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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엔딩은 죽음뿐-100화 (100/243)

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100화

* * *

며칠간 방에 처박혀서 뒹굴거리는 사이, 집사를 통해 맡겨 뒀던 사냥감들의 손질이 대강 끝났다.

무두질이 완료된 털가죽 일부는 남성복 전문 디자이너에게 맡겼다.

이클리스 놈에게 줄 선물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옷을 짓는 데는 꽤 오랜 시간이 걸린다고 하였다.

나는 하는 수 없이 상대적으로 제작이 빠른 것부터 증정하기로 했다.

고급 케이스를 집사로부터 전달받은 나는 곧장 외출 준비에 나섰다.

‘67%였지 아마.’

보지 못한 사이 훌쩍 올랐을 이클리스의 호감도를 확인하고 싶어서 마음이 급했다.

그러나 막상 준비를 모두 끝내고 방 밖을 나서려니, 날씨가 썩 좋지 못했다.

“이 날씨에 굳이 산책하러 나가셔야겠어요?”

에밀리가 창밖을 바라보며 걱정스러운 얼굴로 우산을 건넸다.

이른 아침임에도 먹구름 가득 낀 하늘이 저녁처럼 어두웠다.

휘이이잉-.

창틀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바람 소리가 을씨년스러웠다.

‘그냥 다음에 갈까…….’

에밀리를 따라 창밖을 응시하자니 슬며시 망설임이 솟았다.

그러나 사냥 대회에서 돌아오고 나서도, 선물이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핑계로 벌써 이클리스를 2주 가까이 보지 못했다.

그사이에 또 따돌림과 괴롭힘을 당해서 호감도가 떨어지기라도 했으면…….

‘안 돼! 비 오기 전에 후딱 전해 주고 오자!’

나는 서둘러 우산을 건네받고 황급히 방을 나섰다.

“금방 다녀올게.”

그러나 바삐 걸음을 옮기던 것이 무색하게도, 연무장으로 가는 숲길에 들어서자마자 ‘쏴아아-’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허겁지겁 우산을 펴든 나는 불안한 얼굴로 꾸물거리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 재수가 없을 징존데.”

하지만 이왕 나온 거, 다시 돌아가기도 뭐 했다.

나는 대신 걸음을 더 빨리했다.

집사에게 미리 훈련 중간 휴식 시간을 알아 놓은 상태였다.

곧 한 번뿐인 오전 휴식 시간이니 서두르는 편이 좋았다.

하지만 막상 도착한 연무장은 텅 비어 있었다.

“뭐야…… 다 어디 간 거지?”

나는 공활한 공터를 두리번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그러고 보니 일전에 비 오는 날 산책하다 우연히 이클리스를 만났을 때도 훈련이 일찍 끝난 상태였다.

‘비가 와서 휴식을 앞당긴 건가?’

나는 연무장 가장자리의 풀숲을 따라 천천히 거닐었다.

혹시나 남아 있을지 모를 기사들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반 바퀴쯤 걸었을까.

획, 휘익-!

불현듯 바람을 가르는 파공음이 들려왔다.

연무장의 한구석. 뿌연 안개 속에서 누군가 홀로 허수아비를 연달아 내리치고 있었다.

‘……이클리스?’

누군지 알아본 나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지난번에도 비 오는 날 혼자 남아 훈련을 하더니, 이번에도 다를 게 없었다.

획, 휘익-!

그가 들고 있는 목검을 거세게 내리칠 때마다 ‘퍽, 파슷-!’ 하고 거칠게 짚이 튀었다.

뭉툭한 짚 뭉치가 뜯겨져 바닥을 나뒹굴었다.

‘여전하네.’

나는 이제, 저 모습이 전혀 잘 휘두른 게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다음 단계의 훈련으로 넘어가려면 목검에 검기를 담아 허수아비를 깔끔하게 잘라 내야 했다.

힘으로 내려쳐 짚을 끊어 낼 게 아니라.

마지막으로 훈련을 훔쳐보았을 때로부터 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이클리스는 발전된 게 거의 없었다.

제아무리 귀재일지라도 가르침을 줄 스승이 없으면, 범인도 못 되는 수준에 그치는 것이다.

빠악-!

그때 커다란 파열음이 울려 퍼지더니, 이클리스가 휘두르던 목검이 두 동강 났다.

푸욱- 부러진 목검 조각이 멀리까지 거세게 날아가 땅에 처박혔다.

움직임을 멈춘 이클리스는 어깨를 들썩이며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벗은 상체에서 뿌연 김이 솟아났다.

그런 그와 두 동강 난 목검의 잔해들이 너무나도 위험해 보였다.

불안감이 차올랐다.

‘어휴, 훈련 끝날 때까지 얼씬도 말아야겠어.’

빨리 선물만 전달한 후 돌아가고 싶었지만, 생각이 바뀌었다.

섣불리 접근하지 않기로.

잠시 멈췄던 이클리스는 이윽고 옆에 있는 상자에서 목검을 하나 더 꺼내 들었다.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상자에 낯익은 문양이 흐릿하게 새겨져 있는 게 보였다.

일전에 내가 목검을 600개 넘게 사들였던 무기 상단의 상표였다.

‘그래도 잘 쓰고 있긴 한가 보네.’

퍽 익숙하게 목검을 꺼내는 모습에 차오른 불안이 좀 가셨다.

호감도를 확인하고 싶었지만, 거리 때문에 잘 보이지 않았다.

나는 별수 없이 그의 훈련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이클리스는 그 후로도 한참 동안 허수아비를 베는 데 매진했다.

나무 사이에 몸을 숨긴 채 그의 훈련을 훔쳐본 지 얼마나 지났을까.

뻐억-!

세 번째로 목검을 부러뜨린 그가, 결국 짜증이 난 듯 잡고 있던 손잡이를 집어 던졌다.

그리고 젖은 흙바닥에도 개의치 않고 바닥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쏴아아-.

헐벗은 그의 몸 위로 차가운 빗줄기가 고스란히 쏟아졌다.

‘저러다 감기 들 텐데…….’

나는 바로 나서기 전에 그의 주변부터 샅샅이 훑었다.

저번처럼 그가 휘두른 목검에 맞아 목이 부러질 뻔한 아찔한 경험을 또 하기는 싫었기 때문이다.

그의 주변에 위험 요소들이 없다는 것을 재차 확인한 후에야 살며시 걸음을 옮겼다.

쏟아지는 빗소리에 가벼운 내 발걸음 소리가 묻혔기 때문일까.

점점 가까워지는 거리에도 이클리스는 미동이 없었다.

찰박. 마침내 그의 머리맡에 다가선 나는, 들고 있던 우산을 살짝 앞으로 기울였다.

“안녕.”

나지막한 목소리에 남자가 감고 있던 눈을 떴다.

물기 젖은 긴 속눈썹이 깜빡거렸다. 그 사이로 드러난 회갈색 눈동자가 천천히 커지는 것이 선명히 보였다.

“……주인님?”

이클리스는 얼이 나간 얼굴로 눈꺼풀을 몇 번 더 깜빡였다.

갑자기 나타난 내 모습이 진짜인지 가늠하는 모양새였다.

그 모습에 희미하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오랜만이네.”

[호감도 69%]

그 순간, 그의 머리 위가 깜빡였다.

다행히 내가 저택에 없는 사이, 더 떨어지지는 않았다.

소폭 상승한 호감도에 나는 크게 안도했다. 그사이 이클리스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내려다보던 시선이 훌쩍 올라갔다. 덩달아 우산을 든 손도 더 높이 쳐들어야 했다.

“언제…… 돌아오셨어요?”

“음. 돌아온 지는 꽤 됐어.”

내 대답에 이클리스의 눈꼬리가 아래로 조금 쳐졌다.

억지로 기사단에 끼워 넣은 노예에게까지 소식을 전달해 주는 이가 아무도 없었나 보다.

그는 감정이 미미하게 서린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왜 저한테는 돌아왔다는 인사조차 하지 않으셨어요?”

“기다렸니?”

“호강시켜 주신다면서요.”

비웃을 땐 언제고. 태연하게 그 말을 되뇌는 놈의 발칙한 모습에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자.”

나는 쥐고 있던 고급 케이스를 그에게 내밀었다.

“선물이야. 이걸 만드느라 좀 늦었단다.”

이클리스의 눈이 강아지처럼 댕그래졌다.

그는 케이스를 바로 받지 않고 주저했다.

“어서 받지 않고 뭐해?”

“빗물 때문에…….”

입을 달싹이던 그는, 내 재촉에 받지 않는 이유를 털어놓았다.

“주인님께서 주신 것을 어떻게 감히…… 젖은 손으로 받기 싫어요.”

“괜찮아.”

제법 기특한 소리를 하지 않는가.

나는 사르르 눈을 접어 웃어 주었다.

“네가 내 선물을 착용한 모습을 보고 싶어서 빗줄기도 마다치 않고 달려왔는데, 안 받아 줄 거니?”

케이스를 흔들어 보이며 서운한 투로 살근살근 속삭였다.

회갈색 동공이 한차례 흔들렸다.

이클리스는 잠시 침묵하다가, 이내 느릿하게 케이스를 건네받았다.

달칵. 그의 젖은 손이 이윽고 상자를 열었다.

“이게…….”

내용물을 확인한 이클리스의 눈이 더없이 커다랗게 확장됐다.

“메머드의 상아와 백호랑이 이빨이야.”

나는 그의 반응에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선물에 대해 설명했다.

그에게 준 것은 상아 조각과 호랑이의 이빨을 엮어 만든 목걸이였다.

너무 흰색만 연달아 있으면 식상하니 중간중간 최고급 오닉스를 끼워 넣었다.

동글동글한 검은색 구슬이 삐쭉빼쭉한 이빨과 상아 조각과 썩 잘 어울렸다.

이것은 돈을 주고도 못 사는 진귀품이었다.

뒤늦게 집사를 통해 안 것이지만, 칼리스토와 뷘터가 나란히 2, 3위를 차지한 이유가 있었다.

그들이 잡은 메머드와 백호랑이는, 사냥 대회같이 엄청난 규모의 행사가 아니면 구경하기 힘든 희귀 동물들이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그로 만든 장식도 귀했다.

상아와 호랑이 이빨, 그 둘을 모두 엮어 만든 장식품은 더더욱.

이클리스도 그것을 아는지 케이스 안에 못 박힌 시선이 떨어질 줄 몰랐다.

‘몰빵 남주라면 이 정도는 해 줘야지.’

나는 의기양양하게 고개를 쳐들었다.

“마음에 드니?”

“……주인님.”

이클리스는 어렵사리 고개를 들었다.

“이건 제겐 너무…….”

“고대 카프리아에서는 가장 뛰어난 전사들만이 상아 목걸이를 걸 수 있었다더구나.”

예상되는 이클리스의 말을 끊고 툭 내뱉었다.

책에서 본 내용이었다. 그러나 이건 나보다 이클리스가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카프리아 대륙에는 그의 고국인 델만이 있었다. 지금은 대륙 전체가 잉카 제국의 속국이 되었지만.

“그 초커, 이제 벗을 때가 됐잖니.”

나는 여전히 그의 목을 죄고 있는 가죽과 노란 구슬을 흘깃 눈짓하며 오만하게 말했다.

“말했지. 내가 1등 해서 돌아오겠다고.”

“…….”

“이번 사냥 대회의 퀸이 바로 나란다.”

“…….”

“그러니 네 말대로, 내 하나뿐인 전사를 호강시켜 주는 일만 남았지.”

이클리스는 다시 고개를 내려 우두커니 목걸이를 바라보았다.

유일하게 그의 감정을 엿볼 수 있던 눈동자가 보이지 않자, 나는 초조해졌다.

지금 그의 반응이 긍정적인 건지 부정적인 건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너무 부담스러운 걸 줬나?’

결국, 마음에 들지 않느냐고 물어 보려던 찰나.

마침내 이클리스가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회갈색 동공 속에 처음 보는 격정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주인님.”

이클리스는 짐승같이 형형히 번뜩이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천천히 케이스 안에서 목걸이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그것을 아득 쥔 손을 제 입가에 가져다 대었다.

[호감도 77%]

그가 목걸이에 입을 맞췄고, 호감도가 폭등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눈앞에 새하얀 네모 창이 떠올랐다.

〈SYSTEM〉 공략 대상 중 한 명의 호감도를 [70% 이상] 달성했습니다.

〈SYSTEM〉 지금부터 호감도 수치가 제공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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