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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엔딩은 죽음뿐-99화 (99/243)

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99화

“아가씨! 지금 어딜 가나 아가씨께서 사냥제의 퀸이 되셨다는 얘기뿐인 거 아세요? 너무 좋아요!”

공작저로 돌아가는 마차 안에서 에밀리가 호들갑을 떨었다.

“그렇게 좋니?”

“그럼요! 켈린 백작가 애들 코를 아주 납작하게 만들어 주게 되었잖아요.”

쌓인 게 꽤 많았는지 에밀리가 두 주먹을 양껏 쥐고 외쳤다.

“기필코 박살을 내줄 거예요! 우리 공녀님은 누구처럼 불쌍하다고 사냥 감을 동냥받은 것도 아니고, 직접 곰을 사냥해서 당당히 1위를 차지한 거니까요!”

“혼자 가지 말고 저택에 있는 하녀들도 다 데리고 가.”

“물론이죠!”

에밀리가 전투적으로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사자보다 더 좋아하며 투지를 불태우는 모습에,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사실 나는 ‘사냥제의 퀸’이 된 보상이 생각보다 별거 없어서 실망한 상태였다.

원치는 않았지만, 어쨌든 그 개고생을 하면서 달성한 최종 보상이 달랑 돈이랑 명성뿐이라니.

‘호감도 10% 정도는 팍팍 줘야 할 거 아니야.’

하지만 기뻐하는 에밀리를 보니 기분이 조금쯤 나아졌다.

‘뭐, 그래도 나쁘지 않았어.’

한 명 빼고 모든 남주들의 호감도 ‘40%’를 넘겼다.

길게 소요된 시간만큼 성과가 제법 괜찮았다.

특히 황태자. 고작 2%에서 무려 45%가 되었다. 게다가 1% 차이로 뷘터마저 앞섰다.

이제는 누구를 보험으로 둬야 할지 고민이 들 지경이었다.

하지만 나는 곧장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아무리 그래도 황태자는 아니지.’

놈이 나를 찾기 전에 간신히 무사 탈출한 마당이었다.

내가 재판장에서 나오는 대로 지껄였던 막말들을 전해 듣는다면 그놈의 호감도가 하락할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마차가 서서히 멈추는 게 느껴졌다.

완전히 섰을 때쯤, 에밀리가 먼저 일어나 문을 열고 내려섰다.

“벌써 짐 마차가 도착했나 봐요!”

에밀리의 말마따나 간발의 차로 먼저 도착한 건지, 황궁에서 따로 보내 준 일꾼들이 공작저 앞마당에 수많은 사냥감을 내리고 있었다.

“이, 이게 무슨……!”

마중을 나온 듯한 집사와 고용인들이 하나같이 입을 떡 벌린 채 넋을 놓았다.

다행히 공작과 두 오라비는 먼저 도착하여 안으로 들어간 건지 보이지 않았다.

사냥터에서 곧바로 출발한 그들과는 달리 나는 황궁에서 느지막이 오찬까지 들고 난 후 출발했기에 좀 늦었다.

“아, 그거 다 내 거야.”

나는 에밀리의 부축을 받아 마차에서 내려서며 나지막이 말했다.

“아, 아가씨!”

집사가 당황한 얼굴로 내게 다가오려 들었다.

쿵-! 그러나 일꾼들이 그 앞에 커다란 황금 궤짝을 내려놓은 탓에 바로 오진 못했다.

충격으로 궤짝의 뚜껑이 덜컥 열렸다 닫혔다.

그 바람에 그 안에 가득 쌓여 있던 금화 몇 개가 ‘후두둑’ 떨어졌다.

“어머나! 우리 아가씨 금화가!”

에밀리가 나 대신 그쪽으로 달려가 허겁지겁 땅에 떨어진 금화를 주웠다.

“페넬로페 아가씨. 이, 이게…… 이 돈은 다 무엇입니까?”

집사가 뒤늦게 얼떨떨한 얼굴을 하고 다가와 물었다.

“저 동물들은 또 무엇이고요. 공작님과 도련님들의 사냥감은 조금 전에 다 도착했는데…….”

“내 사냥감들이야, 집사.”

“네? 그게 무슨…….”

“아직 소식 못 들었나?”

난 답지 않게 상황 파악이 느린 집사, 그리고 공작저의 모든 고용인들을 쭈욱 둘러보며 상냥히 일러 주었다.

“내가 이번 사냥제의 퀸이야.”

* * *

사냥감의 가죽들은 모두 무두질 해 두라 지시했다.

나는 그걸로 몰빵 남주의 겨울 옷 가지를 잔뜩 만들어서 줄 생각이었다.

‘기껏해야 목도리나 만들어 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스케일이 커졌지만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왜냐면 큰 건 무조건 좋은 거니까.

식용으로 쓸 수 있는 고기는 알아서 손질하여 주방으로 보내라 일렀다.

처음에는 우왕좌왕하던 집사도 곧 신이 나서 발 빠르게 움직였다.

특히 곰의 쓸개로 내 보약을 만들겠다는 것을 말리느라 진땀을 뺐다.

대충 지시를 마친 나는 내 방으로 올라와 침대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하…… 역시 집이 좋긴 좋아.’

뒹굴거리는 내 움직임을 따라 ‘쩔그럭’ 하는 소리가 따라붙었다.

이 맑고 고운 소리가 무엇이냐면, 그렇다.

아닌 척했지만, 나는 내심 1억 골드란 상금이 좋아 죽을 것 같았다.

부를 만끽하기 위해 에밀리에게 침대 가득 금화를 깔아 두라 지시해 둘 만큼.

‘히히! 나 이제 부자야! 이렇게 돈 깔고 자도 될 만큼!’

나는 히죽 웃으며 손에 닿는 금화들을 가득 집어 와르르 허공에 뿌렸다.

빛에 반사되어 반짝반짝 빛나는 황금색이 참으로 곱고 예뻤다.

곰팡이가 잔뜩 핀 반지하 방에서 얇은 담요 하나 덮고 잘 땐 꿈도 꿔 보지 못한 일이었다.

나는 신이 나서 한 번 더 금화를 가득 집어 침대 위에 뿌렸다.

짤그락-!

그때였다.

“참나. 그렇게 좋냐?”

맑고 고운 소리 사이로 불쑥 듣기 싫은 소리가 끼어들었다.

나는 슬쩍 눈만 돌려 소리가 들려 온 쪽을 확인했다.

팔짱을 낀 채 열린 문에 삐딱하게 기대선 레널드가 보였다.

짐 정리 때문에 계속 분주히 오가느라 에밀리가 제대로 문을 닫지 않은 듯했다.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뭐야, 왜 왔어?”

“별짓을 다 하고 있네. 왜, 아예 욕조에 부어 달라고 하지 그러냐.”

놈이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빈정거렸다.

‘오, 그럴까? 금화 샤워 괜찮겠는걸?’

나는 기분이 무척 좋았으므로 놈의 비아냥거림도 기껍게 흘려들었다.

“나 바쁘니까 용건 없으면 다음에 얘기해.”

대답 없이 금화 쪽으로 관심을 돌리자, 레널드가 저벅저벅 방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그리고 내 침대 끝자락에 걸터앉았다.

“하, 금화 가지고 노는 게 바쁜 일이냐?”

“어.”

“으휴, 이 화상아. 언제 철들래?”

나는 놈의 타박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이, 이놈한테 그런 소리를 듣다니!’

한동안 얼어붙어 있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휙 노려보자, 놈이 뻔뻔스럽게 턱을 쳐들었다.

“뭐.”

“왜 왔냐니까?”

나는 짜증스럽게 되물었다.

레널드 놈은 온 이유를 바로 답하지 않고 머뭇댔다.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응시할 무렵, 놈이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아버지가 다 같이 저녁 들잔다.”

“뭐?!”

나는 너무 놀라 상체를 벌떡 일으켜 앉았다.

“왜?”

“사냥 대회도 무사히 끝났고, 뭐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가 보지. 난들 알겠냐.”

레널드는 어깨를 으쓱이며 태평하게도 답했다.

나는 말문이 막혀 버벅거렸다.

사냥터에 마련되었던 야영장은 아무리 호화스럽게 꾸몄더라도 대저택만 못했다.

시간을 아끼기 위해 아침은 공작의 카바나에서 다 같이 드는 것은 물론, 필수 불가결하게 공작가 일원들과 자주 마주쳐야 했다.

그나마 암살 사건에 휘말리기 전에는 버틸 만하다고 생각했지만, 재판 이후 급속도로 불편해졌다.

그래서 황궁으로 피신했다.

이제 공작저로 돌아왔으니, 예전처럼 두문불출할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는데…….

‘대체 왜 또 괴롭히는 거야. 나 좀 가만히 내버려 두라고!’

나는 돌아오자마자 겪어야 하는 가혹한 일에 진저리를 치며 말했다.

“나 속 안 좋아. 아침 먹은 게 얹혔어.”

“해 다 저물었는데, 이제 와서 체했다고?”

코웃음을 치며 대꾸하는 레널드의 말에 나는 혀를 깨물었다.

‘점심이라고 했어야 했는데.’

너무 당황해서 말이 헛나왔다.

“그냥 4일 전부터 얹혀 있었다고 그러지 그러냐.”

“그럼 그렇게 전해 줘.”

“야. 농담 작작…….”

레널드는 내 말에 눈살을 와락 찌푸리며 휙 나를 돌아보았다.

한마디 하려는 듯 열린 입이, 무표정한 내 얼굴을 보고 다시 스르륵 닫혔다.

농담이 전혀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린 것 같았다.

그는 제 분홍색 머리칼을 한 손으로 마구 흐트러뜨리며 외쳤다.

“……아, 몰라! 난 전했으니까 오든 말든 너 알아서 해.”

“…….”

그럴 생각이라서 나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잠시 방 안에 서늘한 정적이 흘렀다.

“……야. 너 혹시 오해할까 봐 얘기하는 건데.”

어색한 정적을 참지 못하고 먼저 깨트린 것은 레널드였다.

“우린 주고 싶어도 너한테 사냥감 못 넘겨준 거야. 알지?”

“……뭐?”

“순위 조작을 방지하기 위해 가족끼리는 못 넘기는 게 규칙이라고.”

갑작스러운 놈의 말에 어안이 벙벙했다.

뜬금없이 다 끝난 사냥 대회 규칙은 왜 설명하는 거란 말인가.

‘게다가 넘겨주고 싶어도 못 넘겨 준다는 말은 또 뭐…….’

의중을 생각하던 나는 문득 ‘아.’ 하고 터져 나오는 침음을 삼켰다.

레널드가 이런 말을 내게 하는 이유를 이제야 알겠다.

사냥감을 넘겨주지 않아서 내가 화가 났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나는 어이가 없어서 잠시 말을 잃었다가, 이내 툭 내뱉었다.

“알고 있어.”

사실 몰랐다.

레널드가 곧장 물었다.

“아는 애가 표정이 왜 그래?”

“내가 뭘?”

“너 삐져서 지랄하기 전 표정이잖아.”

“그런 거 아니니까 신경 꺼.”

“아씨, 딴 계집애한테 줄려고 그런 거 아니니까 오해 말라고!”

진짜 그런 거 아니었는데, 놈은 저 혼자 곡해하여 듣고 흥분했다.

“소동물 산 채로 잡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아냐? 누구 때문에 내가 맹수 잡는 거 다 포기하고 소동물 구역이나 가서 뺑이 친……!”

버럭 신경질을 내던 그가 갑자기 입을 딱 다물었다.

그러더니 벌게진 얼굴로 연신 헛기침을 하는 게 아닌가.

“큼, 큼! 삐지지 말고, 가지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 다 줄 테니까.”

놈의 감정 변화를 좀처럼 따라갈 수가 없었다.

‘괜찮다는데 왜 부득불 난리야.’

나는 등 밑에 느껴지는 금화만으로 충분히 풍족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당장 가지고 싶은 것이 뭔지 대답하지 않으면 놈이 떠날 기미를 보이지 않을 것 같았다.

‘얘가 뭐 잡았었더라…….’

나는 하는 수 없이 레널드가 잡은 사냥감들을 되새겨 보았다.

너구리, 꿩, 삶, 노루. 그리고…….

“……토끼.”

입이 먼저 움직임과 동시에 머릿속에서 한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흰 손수건으로 만들어진 토끼.

그러고 보니 뷘터와 일별 후 더 움직이지 않는 토끼를 에밀리에게 넘긴 후 까맣게 잊고 있었다.

“토끼?”

“응, 토끼. 뛰어다니는 거 보고 싶어.”

마침 레널드 놈이 토끼를 여덟 마리나 잡아 온 상태였다.

“알았다. 집사한테 숲에 풀어 두라고 말해 둘게.”

내 말에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마침내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 모습이 어쩐지 좀 신이 나 보였다.

“됐지? 이제 삐진 거 풀어라.”

“삐진 거 아니래도.”

“웬만하면 저녁 먹으러 내려오고.”

“…….”

그럴 생각은 전혀 없었기에 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공작의 석찬 권유는 고의가 아닌, 불가피한 상황으로 참여하지 못하게 되었다.

레널드가 나간 후 나는 금화를 잔뜩 껴안은 채 까무룩 잠이 들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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