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98화
“꺄아악!”
그때, 차양막 한쪽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세상에, 레널드 공자님이 5위라니!”
“어쩜, 너무 멋있으시다!”
“다른 사람한테 사냥감을 넘기실까?”
나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몇몇 영애들이 난리를 치고 있었다.
소란을 들은 건지 레널드가 퍽 우쭐한 얼굴로 손을 한번 흔들었다.
“꺄아아악! 공자님!”
곧장 터져 나오는 비명에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뭐야. 팬클럽이라도 돼?’
레널드 놈이 으스대는 꼴을 보기 싫었다. 나는 혹여라도 놈과 눈이 마주치지 않게 양산을 내려썼다.
레널드는 다른 이에게 사냥감을 넘길 생각이 없는지, 별다른 외침 없이 바로 다음 호명이 이어졌다.
“4위, 에카르트가의 데릭 에카르트 소공작님! 늑대 두 마리, 흰 여우 두 마리, 예타 공국의 희귀 동물 플라포피뉴 한 마리!”
“꺄아악!”
레널드와 비슷한 반응들이 한 번 더 반복됐다.
나는 좀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데릭 놈은 자존심이 무척 강한 편이었다. 때문에 황태자랑 1, 2위를 다툴 줄 알았는데…….
‘나 때문인가?’
어쨌든 거나하게 일을 낸 나 때문에 사냥이고 뭐고 정신없긴 했을 것이다.
‘하지만 내 알 바는 아니지.’
순위보단 놈이 잡았다는 생소한 이름의 사냥감에 더 흥미가 생겼다.
‘예타 공국의 희귀 동물……?’
나는 바짝 내렸던 양산을 쳐들고 사냥감을 쌓아 둔 곳을 살폈다.
그러나 죽은 사냥감들을 눕혀 놓은 상태라, 내 쪽에서는 잘 보이지 않았다.
익숙한 사냥감들 사이로, 언뜻 자줏빛을 띠는 생경한 색이 비친 것 빼고는.
“다음 3위입니다! 베르단디 후작가의 뷘터 베르단디 후작님!”
좀 더 관찰하고 싶었지만, 바로 호명되는 이름에 관심이 옮겨졌다.
“사슴 세 마리, 멧돼지 성체 두 마리, 참매 두 마리, 카프리아산 메머드 한 마리!”
대형 동물이 많은 탓인지 에카르트 구역 옆, 베르단디 구역은 꽉 차 보였다.
‘오. 제법인걸?’
마법만 할 줄 아는 샌님인 줄 알았는데 사냥도 잘하는 거친 사나이였다.
새삼스러운 눈으로 뷘터를 다시 볼 때였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불현듯 그가 번쩍 손을 들더니,
“제 사냥감은 이번 대회에서 가장 큰 활약을 보였던, 페넬로페 에카르트 영애에게 바칩니다.”
갑자기 폭탄을 떨궜다.
‘뭐……라고?’
나는 입을 떡 벌렸다.
“세상에나.”
“베, 베르단디 후작님이 고, 공녀님에게…….”
주변에 나를 알아본 인간들이 알 수 없는 탄성을 내며 흘끔거렸다.
덕분에 내 위치는 금방 탄로 났다.
“마침 저기 계시군요.”
귀신같이 나를 발견한 뷘터가 나를 손가락질했다.
눈이 마주치자, 놈이 눈을 휘며 웃었다.
웅성거림이 더욱 커졌다. 나는 이런 주목을 전혀 원치 않았다.
‘왜 그래! 그냥 너 가지라고!’
빌어먹을 호감도 때문에 메인 퀘스트를 거의 반강제로 수락하고 울며불며 진행했지만, 퀸이 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우왕좌왕하는 사이, 바로 다음 호명으로 넘어갔다. 뷘터의 사냥감이 몽땅 내 차지가 된 채로.
“2위입니다! 칼리스토 레굴루스 황태자 전하! 백호랑이 한 마리!”
뜬금없이 폭탄선언을 한 뷘터 때문에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나는 들리는 이름과 사냥감에 기겁했다.
칼리스토는 대회 첫날부터 암살자에 쫓긴 후 쭉 정신을 잃었으므로 사냥할 틈이 없었다.
그러니 분명 저 호랑이는 나와 마주치기 전, 반나절 새 잡았다는 건데…….
‘무서운 놈.’
오싹 소름이 돋아 몸서리를 치고 있을 때였다.
“이번 대회의 주인공은 공녀가 아니던가?”
황태자가 불쑥 입을 열었다.
“나 또한 에카르트 공녀에게 내 사냥감을 바치지.”
나를 찾아내는 레이더라도 달렸는지, 어느새 황태자의 새빨간 눈이 내게 똑똑히 못 박혀 있었다.
경악을 금치 못하는 나를 보며 놈이 실실 웃었다.
‘너네 미쳤니? 왜 그래!’
남주들은 물론이고, 공터의 모든 인간들의 시선이 내게로 꽂혔다.
수군거리는 소리가 더욱 거세졌다.
“그럼 이번 사냥제의 퀸은 공녀님……?”
“그런 소리 마. 아직 1위가 남았잖아!”
“그런데 황태자 전하께서 1위가 아니라면 대체 누가 1위인 거지?”
공터는 혼돈의 도가니가 되었다.
작년에는 금제령까지 내려진 공작가의 미친개가, 이번에는 사냥제의 퀸이 되게 생겼으니 그럴 만도 했다.
“……대망의 1위입니다!”
사람들의 궁금증을 풀어 줄, 그리고 공녀의 우승행을 막아 줄 대망의 1위가 곧바로 호명됐다.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에카르트가의 페넬로페 에카르트 공녀님! 불곰 한 마리!”
암살에 휘말리기 전의 내가 불곰과 맞닥뜨렸었다는 사실을.
“…….”
내 이름이 호명되자, 찬물이라도 끼얹은 것처럼 정적이 내려앉았다.
‘미친…….’
대체 저 망할 곰이 어떻게 내가 잡은 것으로 처리된 건지 알 수 없었다.
뭐, 안 봐도 황태자의 짓이 틀림없겠지.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우려했던 일이 현실이 되었다는 것이다.
‘정말로 홀로 곰을 때려잡은 공작가의 미친 침팬지가 됐잖아!’
흰 눈으로 나를 응시하는 모든 이의 시선에서 직감했다.
이제 한동안 귀족들이 모였다 하면 내 얘기로 떠들썩할 것이 확정되었다는 사실을.
“베르단디 후작님의 사냥감과 황태자 전하의 사냥감까지 총합하여, 이번 사냥 대회의 우승자는 바로……!”
그리고 호명을 하던 시종이 아예 쐐기를 박았다.
“페넬로페 에카르트 공. 녀. 님!”
“…….”
“상금과 우승 트로피 전달을 위해 단상 위로 올라오시길 바랍니다!”
나는 이대로 먼지가 되어서 사라지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았다.
‘하…….’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먼 단상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적막에 가득 찬 공터를 가로지르는 내내 묘한 시선들이 따라붙었다.
마침내 단상 아래 도달한 나는 화사한 연분홍색 양산을 접고 드레스 자락을 붙들었다.
‘그냥 사냥복을 입고 올 걸 그랬나.’
레이스 끝자락마다 연분홍빛을 띠는 하늘하늘한 드레스는 사냥 대회의 우승자 타이틀과 퍽 어울리지 않았다.
남주 두 명이 제 사냥감을 몰아주지 않았어도, 불곰으로 1등을 차지했기에…….
“우승을 축하한다, 공녀.”
뚱한 표정으로 단상 위에 올라온 나를 황태자가 반겼다.
시종이 쿠션에 받치고 온 트로피가 바로 전달됐다.
시상식은 별거 없었다.
“이번 우승 상금은 1억 골드다. 시종을 통해 에카르트 저택으로 보내도록 하지.”
황태자가 그 소리를 하기 전까지.
‘1억!’
귀가 번쩍 뜨였다. 1억이면 내가 백지 수표로 이클리스를 사들인 돈이 아닌가!
아무리 게임 머니가 필요 없더라도 공짜로 주는 돈을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눈빛이 달라진 나를 보며 황태자가 재밌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때 또 다른 시종이 쿠션 위에 무언가를 얹은 채 걸어왔다.
“자, 받아.”
황태자가 그 위에 올려진 무언가를 불쑥 들었다.
“저, 저건……!”
무엇인지 알아본 좌중 사이로 한차례 파문이 일었다.
황태자가 내게 건넨 것은, 범행 도구로 압수되었던 석궁이었다.
“내 특별히 곰을 잡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한 공녀의 석궁도 돌려줄 수 있도록 조치했다.”
칼리스토가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내게 석궁을 내밀었다.
그는 이를 통해 ‘귀족 시해범’이라는 내 누명이 벗겨졌음을 완전히 공표했다.
공녀가 그간 저질러 온 패악들을 떠올리며 긴가민가하던 귀족들이 충격에 빠질 만도 했다.
“……감사합니다, 전하.”
나는 떨떠름한 얼굴로 내 석궁을 돌려받았다.
“소감 한마디 하지 그래.”
황태자가 옆쪽으로 몸을 피하며은 연중에 압박했다.
안 하면 안 되냐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나는 마지못해 정 가운데에 선 채 좌중을 둘러보았다.
높은 곳에 서 있으니,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도 남주들의 모습이 속속들이 잘 보였다.
[호감도 44%]
묘한 얼굴로 나를 차분히 응시하는 뷘터.
[호감도 40%]
무엇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오만상을 찌푸리고 있는 레널드.
마지막으로.
[호감도 32%]
데릭의 파란 눈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눈이 마주치자 그의 푸른 눈에 알 수 없는 격정이 몰아쳤다.
‘네 믿음 따위, 앞으로도 필요 없어.’
놈을 보니 삐딱한 마음이 치솟았다.
나는 고개를 바짝 쳐들었다.
그리고 오만하고 도도한 태도로 눈을 내리깔았다.
지금까지 페넬로페를 경멸하고 얕잡아 본 수많은 인간들이, 다시는 나를 우습게 보지 못하도록.
“……우선 이런 기회를 주신 제국의 작은 태양, 황태자 전하께 모든 영광을 바칩니다. 그리고…….”
“…….”
“불곰 사냥, 별거 아니더라고요.”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싱긋 웃었다.
그 한마디에 공터에 숨 막히는 정적이 내려앉았다.
한 번 더 단상 아래를 쭈욱 훑어보았다.
먼 차양막 아래에 모여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파란 머리의 여자 하나가 벌건 얼굴로 씩씩거리며 나를 노려보는 게 보였다.
아비와는 달리, 딱히 드러난 혐의가 없어서 금방 풀려났다는 소식은 전해 들었었다.
폐회식에 참여할 만큼 철면피인지는 몰랐지만.
나는 그녀를 똑똑히 바라보며 읊조렸다.
“다음 사냥 대회 땐, 엘크의 목을 잘라 가지고 와야겠어요.”
‘히익!’
어디선가 날카롭게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가 들렸다.
엘크는 켈린 백작가의 상징이었다.
황궁의 서고를 오가며 미리 귀족 계보를 읽어 보길 잘했다.
“이상입니다.”
무대 인사를 하는 연극배우처럼, 과장스럽게 허리를 숙여 인사한 후 막 고개를 들었을 때였다.
불현듯 눈앞이 하얘졌다.
〈SYSTEM〉 [사냥제의 퀸] 칭호 획득!
〈SYSTEM〉 보상으로 [1억 골드]와 [명성이 +200]을 얻었습니다.
(명성 total : 4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