앞으로 나흘.
“……하여 돌아오실 때까지 안전을 위하여 아무도 사냥터 밖으로 내보내지 말라는 명을 전합니다.”
재판 다음 날 이른 아침, 각 가문의 야영장을 돌아다니며 시종이 황제의 명령을 전했다.
귀환할 때까지 귀족들을 모두 황궁에 구류하라는 명령이었다.
‘……나는 왜죠?’
나는 억울한 표정으로 황가의 문장이 새겨진 스크롤을 가져온 시종을 바라보았다.
누명을 벗었으니 나는 바로 집으로 돌아가도 될 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곧바로 이어진 말에 안도했다.
“하지만 에카르트 공녀는 황태자를 보필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한 바.”
“…….”
“그를 마땅히 치하하고 숙녀임을 배려하여, 원한다면 사냥터가 아닌 황궁으로 거처를 옮겨도 된다는 지시 사항도 덧붙이셨습니다.”
“옮길게요.”
나는 시종의 말이 끝나자마자 번쩍 손을 들고 외쳤다.
“……페넬로페.”
공작이 음울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돌아보자 그는 어두운 낯을 굳힐 뿐 더 만류하지는 않았다.
재판 이후 쉽사리 내게 말을 붙이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썩 괜찮은 일이었다.
“그럼 마차를 준비해 두도록 하겠습니다.”
시종은 공작가의 일원을 향해 예의 바르게 인사한 후 돌아갔다.
“옮길 채비를 해야 해서요. 먼저 나가 볼게요.”
나 또한 기다렸다는 듯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숨 막히는 공작의 카바나 속에 더 남아 있고 싶은 생각은 없었기 때문이다.
“야. 너 진짜……!”
싸늘해진 분위기에 보다 못한 레널드가 한마디 하기 위해 입을 벌리던
“스읍, 레널드.”
공작이 막아섰다. 그는 깊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게 하도록 해라. 여기보단 황궁이 더 쉬기 편할 테지.”
“네. 나중에 다시 봬요.”
나는 짤막한 인사 후 미련 없이 카바나를 빠져나갔다.
끝끝내 뒤통수에 와 박히는 세 쌍의 푸른 시선들이 진득하게 느껴졌다.
공작의 카바나를 빠져나왔던 기세와는 달리, 막상 밖으로 나오자 걸음에 힘이 확 빠졌다.
“에휴…….”
분명 사냥 대회의 첫날이 밝았을 때만 해도 이렇게까지 사이가 나쁘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나는 한숨을 내쉬며 터덜터덜 내가 쓰는 카바나 쪽으로 걸었다.
어쩌면 내가 지금 괜한 화풀이를 하는 건지도 모른다.
그간 페넬로페가 생각 없이 저지른 패악과 사고에 시달릴 대로 시달린 공작가 일원들이 이해는 갔다.
게다가 이번엔 무려, 황족 시해 사건과 연루되었으니 얼마나 속이 탔을까.
공작과 데릭으로서는 ‘철부지의 짓궂은 장난’으로 사건을 축소하여 일단락하려던 것이 최선이었을지 모른다.
‘……그런데, 내가 왜 그 사람들 사정까지 이해해 줘야 돼?’
이해는 이해고, 내 기분이 더러운 건 별개의 문제였다.
자초지종을 먼저 물어보고 머리를 맞대 해결책을 강구했더라면.
아니, 한 번이라도 페넬로페가 그럴 리 없다고 나서 주었더라면, 이렇게까지 에피소드가 엉망진창으로 끝나지는 않았을 텐데.
“……야.”
그때였다. 불현듯 누군가 나를 불렀다.
그러나 깊은 생각에 잠겨 있던 나는 바로 알아듣지 못했다.
“야, 야! 페넬로페!”
버럭 이름을 외치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걸음을 멈췄다.
‘하…… 뒤돌아보기 싫다.’
저렇게 경우 없이 나를 부르는 놈은 이곳에서 한 명뿐이었다.
나는 멈춰 선 상태에서 고개만 흘긋 돌려 확인했다.
[호감도 37%]
역시나. 흩날리는 분홍 머리칼이 내게로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