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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엔딩은 죽음뿐-97화 (97/243)

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97화

갑자기 말을 멈춘 나를 보며, 황태자가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촉이 귀신같은 놈이란 말이야.’

재판장에 폭탄을 투하한 나는, 사냥 대회가 끝나고 공작저로 돌아간 후 두문불출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예상보다 놈이 빨리 깨어나는 바람에 아주 난감해졌다.

목덜미를 타고 식은땀이 흘렀다.

나는 가까스로 목소리를 떨지 않고 답했다.

“……어쩌다 보니 제가 증언하게 됐다고요.”

“고생했겠군.”

다행히 황태자는 내 이런 피 마르는 심정을 알아채지 못했다.

“생각해 보니 이번 사냥 대회 동안 공녀의 활약이 대단했어. 황태자를 구한 공로까지 있으니 마땅히 포상을 내려 줘야겠지.”

“그, 그렇게까지는…….”

“원하는 게 있나?”

“아니요. 딱히 없습니다.”

나는 허겁지겁 거절했다.

모든 것은 시스템이 시킨 것이었다.

게다가 나중에 무슨 소리를 들으려고 놈이 주는 것을 덥석 받겠는가.

그러나 칼 같은 내 거절에 황태자가 핀잔을 주는 어투로 말했다.

“가지고 싶은 게 하나쯤은 있을 것 아니야.”

“별로 없는데요.”

“그러고 보니 내 머리 색과 닮아서 황금에 환장한다고 했지.”

“네?”

‘……음? 뭔가 말이 좀 이상한데.’

스치듯이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놈이 뒤에 덧붙인 말에 금방 정신이 쏠렸다.

“황금 한 궤짝을 내려줄까?”

“황금 한 궤짝…… 이요?”

귀가 솔깃해지는 말이었다.

하지만 나는 지금, 제국의 하나뿐인 에카르트 공녀였다.

알바로 힘겹게 생활을 연명하는 가난하고 구질구질한 대학 신입생이 아니라.

게다가 어차피 돌아가면 쓰지도 못할 게임 머니, 많이 가지고 있어 봤자 뭐에 쓰겠는가.

“괘…… 괜찮습니다.”

나는 못내 미련이 남은 목소리로 거절했다.

“준다고 할 때 말해. 마음 바뀌기 전에.”

연이은 거절에 기분이 상했는지, 황태자가 서늘해진 음성으로 투덜댔다.

“그럼…… 전하께 한 가지 부탁드릴 게 있습니다.”

나는 고민하다가, 계속 우려해 온 것에 대해 슬쩍 꺼냈다.

칼리스토가 고개를 갸웃댔다.

“뭐지?”

“꼭 들어주신다고 약속하세요. 꼭이요.”

“얼마나 큰 걸 달라 하려고 그러는 건지 좀 무서운데.”

“그렇게 엄청난 부탁은 아니에요.”

“그럼 어디 한번 말해 봐.”

그가 누운 채로 오만하게 턱을 까딱였다.

“당장 황비의 목을 따다 달라는 것만 아니면 들어줄 테니까. 시일이 좀 걸리겠지만, 엘렌 후작까진 가능할지도.”

“후작님의 목은 됐고요.”

꼭 저 같은 생각에 나는 질색 하다가, 바로 본론을 꺼냈다.

“나중에 혹시 어떤 소식을 듣더라도, 저를 죽이겠다고 그러지 마세요.”

“뭐?”

“무슨 일이 있어도 저를 죽이지 말라고 말씀드리는 거예요. 포상을 주실 거면 이걸로 주세요.”

“하.”

남은 진지하게 부탁을 하는 건데, 돌아오는 건 헛웃음뿐이었다.

황태자가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물었다.

“공녀는 내가 무슨 피에 환장한 살인광으로 보이나?”

‘그럼 아니었니?’

입 밖으로 내어 말하고 싶었지만, 시뻘건 눈을 부라리는 놈의 모습에 그럴 수 없었다.

‘……답 들을 생각도 없으면서 묻기는 왜 묻냐.’

속으로 불만을 중얼거리는 사이, 놈이 눈썹을 꿈틀거리며 되물었다.

“보통 영애들이라면 황궁에 또 초대해 달라거나, 황가의 보석 같은 걸 달라 그러지 않나? 대체 왜 다른 영애들은 하지도 않을, 그런 쓸데없는 것들만 골라서 행하는 거지?”

“전적이 있으시잖아요.”

“…….”

새침하게 쏘아붙이자 황태자의 입이 다물어졌다.

그는 잠시 골똘히 생각하는 눈치를 보이다가, 문득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혹시…… 내가 잠든 사이에 재판장에서 무슨 짓거리라도 했나?”

“……!”

이번에는 내 입이 딱 다물렸다.

‘귀신같은 놈.’

헉, 하고 튀어나오는 숨을 간신히 삼켰다.

무언가를 감지한 듯한 놈의 짐승 같은 직감에 소름이 끼칠 지경이었다.

“아, 아니요? 무슨 짓거리를 해요?”

“그럼 왜 그런 것을 부탁이랍시고 지껄이는 거지?”

“그냥 다음에 연회에서 전하와 우연히 마주쳤을 때, 일어날지도 모를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고자 해서요. 저 그때 정말로 앓았다고요.”

나는 아랫입술을 쭉 내밀며 불퉁하게 중얼거렸다.

“먼저 포상을 주신다면서요?”

제가 준다고 해서 얼른 얘기한 건데, 왜 이렇게 사족을 붙이냔 말이다.

“쯧.”

황태자는 못마땅한 듯한 표정으로 혀를 찼다.

그리고 꽤 오랜 시간 고심하다 답했다.

“……알았다.”

“정말이죠?”

나는 반색했다.

“전하의 이름을 걸고 약속하시는 거예요! 알았죠?”

“알았다고.”

확답을 받아 내자, 입꼬리가 절로 들썩였다.

‘아싸! 이걸로 그래도 몇 번은 고비를 넘길 수 있겠어!’

이곳에 와서 들은 소식 중 가장 좋은 소식이었다.

이번 사냥 대회를 겪으면서 느꼈다.

내가 아무리 엑스 친 놈들을 피하려고 노력하더라도, 메인 에피소드 진행 시 완전히 피할 수 없다는 것을.

희희낙락하는 나와는 달리 황태자는 영 불쾌한지, 낯을 구겼다.

“그게 그렇게 좋은가?”

“그럼요! 얼마나 좋게요.”

가장 위험했던 네놈에게서 죽이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았으니 어찌 기쁘지 않을쏘냐.

나도 모르게 얼굴에 활짝 웃음꽃이 피었다.

‘피에 환장한 살인광’ 취급을 받아서 기분이 나빠 보였던 칼리스토도 결국은 따라서 헛웃음을 터뜨렸다.

좋아서 해죽 웃는 내 모습이 어이가 없는 듯했다.

“그대는…… 정말로 이상하군.”

그가 낯선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정말로 이상해.”

[호감도 45%]

네가 더 이상하단 말은 애써 삼켰다.

어쨌든 호감도가 상승했기에.

놀랍게도, 이로써 칼리스토는 이클리스에 이어 두 번째로 호감도가 높은 남주가 됐다.

그리고 나는, 이 게임이 정말 미쳐 돌아가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사냥 대회의 마지막 날이 밝았다.

우승자 선발과 폐회식을 위해 참가한 귀족들이 공터에 모두 모였다.

공작과 두 아들, 뷘터도 포함이었다.

대회를 주관하는 천막에는 각 가문에서 잡아 온 사냥감이 구역마다 가득 쌓여 있었다.

나는 그 자리에 조금 느지막이 도착했다.

원래는 아예 안 올 생각이었다.

그러나 황태자가 부득불 참여하라고 시종을 보내서 별수 없었다.

정오의 햇살이 뜨거웠다.

나름 방패막으로 쓰기 위해 양산을 들고 왔으나, 아니나 다를까.

“저기 봐요! 에카르트 공녀님이에요!”

“들었어요? 공녀님이 석궁으로 귀족들을…….”

“황태자님과의 밀회는 정말 사실일까요?”

내가 나타나자마자 흘깃거림과 수군거림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그래. 마음껏 떠들어라, 떠들어.’

나는 신경 쓰지 않고 공터 가장자리에 쳐진 차양막 끄트머리에 섰다.

내 머릿속엔 소식을 들은 황태자가 득달같이 달려와 캐묻기 전에 튀어야겠다는 생각만 가득했다.

한번 보고 말 엑스트라들의 웅성거림 따윈 알 바 아니었다.

“황태자님 드십니다!”

얼마 안 가 커다란 알림과 함께 황태자가 단상 위로 걸어 올라왔다.

나는 놈이 바로 알아보지 못하도록 슬쩍 양산으로 얼굴을 가렸다.

“사냥감은 많이들 잡으셨나?”

모든 이들의 위에 우뚝 선 황태자가 눈을 내리깔고 오만한 표정으로 폐회사의 첫 포문을 열었다.

양산 너머로 그런 그를 훔쳐보던 나는, 좀 놀랐다.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병색이 완연했는데…….’

단상 위에 있는 황태자에게선 그런 기색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번 사냥 대회도 별 탈 없이 마무리 짓게 되었군.”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하게 읊조리는 말에 나는 아연해졌다.

- 황제가 될 자는 무결해야 하니까.

칼리스토는 충실히도 제 말을 실행하고 있었다. 정말로 ‘철혈의 황태자’ 다운 면모였다.

“다들 고생 많았소. 이번 대회에선 누가 가장 열정적으로 구애를 할지 궁금하군그래.”

그의 말에 귀족들이 저마다 웃음을 터뜨렸다.

“자, 사냥감 집계 발표부터 시작하지.”

황태자가 단상 아래로 고개를 까딱였다.

사냥감 집계를 마친 시종 한 명이 나흘간의 결과를 적어 둔 커다란 전지를 끌고 왔다.

이윽고 참여자의 이름과 최종 사냥감의 개수가 큰소리로 발표되기 시작했다.

“제 사냥감은 줄리 영애에게 바칩니다!”

“제 사냥감은 나탈리 영애에게……!”

중간중간 패기 넘치는 젊은 귀족들이 자신의 사냥감을 연인에게 바친다는 외침이 들려왔다.

시종들이 새로이 점수를 집계하느라 분주해졌다.

‘오, 생각보다 재밌는데.’

제 이름을 듣고 볼을 붉히는 영애들과 휘파람을 불며 환호하는 주변인들 덕분에 분위기가 금방 후끈해졌다.

왜 황태자가 우스갯소리를 했는지 알 법했다.

나는 처음 올 때와는 달리 흥미진진한 눈으로 우승자 선발식을 구경했다.

당연하게도, 뒤로 갈수록 점수는 더 높아졌다.

상금이 있어서 그런지 사냥감을 넘기지 않는 사람들도 속출했다. 그중에는 공작도 있었다.

남주들은 한참이 지나도 이름이 불리지 않았다.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이 당연히 그렇듯, 상위권은 남주들이 모두 독차지하려는 모양이었다.

꽤 오랜 시간이 흐르고, 마침내.

“에카르트가의 차남, 레널드 에카르트 공자님!”

나도 잘 아는 이름에 귀가 번쩍 뜨였다.

“너구리 두 마리, 꿩 세 마리, 삵 한 마리, 노루 세 마리, 토끼 여덟 마리! 5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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