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의 엔딩은 죽음뿐-95화 (95/243)

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95화

“너 그거 사실 아니지?”

순식간에 내 앞에 당도한 레널드는 대뜸 뜬구름 잡는 물음을 던졌다.

“뭐가?”

“황태자 그 새끼랑 네가……!”

“레, 레널드!”

나는 흥분해서 목소리가 높아지는 레널드를 보며 화들짝 놀라 외쳤다.

‘황궁에서 황태자 욕을 하다니!’

역시 보통 간 큰 놈이 아니었다.

다행히 이른 아침, 공작가의 야영장 근처를 서성이는 인간은 우리 둘뿐이었다.

정신을 차린 듯 바로 입을 다물었던 레널드가 가까스로 주어 없이 말하기를 시전했다.

“……그놈이랑 네가 그렇고 그런 사이였다는 게 사실이야?”

“그렇고 그런 사이가 뭔데?”

“나 지금 네 말장난 들어줄 기분 아니다.”

정말 몰라서 물어본 건데, 레널드가 정색하며 뇌까렸다.

“사냥터 어딜 가든 황태자랑 네 얘기뿐이라고! 알고 있어?”

“…….”

“대체 재판장에서 무슨 말을 지껄인 거냐? 사실대로 말해, 아니지? 어?!”

레널드는 당장 나를 뒤흔들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는 듯한 얼굴로 연신 채근했다.

나는 사실대로 답했다.

“응. 아니야.”

“후…….”

한시름 놓이는지, 놈은 깊은 한숨을 쉬며 머리를 박박 긁었다.

그리고 짜증스럽게 중얼거렸다.

“씨발, 왜 그런 헛소문이…….”

“숲에서 밀회를 나눴다는 소문이라면, 그건 사실이야.”

“……뭐?”

그러나 곧 덧붙여지는 내 말에 분홍 머리칼을 헤집던 손이 뚝 멈췄다.

그는 희번덕거리는 눈빛을 하고 물었다.

“너…… 너 그게 무슨 소리야?”

“말 그대로. 숲에서 단둘이 만났으니 암살자들에게 같이 쫓겼겠지.”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모호하게 답했다.

누군가 사실 여부를 물어볼 거라는 것은 예상했다.

엘렌 후작의 의심을 피하고자 지어낸 것이라고 사실대로 이야기해도 되지만, 공작가 인간들에게만은 구구절절 그러고 싶지 않았다.

“너…… 너 똑바로 말해.”

레널드는 이를 악물고 음산한 목소리로 나를 다그쳤다.

“너 지난번에 그 새끼한테 칼침 맞고 돌아와서 치를 떨었잖아. 그런데 시발, 밀회는 무슨 놈의 밀회.”

“칼침이라니.”

나는 놈의 저급한 단어에 눈살을 찌푸렸다.

“전하와는 나눌 얘기가 있어서 따로 만난 거야.”

“무슨 할 얘기?”

“그런 게 있어. 넌 몰라도 돼.”

사실 딱히 나눈 얘기도 없기에 알려 줄 말도 없었다.

“개소리 집어치우고 사실대로 말해라. 연모의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는 소린 또 뭔데!”

“벌써 그런 말까지 다 퍼졌어?”

명예를 중시하는 귀족이라더니, 입 싼 인간들 같으니라고.

나는 하루 저녁 만에 파다해진 소문에 혀를 내둘렀다.

그리고 깊은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그건 그냥, 만남을 뒷받침하려고 지어낸 말이야.”

구구절절하게 설명해 주지 않겠다고 마음먹은 게 무색하게, 나는 바로 진실을 토해 냈다.

아니라는 대답이 나올 때까지 나를 갈굴 기세라 별수 없기도 하거니와, 황태자와는 더 이상 ‘연모’의 ‘연’ 자와도 엮이기 싫었다.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놈은 득달같이 물었다.

“그럼 그 새끼랑은 왜 만난 건데? 또 칼침 맞고 싶어서 환장했어?!”

“레널드.”

나는 다시 주변을 둘러보며 그를 만류했다.

“말 좀 가려서 해.”

아침부터 이런 소모전을 하고 싶지 않았다. 때문에 다소 지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그리고 우연히 만난 거라고 말해 봤자 어차피 믿지도 않을 거잖아.”

“난 형이랑 달라.”

“……뭐?”

“네가 귀족들을 쏜 게 아니라고 했으면 곧이곧대로 믿었을 거다.”

나는 이어지는 레널드의 말을 한 번 더 되뇌었다.

형이랑 다르니, 믿었을 거라고.

나야말로 믿기지 않는 말이었다.

비틀린 웃음이 터져 나왔다.

“거짓말하지 마. 네가 나를, 믿었을 거라고?”

아니. 너도 데릭 놈 못지않게 나서서 나를 매도했겠지.

공작의 아들 두 놈이 쿵짝이 맞을 때는, 나를 사지로 몰 때뿐이었다.

“나, 나는 뭐 보는 눈도 없는 줄 아냐?”

내 서늘한 시선에 레널드는 화를 내던 것도 멈추고 당황했다.

그리고 무작정 주절거렸다.

“네가 아무리 멍청하다고 해도 금제령이 풀리자마자 미쳐 날뛰진 않았겠지.”

“…….”

“게다가 너, 또 일 생길까 봐 사냥 대회 오기 싫어했잖아.”

나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레널드를 돌아보았다.

정확히는 모든 남주들과 만나는 것을 꺼린 것이었다.

그조차도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다른 누구도 아닌 이놈이 정확히 내 상태를 파악하고 있었다는 것이 좀 놀라웠다.

“그러니까 나한텐 사실대로 털어놔 보라고. 너 진짜 그런 거 아니지? 어?”

내가 자신의 말에 집중하는 것을 알아차렸는지, 레널드는 한결 가라 앉은 음성으로 재차 물었다.

“혹시 아냐? 내가 소문 잠재우는 데 도움될지.”

“……그래. 밀회 같은 거 아니야.”

졌다.

흡사 설득까지 하려는 양상을 띠는 레널드의 모습에 나는 결국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우연히 지나가던 황태자 전하와 마주쳤다는 시시콜콜한 말로는 의심을 잠재우기 힘든 분위기였고, 그래서 그 변명밖에 없다고 생각했어. 그게 끝이야.”

“아오, 멍청아! 진작 그렇게 말했으면 좀 좋냐? 그게 뭐라고 그렇게 사람 애를 태워?”

내 말이 끝나자마자 레널드가 제 가슴을 팡팡 내리치며 답답함을 호소했다.

‘그러게.’

이런 것 하나 믿어 주지 않는 놈이 있어서, 섣불리 말을 꺼낼 수 없었다.

나는 씁쓸한 미소를 애써 삼켰다.

“……그래. 네가 그놈이랑 그럴 리가 없지.”

그사이 레널드는 퍽 안도한 표정으로 여러 차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나는 불퉁하게 물었다.

“고작 이거 확인하자고 부른 거야?”

“고작이라니. 이게 얼마나 심각한 사안인데, 이 계집애야!”

레널드가 오만상을 찌푸리며 버럭 외쳤다.

나는 기가 막혔다.

심각한 사안임은 맞지만, 그게 본인한테도 심각한 사안이란 말인가?

당장 근시일 내로 황태자가 정신을 차리기라도 하면, 그 수습 하느라 죽어나는 건 나뿐일 텐데 말이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부른 것만은 아니거든?”

불만에 가득 찬 내 시선을 감지한 듯 레널드 놈이 거칠게 품을 뒤졌다.

“자, 이거 가져가.”

놈이 불쑥 무언가를 꺼내 건넸다.

작고 넓적한 통. 일전에 본 적 있는 물건이었다.

“뭐 해, 안 받고.”

가만히 내려다보고만 있자, 놈이 마구 손을 흔들었다.

나는 얼떨결에 그가 건넨 약통을 받아 들었다.

“전야제 때보다 상처 더 커졌어, 둔탱아. 하여간 둔해 터져서 아픈 줄도 모르지?”

놈이 끌끌 혀를 차며 막말을 지껄였다.

어제 뷘터도 한눈에 발견하더니, 확실히 상처가 더 커지긴 했나 보다.

나는 머쓱해져서 목덜미 주변을 쓰다듬었다.

“심해?”

“건들지 마, 덧나니까.”

놈이 인상을 쓰며 제지하는 바람에 바로 손을 내렸다.

“쯧. 황궁 가서 지내는 동안 잊어먹지 말고 꼼꼼히 발라라. 귀찮다고 가만있지 말고, 시간 나면 치료소도 꼭 들리고. 알았냐?”

고작 사나흘 후면 다시 만날 텐데.

꼭 멀리 떨어지는 사람한테 하는 인사처럼 들려서 웃음이 나왔다.

“그렇게 할게. 신경 써 줘서 고마워, 레널드.”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리고 잠시 머뭇거리다가 덧붙였다.

“……믿어 준다는 것도. 그런 말해 준 사람은 오라버니뿐이네.”

그냥 있는 그대로 사실을 말한 것뿐인데, 갑자기 레널드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 그런 걸 왜 말로 하고 그러냐?”

놈이 별안간 버럭 화를 내더니 이내 인사도 없이 나를 휙 스쳐 지나쳤다.

‘참나. 그럼 말로 하지 몸으로 하리?’

[호감도 40%]

제 카바나가 있는 쪽으로 빠르게 사라지는 분홍 머리를 바라보며 나는 입술을 삐쭉였다.

* * *

황궁에서 지내는 동안 딱히 불편한 점은 없었다.

에밀리를 제외하고도 황궁 사용인들의 시중은 극진했고, 매끼마다 상다리가 부러져라 음식이 차려졌다.

가장 중요한 건 내가 뭘 하든, 어딜 가든 제약이 따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공작가보다 훨씬 있을 만한걸?’

삼 일째 황궁 서고를 들렀다 나오던 중에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서고 근처는 사람이 없어 무척이나 고요하고 적막했다.

게다가 거대한 서고에는 내가 좋아할 만한 종류의 책들이 가득했다.

덕분에 나는 고대 마법사와 발타 신화에 관한 책들을 잔뜩 섭렵할 수 있었다.

빌려온 아르키나 제도에 관련된 책을 꼭 끌어안은 채, 나는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이젠 제법 익숙해진 길을 따라 얼마쯤 걸었을까.

근위병들이 살벌하게도 에워싼 입구 하나를 가뿐히 통과하자, 의원과 함께 건물에서 빠져나오고 있는 남자가 보였다.

“공녀님! 오늘도 오셨습니까?”

황태자의 보좌관이 막 들어선 나를 보고 반갑게 아는 체했다.

고개를 까딱이며 인사를 받은 나는 곧장 본론을 물었다.

“오늘은 좀 어떠시지?”

“호흡이 많이 안정되셨습니다. 차도는 있는 것 같습니다.”

“다행이네.”

좋은 소식이었다. 사실 이틀 전 밤이 고비였다는 소식을 듣고 가슴이 철렁했었다.

“하지만 해독을 따로 하는 것이 아니니, 아무래도 며칠은 더 두고 봐야겠지요.”

“……그래?”

“들어가…… 보시겠습니까?”

무미건조하게 대꾸하는 나를 보며 황태자의 보좌관이 슬며시 물었다.

대체 소문이 어떻게 난 건진 모르겠으나, 황태자궁에 올 때마다 나를 보는 눈빛들이 묘했다.

“10분만 있다 나오지.”

나는 내색하지 않고 매번 하던 말을 했다.

“그러시지요.”

보좌관은 애매한 미소를 지으며 길을 터 주었다.

따로 밀회를 나눌 만큼 황태자와 각별한 사이라는 소문과는 달리, 오늘도 어김없이 10분이 지나면 칼같이 빠져나올 터였다.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