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96화
황태자가 기거하는 침실은, 내 방의 세 배에 이를 만큼 넓었다.
그리고 그의 성격을 반영하듯 무척이나 황량했다.
안을 채운 가구가 침대와 테이블 외에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텅 빈 방 안에는 쓴 약 냄새가 가득했다.
나는 고약한 향기에 눈살을 찌푸리며 멈칫하다가, 이내 커다란 방을 가로질러 걸어갔다.
침대 옆에 의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조금 전 나간 의원이 앉아 있던 것일 테다.
그러나 나는 빈 의자를 보고도 앉지 않았다. 어차피 곧바로 갈 것이기 때문이다.
침대의 바로 옆에 다가선 나는 무엄하게도 눈을 내리깔고 황태자를 내려다보았다.
하얀 배게 위에 찬란한 금발이 흐트러져 있었다.
[호감도 42%]
눈을 꼭 감은 채 누워 있는 칼리스토의 모습은 꼭 살아 있는 명화 같았다.
‘움직이지 않으니 진짜 게임 속 한 장면 같기도 하고.’
입을 열 땐 끔찍한 말만 골라 하던 남자가, 입을 다문 채 꿈쩍 않고 누워 있는 모습만 보고 있자니……
기분이 너무 이상했다.
‘그래도 차도가 있다는 게 사실인가 보네.’
어제까지만 해도 밀랍인지, 사람의 피분지 구별할 수 없을 만큼 허옇게 질려 있었다.
그러나 하루 새 낯빛이 훨씬 나아졌다. 숨소리 또한 확연히 고르게 변해 있었다.
황태자가 당한 독에는 해독제가 없었다.
오로지 그의 자연 치유력과 독에 대한 내성에 의존하며 신에게 비는 수밖에.
입고 있던 갑옷 덕분에 그렇게 깊게 찔린 것도 아니라 했는데…….
정적이 쓴 한 방울의 독이 이렇게나 무시무시했다.
“……저기요.”
나는 오늘도 작은 목소리로 황태자를 불렀다.
그리고 천천히 손을 뻗어 그의 코 밑에 가져다 대었다.
새액, 새액- 미약한 바람이 손가락을 간질였다.
“……괜찮은 거 맞죠?”
남주는 당연히 죽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종종 마음 한구석이 참을 수 없이 불안해졌다.
게임 이면에 깔린 잔인한 배경을 생각하면 어쩔 땐 오한까지 들었다.
매번 이곳으로 달려와 그의 숨소리를 확인하는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어쨌든 나로 인해 이렇게 됐다는 죄책감 때문에.
암살은 불가피한 일이었더라도, 그는 나를 구하다 칼에 맞았다.
게다가 제 몸 상태가 나쁘다는 것을 알면서도 기꺼이 내게 망토를 내어 주었다.
‘그날 밤 내가 감기에 걸리든 말든 망토를 주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독이 좀 더 늦게 퍼지지 않았을까.
좀 더 상태가 양호했지 않았을까…….
하는.
‘……아니야. 다 스토리대로 진행된 것뿐이지.’
나는 애써 고개를 저으며 번뇌를 털어냈다.
“죽진 마세요, 전하.”
나 때문이라면, 더더욱.
죽어도 내가 아닌, 노멀 모드의 여주를 구하다가 죽으란 말이야.
삼 일째 했던 말을 또 한 번 작게 속삭인 나는, 이윽고 그의 코 밑에 가져다 댄 손을 거뒀다.
벌써 10분이 다 되었다. 이제 갈 시간이었다.
몸을 돌려 침대에서 멀어지려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탁-.
불현듯 무언가 손목을 붙잡았다.
“어…….”
화들짝 놀라 고개를 막 돌리자, 거짓말처럼 새빨갛게 타오르는 눈과 시선이 마주쳤다.
“……기가 차서 더 들어 줄 수가 없군.”
헛웃음 터지는 소리가 작게 들렸다.
“삼 일 내내 와서 한다는 소리가, 고작 죽지는 말란 말뿐인가?”
“…….”
“쾌차를 바라며 기도를 하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정말 아픈 사람은 맞는 듯 쇳소리가 섞인, 잠긴 음성이었다.
나는 의식을 차린 칼리스토를 그저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는 창백한 안색으로도 비릿하게 조소하며 잘도 빈정댔다.
“게다가 감히 제국의 황태자에게, ‘저기요’? 방자하기가 이루 말할 수가 없군.”
며칠 내내 그가 눈을 꾹 감은 채 무력하게 누워 있는 모습만 보았기 때문일까.
정신을 차린 채 소리 내어 말하는 칼리스토의 모습이 눈으로 보고도 잘 믿기지 않았다.
“전하, 지금…… 정신 차리신 거예요?”
“그럼 죽어서 유령이 된 걸로 보이나?”
“분명 해독제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며칠은 더 두고 봐야 한다고 그랬는데…….”
그래서 공작저로 돌아갈 때까지 깨어나지 않을 줄 알았다.
“애석하게도, 의식은 내내 있었다. 해독하느라 눈 뜰 기력이 없어서 그렇지.”
그의 대답에 입이 슬며시 벌어졌다.
남주는 죽지 않는다지만, 정말로 무시무시한 회복력이 아닌가.
명료하게 뜨인 채 나를 응시하는 새빨간 동공과 마주하자니, 기분이 정말 이상해졌다.
안도감이 듦과 동시에 이유를 알 수 없이 가슴이 울렁거렸다.
“몸은…… 좀 괜찮으세요?”
“아니. 안 괜찮아.”
가까스로 입을 떼서 묻기 무섭게 황태자는 즉답했다.
“더럽게 아프군. 혈관이 타들어 가고, 뼈 마디마디를 칼로 저미는 것 같아.”
미간을 좁히며 덧붙이는 그의 말에 가슴이 철렁했다.
“의, 의원을 불러올게요!”
나는 서둘러 몸을 돌렸다. 하지만 황태자가 잡은 손목을 놓지 않아, 다시 원상태로 휙 돌아왔다.
방금 병석에서 일어난 환자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의 완력이었다.
“됐어.”
“하지만…….”
“어차피 아무 소용없을 거다. 기껏 해야 해독초나 좀 피우겠지.”
그는 단호하고 고개를 저었다.
“또 어디서 듣도 보도 못한 독을 구해 가지고 온 듯한데, 아쉽게 됐어. 조금만 더 많이 묻혔더라면 황천길에 올랐을 텐데 말이야.”
“…….”
본인의 목숨을 갖고도 아낌없이 조롱거리로 삼는 황태자를 보며, 나는 오만상을 찌푸렸다.
그는 내 표정을 보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거기 앉아 봐.”
그러더니 침대 옆에 있는 의자를 향해 고개를 까딱였다.
“일어나신 거 확인했으니, 그만 가 볼까 해요.”
환자에겐 휴식이 필요했기에 나는 서둘러 사라지려고 했다.
그러자 황태자가 눈썹을 꿈틀거리며 경악할 소리를 지껄였다.
“저 때문에 죽다 살아난 사람에게 그 정도도 못 해 주나? 쯧, 매정하기가 아주 악녀가 따로 없군.”
“방금 깨셨으니까, 휴식을 위해 자리를 비켜드리는 거……!”
“괜찮으니까 앉아.”
엄청난 매도에 버럭 답변하던 나는, 불쑥 말을 끊고 손목을 끌어당기는 손길에 의해 별수 없이 의자에 앉게 됐다.
‘별일은 없겠지.’
이제 황태자는 같이 있으면 당장 죽을까 걱정할 정도가 아니었다.
오히려…….
[호감도 42%]
금빛 머리칼 위의 게이지 바가, 상당히 차 있었다.
나는 뒤늦게 그의 호감도가 40%를 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지금 동굴에서 빠져나온 지 며칠이나 지났지?”
연신 그의 정수리 위를 흘깃거리고 있을 적, 황태자가 물었다.
“사흘 지났어요.”
“내일이면 사냥 대회도 끝나겠군.”
금방 상황 파악을 끝낸 황태자가 문득 나를 향해 한쪽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의외야, 공녀. 무정하게 내버려 둘 줄 알았는데. 덕분에 아직까지 목숨이 붙어 있긴 하군.”
나는 기가 막혔다. 쓰러지기 직전까지 나를 붙들고 협박하던 게 대체 누군데 말이다.
“안 그러면 깨어났을 때 후회하게 될 거라면서요?”
“그거야 공녀가 죽든 말든 저만 살겠다고 가 버릴 거라 생각했으니 그랬지.”
“전 평화주의잡니다. 누구처럼 기분 하나로 사람을 죽이고 살릴 생각을 하지는 않아요.”
“이제 아예 대놓고 황족 모독을 하는군. 언제 한번 지하 감옥을 구경시켜 줘야겠어.”
그렇게 병자처럼 누운 채 허여멀건한 얼굴로 말하니 별로 협박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게다가 내 대꾸에도 비식 웃음을 터뜨리는 남자는 기분이 썩 괜찮아 보였다.
나는 잠시 물끄러미 그를 응시하다 어렵사리 물었다.
“……왜 말씀 안 하셨어요?”
“뭘?”
“독에 당한 것이요.”
“말했으면 뭐가 달라지나?”
“…….”
황태자의 되물음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사실 그의 말이 맞았다. 알았더라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숙연해진 내 표정에 황태자가 짓궂은 얼굴로 물었다.
“뒤늦게 뺨 때린 게 좀 미안해졌나 보지?”
“때리다니요.”
나는 펄쩍 뛰며 강하게 부정했다.
“그건 불가피한 상황이었다니까요…….”
“독효가 바로 나타나지 않아 나도 긴가민가했다.”
웅얼거리듯 점점 작아지는 목소리로 변명하는 내게, 황태자가 답했다.
“그리고 미리 알았어도 얘기하지 않았을 거야.”
“……어째서요?”
“황제가 될 자는 무결해야 하니까.”
나는 좀 아연해졌다. 벌써 두 번째로 듣는 말이었다.
하드 모드 속 황태자는, 강박적으로 강한 황제가 되지 않으면 큰일 날 것처럼 굴었다.
이런 암살을 수도 없이 겪고 있는 이상 그래야 살아남을 테니 이해는 갔다.
하지만 노멀 모드에서는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일면을 발견할 때마다 생경하게 느껴지는 것은 별수 없었다.
“그렇게 뚱한 표정 짓고 앉아 있지만 말고, 말 좀 해 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그냥 가만히 있자, 황태자가 밉살맞게 채근했다.
잠시 피어올랐던 이름 모를 감정이 푸시시 꺼져 버렸다.
나는 시큰둥하게 되물었다.
“어떤 말이요?”
“그냥 이것저것. 내가 여기 처박혀 있는 동안 상황은 어떻게 돌아갔는지, 암살을 사주한 놈들은 다 색출 됐는지.”
나는 잠시 무어라 답할지 고민했다.
그가 쓰러지고 난 후 일어난 일들은 정말로 폭풍 같이 지나갔다.
갑자기 체포를 당해서 감옥에 갇혔다가, 믿어 주는 이 하나 없이 재판이 열렸다. 그리고 퀘스트 보상으로 얻어 온 [암살자의 증표]로 알아서 판을 뒤집고…….
그 모든 것들을 말로 설명하자니, 어쩐지 황태자에게 고자질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방금 일어난 환자를 너무 오랫동안 붙잡아 두면 안 되었으므로, 나는 적당히 핵심만 간추렸다.
“재판이 열리고 암살을 사주한 세력을 밝히긴 했는데, 황제 폐하께서 아직 돌아오시지 않아 조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는 않고 있어요.”
“뭐, 그렇겠지.”
칼리스토는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끝인가? 재판에선 공녀가 직접 증언했나?”
“네. 어쩌다 보니…….”
귀족 시해범이 되어 직접 진술을 했다고 무심결에 흘려 말하던 찰나.
나는 불현듯 떠오른 생각에 우뚝 말을 멈췄다.
‘그러고 보니…… 이놈은 아직 내가 재판장에서 막말을 지껄인 것을 모르잖아.’
연인 사이였다고 진술했던 것이 황태자에게 전해질 생각을 하니, 갑자기 등골이 오싹해졌다.
“어쩌다 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