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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엔딩은 죽음뿐-101화 (101/243)

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101화

‘뭐야.’

뜬금없이 떠오른 시스템 창에 반사적으로 시선이 이클리스의 머리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나는 눈을 부릅떴다.

‘……사라졌어!’

방금 전까지 그의 정수리 위에서 선명히 빛나던 [호감도 77%] 글씨가 [호감도 확인하기]로 바뀌었다.

게다가 하얗게 채워져 있던 게이지 바가 검붉은 색으로 변해 있는 게 아닌가.

그러나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제대로 인지하기도 전에, 스르륵 새 글씨가 떴다.

〈SYSTEM〉 호감도 수치를 대신하여 게이지 바에 색깔이 표시됩니다.

〈SYSTEM〉 호감도를 확인하시려면 공략 대상들과 신체적 접촉을 하십시오.

“……이클리스.”

흔들리는 눈으로 시스템 창을 바라보던 나는, 가까스로 목소리를 내었다.

숨통이 막힌 것처럼 꽉 잠긴 음성이 흘러나왔다.

“이리 주렴. 내가 직접 걸어 줄 테니까.”

파르르 떨리는 입꼬리를 힘겹게 들어 올리며 명령했다.

이클리스는 제 입술에 가져다 대었던 손을 천천히 떼어냈다.

춥. 야살스러운 소리와 함께 목걸이가 떨어졌다.

나는 우산을 들지 않은 손으로 그것을 거의 낚아채듯 성급히 받았다.

이클리스는 퍽 순종적인 태도로 내 앞에 고개를 숙였다.

빗물에 흠뻑 젖은 갈색 정수리가 가까워지자, [호감도 확인하기]란 흰 글씨와 검붉은 색으로 변한 호감도 게이지 바가 더욱 선명히 보였다.

나는 뼛조각들로 이루어진 목걸이를 그의 목에 걸어 주며 은근슬쩍 머릿결을 손으로 쓸어내렸다.

그러자 다시 새하얀 네모 창이 떠올랐다.

〈SYSTEM〉 호감도를 확인하시려면 [200만 골드 / 명성 200]을 지불하십시오.

〈SYSTEM〉 [이클리스]의 호감도를 확인하겠습니까?

[200만 골드 / 명성 200]

“무슨……!”

내게 주어진 새로운 선택지에, 나도 모르게 비명 같은 소리가 터져 나왔다.

“주인님……?”

이클리스가 놀란 듯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나는 그를 돌아볼 겨를도 없었다.

‘미친, 이게 말이 돼? 게임 시스템인데 무슨……!’

거기까지 생각하던 난 돌연 숨을 멈췄다.

- 악! 왜! 왜 또 죽는데!

- 아씨…… 확 돈 주고 사 버려?

하드 모드를 플레이할 당시, 몇 번이나 결제를 할까 말까 고민하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그렇다. 이 미친 게임은 ‘전체 무료’ 게임이 전혀 아니었다.

현질 유도가 매우 수준급이었고, 스크루지 같이 살던 나 또한 여러 번 그 유혹에 넘어갈 뻔했다.

나는 찢어 죽일 듯 네모 창을 노려보다가, [200만 골드]를 눌렀다.

처음 뜬 과금 시스템이기에 게임 머니가 어떻게 충전되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SYSTEM〉 [200만 골드]를 차감하여 [이클리스]의 호감도를 확인합니다. (남은 보유 자금 : 98,000,000 골드)

새로운 글씨와 함께 이클리스의 머리 위 [호감도 확인하기]가 사라졌다.

[호감도 78%]

1% 오른 이클리스의 호감도를 확인했지만, 나는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차감된 돈이 사냥 대회 우승으로 받은 상금 1억이란 걸 알았기 때문이다.

‘안 돼! 내 돈-!’

나는 꽉 쥔 주먹을 부르르 떨며 소리 없는 아우성을 질렀다.

‘그게 어떻게 번 돈인데……!’

이토록이나 허무하게 200만 골드가 날아간단 말인가.

“주인님. 괜찮…… 으세요?”

한마디 없이 허공을 노려보는 내가 이상했는지, 이클리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마음에 안 드세요?”

그의 눈꼬리가 알 듯 모를 듯 처져 있었다.

그제야 벗은 상체 위로 화려한 뼛조각들을 목에 건 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어느새 78%를 알려 주던 머리 위의 호감도는 다시 가려진 상태였다.

“……아니, 잘 어울려. 마음에 드네.”

나는 지어지지 않는 미소를 억지로 쥐어짜 냈다.

사실 모르겠다. 내가 지금 제대로 된 표정을 짓고 있는지.

내 대답에 무기질적이던 회갈색 동공에 번뜩 빛이 돌았다.

“선물을 전해 주었으니 됐어. 난 이만 가 볼게.”

나는 속사포처럼 내뱉고는 휙 몸을 돌렸다.

그에 따라 이클리스 위로 쳐들고 있던 우산도 매정하리만치 휙 치워졌다.

몰빵 남주에게 그래선 안 됐지만, 정신이 하나도 없어서 신경 쓸 새가 없었다.

“이렇게…….”

빠르게 걸음을 옮기려던 나를 이클리스가 붙들었다.

“이렇게 그냥 가시는 겁니까? 이거 하나 주시고요?”

나는 멈칫하다 뒤돌았다.

쏴아아-. 쏟아지는 빗줄기에 다시 고스란히 노출된 남자는, 퍽 처량 맞은 모습으로 나를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었다.

“아.”

그 모습에 집 나갔던 정신이 천천히 돌아왔다.

뒤늦게 인사가 너무 성의 없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다시 그에게로 다가갔다.

짧은 새 그의 얼굴이 흠뻑 젖어 있었다.

물방울이 끊임없이 흘러내려 눈이 아플 만도 한데, 이클리스는 꿈쩍도 하지 않고 내가 하는 양을 바라보았다.

“고작 이걸로 끝일 리가.”

나는 손을 뻗어 그의 눈가를 스치듯 어루만지며 흥건한 물기를 닦아 주었다.

〈SYSTEM〉 [이클리스]의 호감도를 확인하겠습니까?

[200만 골드 / 명성 200]

이것도 접촉이라고, 바로 떠오르는 하얀 네모 창에 이가 절로 갈렸다.

그를 무시한 채 나는 간신히 자애로운 주인을 연기했다.

“호강시켜 준다고 했잖아. 네게 줄 선물은 아직 많이 남아 있어.”

“선물을 받고 싶어서 이러는 게…….”

“쉿. 그만큼 찾아올 날이 많다는 뜻이란다.”

칭얼거리는 그의 말을 얼른 자르며 빠르게 속삭였다.

“이대로 계속 있다간 너나 나나 감기 걸리겠어. 너도 이제 훈련 그만하고 숙소로 돌아가렴.”

“…….”

“그렇게 할 거지?”

“…….”

“응?”

대답을 종용하자 이클리스는 그제야 나를 뚫어져라 응시하던 눈을 내리깔았다.

그리고 순순히 답했다.

“……네.”

“착하구나.”

나는 눈 밑을 어루만지던 손가락으로 그의 뺨을 천천히 쓸어내리며 살갑게 웃었다.

마침내 턱에 이른 내 손이 그에게서 완전히 떨어져 나갈 때쯤, 나는 다시 몸을 돌렸다.

이클리스를 뒤로한 채 한 걸음 옮길 즈음.

어느새 내 얼굴에 미소 따위는 씻은 듯이 사라져 있었다.

빠르게 내 방으로 돌아온 나는 금화 상자부터 확인했다.

주기적으로 시트에 깔아 두려고 침대 근처에 둔 참이었다.

허겁지겁 자물쇠를 풀고 뚜껑을 열자 번쩍번쩍한 황금빛이 눈앞을 잠식했다.

금화들은 여전히 잘 있다.

그런데.

“내 돈!”

넘칠 만큼 상자 가득 쌓여 있던 금화의 수위가 미묘하게 줄어 있었다.

심심할 때마다 상자 안을 들여다봤던 나만은 바로 알 수 있었다.

고용인들 중 불곰을 때려잡은 미친개가 애지중지하는 상자를 건드릴 만큼 간 큰 인간은 없었다.

더군다나 보안 마법이 걸려 있는 특수 제작된 자물쇠의 열쇠는 나만이 가지고 있기에 공작이라도 열지 못했다.

그렇다면, 이것은 정말로 시스템에 자동 지불되었다는 소린데.

“하…… 제발 좀!”

퍼억-! 나는 진저리를 치며 쌓여 있는 금화 위로 주먹을 내리꽂았다.

이제 호감도를 보지 못하는 것도, 보려면 가지고 있는 돈이나 명성을 지불해야 한다는 사실도 끔찍하게 느껴졌다.

‘X발, 분명 노멀 모드에는 없었잖아! 그런데 왜!’

퍽, 퍽-! 나는 두어 번 더 주먹을 내리치며 절규했다.

‘게다가 200만 골드? 더럽게 비싸네, 이 미친 게임 같으니라고!’

내게 있는 자금이 1억이니 앞으로 호감도를 볼 수 있는 횟수가 50번 남았단 소리다.

아니, 조금 전 시험 삼아 쓰고 왔으니 49번.

그렇다고 명성을 마구잡이로 쓸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제 고작 400 모은 마당인데, 이걸 다 써 버리면 내 평판도 다시 바닥을 치게 될 것 아닌가.

‘……명성이 이따위로 쓰이다니.’

노멀 모드에서 명성은 여주가 ‘진짜 공녀’로서 자리 잡을 수 있게 조력하는 역할에 지나지 않았다.

남주들은 물론 공작저 고용인들이나 다른 귀족들의 호감을 사거나, 돌발 퀘스트에 나오는 간단한 미니 게임을 스킵하는 데 쓰였다.

퀘스트만 통과해도 알아서 쌓였기에 딱히 신경 쓴 적 없었다.

그렇기에 이곳에 들어와서도 미련 없이 포기했던 건데…….

“이럴 줄 알았으면 열심히 쌓아 볼걸.”

미리 알았더라면, 고용인들을 상대로 그렇게 막 나가지는 않았을 거 아닌가.

나는 피눈물을 삼키며 한 번 더 퍽, 주먹을 내리쳤다.

뭘 생각하든 하드 모드는 상상 그 이상이었다.

“하…… 아니야, 침착해. 그래도 곧 80%야.”

나는 깊은 한숨을 쉬며 냉정을 되찾기 위해 노력했다.

어차피 이건 하드 모드에 설정된 난이도 시스템으로, 나로서는 불가항력인 일이었다.

‘돌아가면 이 미친 난이도를 설정한 제작자 얼굴 좀 보러 가야겠어. 물론 총 들고서.’

그런 생각하며 나는 금화 상자의 뚜껑을 닫았다.

다시 자물쇠로 단단히 걸어 잠근 후 자리에서 비척비척 일어나 침대에 철퍽 드러누웠다.

예상치 못한 시스템 가동으로 인해 너무 놀라고 당황해서 진이 다 빠졌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너무 비관할 필요는 없었다.

이클리스와의 엔딩이 부쩍 가까워진 상태였다.

그에게만 온 집중과 사력을 다하면, 금방 100%를 찍을 수 있지 않겠는가?

[200만 골드]는 앞으로 그의 호감도를 확인할 때만 쓰면 된다.

어쩌면 49번이나 확인하지 않아도 난 이 망할 곳에서 탈출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훨 편해졌다.

“……그런데, 그 색깔은 대체 뭐지?”

시스템 내용을 되새기던 나는, 문득 의문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돈에 눈이 멀어 깜빡 잊고 있었다.

호감도 게이지 바 또한 응고된 피처럼 검붉은 색으로 변했다는 것을.

“어째 좀 불길한 색감인데…….”

왠지 모를 불안함에 중얼거림이 새어 나올 때였다.

똑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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