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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엔딩은 죽음뿐-102화 (102/243)

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102화

누군가 노크를 했다.

나는 침대 위에 늘어진 채로 고개만 문 쪽으로 돌렸다.

어차피 내 방을 방문할 사람들이야 뻔했다.

“아가씨, 펜넬입니다.”

예상대로 뻔한 사람들 중 한 명인 집사가 자신을 알렸다.

“들어와.”

나지막이 읊조린 소리를 용케 알아들었는지, 얼마 후 ‘끼이익’ 하고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냥 엎어진 채로 집사를 맞이했다.

“……아가씨. 오수를 즐기고 계셨습니까?”

막 들어서던 집사가 그런 내 모습을 보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죄송합니다. 에밀리에게 산책에서 막 돌아오셨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온 터인데…….”

불현듯 집사가 고개를 숙여 가며 사과하는 통에 뻘쭘해졌다.

나는 그를 흘긋 눈짓하며 답했다.

“아니, 막 들어온 거 맞아. 그냥 쉬고 있었어.”

“정 자세로 편히 누워 계시지 않고요.”

“금방 일어나려 했어. 무슨 일이야?”

“공작님께서…….”

집사는 조금 머뭇거리다가 용건을 털어놓았다.

“가족끼리 간단히 오찬을 들자는 전언을 하셨습니다.”

“……오찬?”

나는 바로 눈살을 찌푸렸다.

얼마 전 레널드를 통해 전한 정찬 초대에도 참여하지 않은 상태였다.

제법 무례한 짓이었으나 공작에게서 별다른 반응은 없었다.

그래서 그걸로 끝인 줄 알았거늘…….

“나까지 굳이 참여해야 하는 이유가 따로 있어? 오늘은 그냥 방에서 대충 먹고 좀 쉬고 싶은데.”

“긴히 하실 말씀이 있으니 꼭 참여해 주었으면 한다고 당부하셨습니다.”

‘에휴.’

나는 집사에게 들리지 않게 한숨을 내쉬었다.

‘가족끼리 간단히’라는 말 때문에 더 가기 싫었다.

공작과 레널드는 둘째 치고, 꼴 보기 싫은 첫째 놈 얼굴까지 봐야 한단 소리가 아닌가.

“그럼 뭐라도 지금 좀 갖다 줘. 간단한 빵이라든지, 수프라든지.”

“……예? 정찬을 앞두고 어찌하여…….”

“음식 앞두고 또 생으로 굶긴 싫으니까.”

“아, 아가씨.”

어깨를 으쓱이며 중얼거린 말에 집사가 사색이 되어 나를 불렀다.

“다시는,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내가 무슨 금기라도 내뱉은 것처럼 구는 집사의 모습이 좀 웃겼다.

나는 코웃음을 치며 되물었다.

“어떻게 그리 확신하지?”

“사냥 대회에 참여하시는 동안 식당의 고용인들을 물갈이했습니다.”

그건 좀 놀라운 소식이었다. 새삼스러운 눈으로 다시 돌아보자, 집사가 말을 이었다.

왠지 모르게 조금 비장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오늘 정찬 장소는 식당이 아닙니다, 아가씨.”

“그럼?”

“공작님께서 특별히 유리 온실에 식사를 마련하라 명하셨습니다.”

“유리…… 온실?”

“네. 가을꽃이 참 곱게도 만개하였습니다. 아가씨도 꼭 보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나는 이번에야말로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 저택에는 내가 갈 수 없는 금지 구역이 몇 곳 있었다.

공작이 죽은 공작 부인이나 잃어버린 막내딸에 대한 추억이 가득한 곳을 폐쇄한 탓이었다.

그런 곳 중 한 곳이 바로 후원 한편에 있는 커다란 유리 온실이었다.

그간 후원을 몇 번이나 오가면서도 멀찍이서 존재만 확인할 뿐 한 번도 가 본 적 없었다.

“갑자기 왜 온실에서 식사를 하게 된 거지?”

“저택 내 식당은 곧 보수 공사에 들어갈 예정입니다.”

“보수 공사?”

“네, 그래서 당분간은 이용하기 어려울 듯합니다.”

집사가 내 물음에 답하면서 알 수 없는 강렬한 눈빛으로 나를 응시했다.

갑자기 왜 보수 공사를 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뭐, 나한텐 잘된 일인가?’

기실 식당에서 밥을 먹자 했다면 별별 핑계를 대고 안 갔을지도 모른다.

솔직히 불쾌하지 않은가.

재수 없는 기억만 가득한 공간에서 꾸역꾸역 억지로 밥을 처먹어야 한다는 게.

게다가 또 굶길 줄 어찌 알고.

“……일단 알았어.”

하지만 나는 결국 긍정의 답을 내뱉었다.

만찬 장소가 바뀌어서가 아니라, 데릭과 레널드의 머리 위는 어떻게 변했는지 확인해 봐야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비를 맞았으니 좀 씻고 시간 맞춰 온실로 갈게.”

내 말에 집사의 얼굴이 단박에 밝아졌다.

“그럼 준비가 끝나면 다시 불러 주십시오.”

깍듯이 묵례한 후 집사는 방을 빠져나갔다.

* * *

집사의 뒤를 따라 처음으로 유리 온실에 발을 디뎠다.

거대한 유리 온실 안은 따뜻하고, 향긋했다.

천장과 기둥에는 푸르른 덩굴 식물이 녹음 졌고, 수많은 꽃들이 가득 만개해 있었다.

만찬 식탁은 제비꽃이 오밀조밀 피어 있는, 온실 한가운데에 마련되어 있었다.

로맨틱한 배경과는 어울리지 않게 퍽 삭막한 표정의 남자 세 명이 옹기종기 앉아 있는 게 보였다.

“왔느냐.”

상석에 앉아 있던 공작이 다가온 나를 보고 아는 체했다.

나는 꾸벅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좀 늦어서 죄송해요.”

“허, 좀? 드럽게 늦었…….”

레널드 놈이 곧장 시비를 걸다가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고개를 들던 나는 의아했다. 놈은 퍽 불만스러운 얼굴로 콧구멍을 벌렁거리고 있을 뿐 더 타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됐다. 어서 앉아라, 페넬로페.”

들리는 소란에 레널드를 바라보고 있던 공작이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분명 공작도 늦은 것에 대해 한마디 할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데릭 또한 서늘한 눈으로 흘깃 곁눈질할 뿐 별말 없었다.

나는 영문을 모른 채 이번에도 공작의 왼편에 착석했다.

그리고 앉자마자 원래 목적이었던 남주 놈들의 머리 위부터 확인했다.

[호감도 확인하기]

‘아오.’

아니나 다를까, 호감도 수치가 싹 다 가려져 있었다.

게다가 색색으로 화려하게 물든 게이지 바.

마치 경고 표지판처럼 선명한 주황색으로 변해 있는 데릭 놈의 머리 위를 보며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음. 역시 저놈은 아니라 이건가.’

대수롭지 않게 시선을 돌리던 나는, 문득 핑크빛 머리칼 위를 보며 와락 눈살을 찌푸렸다.

‘연분홍 뭐야.’

레널드의 머리 위 바가 놈의 머리칼과 비슷한 색감으로 변해 있었다.

‘대체 색깔이 뭘 뜻하는 거지?’

그 순간, 무심결에 푸른색 눈과 마주쳤다.

“뭘 봐?”

목깃에 냅킨을 꽂고 있던 놈이 눈썹을 꿈틀거리며 삐딱하게 물었다.

“너 본 거 아니야.”

“그럼?”

“네 뒤에 화목 봤어.”

“화목을 그렇게 죽일 듯이 쳐다보냐?”

레널드가 제 뒤를 흘끔거리며 황당하다는 듯 되물었다.

나도 모르게 너무 경멸의 눈초리로 노려보고 있었나 보다.

나는 어색하게 헛기침을 하며 뒤늦은 변명을 했다.

“꽃이 예뻐서…….”

“디 엘런윅 로즈다.”

그때 옆쪽에서 뜬금없는 답변이 돌아왔다.

아무 말이나 내뱉은 건데, 공작이 진중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마음에 들면 꺾어서 화병을 만들어 두라 이르랴?”

나는 그제야 보지도 않았던 레널드 뒤에 있는 화목을 제대로 눈에 담았다.

탐스러운 살굿빛의 장미가 화려하게 피어 있었다.

“향이 좋더구나. 방에 두면 괜찮겠지.”

“아뇨, 괜찮아요.”

나는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가지에 피어 있는 것을 볼 때가 가장 아름다운 법이잖아요.”

“그건 그렇지.”

다행이도 내 말에 공작이 수긍하며 넘어갔다.

이윽고 공작은 앞쪽에 놓여 있는 종을 흔들었다.

곧 음식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물갈이를 했다더니, 빈말은 아닌가 보네.’

트레이와 접시를 끌고 오는 하인들이 다 처음 보는 얼굴들이었다.

얼마 뒤 식탁 위에 음식이 담긴 접시들이 정갈하게 놓였다.

간단히 들자더니, 메뉴도 퍽 가벼웠다.

종류가 다양하긴 했지만, 가벼운 브런치 식의 스튜와 빵, 샐러드, 샌드위치 따위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다.

나로서는 식사 메뉴가 달가웠다. 빨리 끝날 수 있고, 여차하면 손으로도 주워 먹을 수 있으니까.

“들자꾸나.”

그러나 이번엔 다행히도 멀쩡한 식기가 주어졌다.

나는 내 앞에 세팅된 식기를 내려다보며 또 장난질을 치진 않았는지 샅샅이 훑었다.

홍차를 홀짝이던 공작이 멈칫하며 또 입을 열었다.

“왜 먹지 않고.”

“지금 먹으려고요.”

그의 종용에 나는 떨떠름한 얼굴로 스푼을 들었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나를 예의 주시하는 걸까.’

지난번 석찬 참여를 무시한 거 빼고 딱히 잘못한 일은 없었다.

이제 와서 내가 밥을 먹는지 아닌지, 챙기려 함은 분명 아닐 것이다.

그 정도로 세심한 사람이었으면, 그간 페넬로페가 생으로 굶는 것을 바로 알아차렸을 테니까.

‘아. 식탁이 작아서 그런가.’

나는 곧 공작이 내가 움직이지 않는 것을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던 이유를 찾아냈다.

온실 안에 마련된 식탁은 저택 내 식당에 있는 것보다 훨씬 작았다.

때문에 앉은 이들과의 거리가 부쩍 가까워졌다.

신경 안 쓰려 해도 각 자리마다 세팅된 커틀러리(Cutlery)가 보일 수밖에 없었다.

나는 속으로 대강 납득하며 들고 있던 스푼으로 천천히 스튜부터 맛보았다.

향긋한 꽃 내음 속에서 고요한 식사가 시작되었다.

얼마 후 배가 어느 정도 차자, 나는 들고 있던 식기를 바로 내려놓았다.

“더 안 먹는 게야?”

달칵, 하는 소리에 역시나 이번에도 공작이 제일 먼저 반응했다.

“네. 이 정도면 충분한 것 같아요.”

“후식을 들라 할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입맛이 없어서 더 먹고 싶은 생각이 안 들었다.

“이렇게 조금 먹어서야 되겠느냐? 그럼 샌드위치 좀 더 만들어서 방에 올려두라 하마.”

“아니요, 아버지. 괜찮아요.”

나는 자꾸만 뭘 더 먹이려 하는 공작을 서둘러 만류했다.

“그것보단 다 드셨으면 그만 올라가 볼까 합니다. 아침부터 산책을 했더니 좀 피곤해서요.”

그리고 에둘러 말했다. 빨리 부른 목적이나 말하라고.

“……그래.”

다행히 바로 알아들은 건지 공작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오늘 부른 이유는 얼마 후 화가를 불러들여 우리 가족의 초상화를 그릴 예정이라는 말을 전하기 위해서다.”

느닷없는 소식에 다들 휘둥그레졌다.

되묻는 레널드는 물론이고, 데릭도 처음 듣는 소식인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갑자기 웬 초상화요, 아버지?”

“이제 한 달 후면 페넬로페의 생일이지 않느냐.”

나는 처음 듣는 단어라도 들은 사람처럼 생소하게 공작을 돌아보았다.

‘생일……?’

일순 머리가 멍해졌다. 생일이 어떤 날인가.

페넬로페가 성년이 되는 날.

‘이렇게 빨리?’

도저히 믿지 못하는 와중, 공작이 잔인한 선고를 내렸다.

“성년식 연회를 열기 전에 가족 초상화를 그려 중앙 계단에 걸어둘까 한다.”

진짜 여주가 돌아오는 날이자 이 게임 하드 모드 기한의 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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