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103화
“……그렇게들 알고 다들 알아서 자중하도록 해라. 괜히 경거망동하다가 어디 다치지 말고.”
공작이 무어라 말을 이었지만, 그 소리가 모두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성인식이 한 달 남았다고?’
사고가 정지했다. 갑작스러운 공격이라도 받은 것 같았다.
사냥 대회라는 큰 에피소드가 한창 진행 중이어서 나는 하드 모드의 기한이 꽤 남아 있을 줄 알았다.
적어도, 감정적으로 교류가 오갈 시간은 있어야 할 거 아닌가.
이제야 간신히 이클리스의 의중을 파악하고 그것을 호감으로 바꿔 나가는 마당인데…….
‘고작 한 달.’
숨이 턱 막혔다.
한 달 안에 호감도 100%를 찍고 사랑 고백을 받지 못하면, 이곳에서 영원히 탈출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탈출도 탈출이지만, 더 큰 문제는 ‘진짜 공녀’가 돌아오면 나는 빼도 박도 못하고 악녀가 되어 죽을 운명이란 것이다.
왜냐하면, 이 망할 게임의 스토리가 그랬으니까.
무릎 위에 둔 손이 치맛자락을 아득 움켜쥐었다.
난 죽기 싫었다. 내가 어떤 심정으로 공부해서 그 집구석을 나온 건데.
“……로페.”
다시 돌아가기 위해 이 빌어먹을 곳에서 어떤 심정으로 아득바득 버텼는데.
내가 어떻게 죽는단 말인가, 어떻게.
“……로페. 페넬로페, 얘야.”
누군가 나를 부르는 소리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네, 네?”
나는 화들짝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식탁에 앉은 모든 이들이 나를 바라보고 있는 상태였다.
공작이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라도 있는 게냐?”
“네? 아, 아니요.”
나는 조금 멍한 얼굴로 답했다.
‘생일’이란 단어에 겁이 난 나머지, 순간적으로 너무 깊게 상념에 빠진 모양이었다.
나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어색한 변명을 중얼거렸다.
“잠깐 생각 좀 하느라…….”
“야. 너 오늘따라 좀 이상하다?”
레널드 놈이 불쑥 입을 열며 비아냥거렸다.
“아까부터 왜 그렇게 살벌하게 한 곳만 노려봐? 한동안 잠잠하더니, 또 몸이 근질근질하냐?”
“레널드 에카르트.”
놈의 시비 따위야 가뿐히 무시하면 그만이었지만, 어쩐 일인지 공작이 근엄한 목소리로 주의를 줬다.
“쯧, 오라비가 돼서 말버릇이 그게 뭐야.”
“쟤는 저 오라비 취급도 안 해 준다고요.”
“스읍.”
잘도 말대꾸를 하던 놈은 공작이 눈을 부라리자 마지못해 입을 다물었다.
불퉁한 표정과 머리 위에 있는 연분홍빛 게이지 바가 참으로 어울리지 않았다.
나로 시작되어 한순간에 싸늘해진 분위기에 다소 난감해졌다.
나는 애써 미소를 쥐어짜며 공작을 불렀다.
“죄송해요. 제가 잠시 딴생각을 하느라 못 들었어요, 아버지. 한 번 더 말씀해 주세요.”
“큼. 그래.”
공작이 경직되었던 표정을 누그러뜨리며 말했다.
“생일을 맞이해서 뭐 갖고 싶은 게 있느냐 물었다.”
“……갖고 싶은 거요?”
“그래, 뭐든 말해 보아라.”
당장 대륙을 뒤져서 내가 돌아갈 방법을 찾아내 달라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그러나 내게 꽂혀 있는 세 쌍의 푸른 눈들을 보며 힘겹게 그것을 삼켰다.
“딱히 없어요.”
무심한 어조로 툭 내뱉었다.
“뭐…… 뭐라?!”
그런데 무슨 일인지 공작이 잔뜩 충격받은 사람처럼 눈을 부릅떴다.
“네, 네가…….”
“야, 너 진짜 어디 아픈 거 아니냐?!”
말을 잇지 못하는 공작 대신 레널드가 ‘쾅!’식탁을 내리치며 외쳤다.
침묵한 채 밥만 먹던 데릭마저 생경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너, 분명 작년까지만 해도…….”
무어라 말을 하려던 그는 이내 서늘하게 얼굴을 굳히며 도로 입을 다물었다.
‘음?’
나는 예상치 못한 반응들에 그저 어리둥절했다.
한동안 나를 바라보며 입을 달싹이던 공작이 이윽고 그 이유에 대해 털어놓았다.
“작년까지만 해도 이것저것 사 달라고 했던 게 많지 않았느냐.”
“아.”
나는 짧게 침음했다. 사치스러웠던 진짜 페넬로페라면 그럴 만도 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나는 정말로 필요한 게 없었다.
게다가 그 생일날이 내 제삿날이 될 수도 있는데 뭔 놈의 선물 타령을 한단 말인가.
공작이 낯선 이를 바라보듯 날 보며 다시 권유했다.
“예전부터 돌아가신 황후마마의 재단사에게서 성녀식 예복을 맞추고 싶어 하지 않았느냐.”
“성년식 예복이요?”
“그래. 이 아비가 황제 폐하께 특별히 주청드려 놓은 상태다.”
공작은 미묘하게 가슴을 쭉 펴며 당당하게 말했다.
얼마 전 석궁을 건네던 때와 비슷한 모양새였다.
보석보다 필요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작년의 페넬로페가 얼마나 떼를 썼는지, 떨떠름한 내 태도에도 좀처럼 쉽게 놔줄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러니 그에 걸맞은 액세서리나 구두도 새로 사들이는 게 어떻겠느냐. 보석상을 부른 지도 꽤 되지 않았니.”
“음…….”
나는 잠시 고민하며 맞은편에 앉은 놈들을 흘긋 곁눈질했다.
주황색, 연분홍색.
예전에는 호감도 수치로 구분했는데 이제는 색깔로 멀리서도 한눈에 구별할 수 있게 되었다.
아무리 게임 머니라 하더라도, 역시 저놈들의 호감도를 확인하기 위해 내 돈을 쓰기는 아까웠다.
나는 굳이 먼저 물어본 공작의 호의를 거절하지 않기로 했다.
“그러면 이왕 생일 선물을 주실 거, 보석 말고 그냥 돈으로 주세요.”
“……뭐, 뭐라? 돈?”
공작이 입을 떡 벌어졌다.
“생각해 보니 저는 사재가 하나도 없더라고요. 저도 개인 예산을 책정해 주세요, 아버지.”
“그, 그건…….”
공작이 내 말에 얼떨떨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잇지 못했다.
그를 대신하여 레널드가 쏴붙였다.
“네가 개인 예산이 뭐가 필요하냐?”
“그건…….”
“드레스 사 달라면 디자이너 불러 줘, 보석 사 달라면 보석상 불러 줘. 집사가 다 해 주잖아? 참, 아버지! 저번에 쟤한테 백지 수표 줬다면서요?!”
나를 면박 주던 놈이 불현듯 화살을 공작에게로 돌렸다.
“왜 쟤만 주십니까? 제가 필요하니 달라 할 때는 재정이 어려워졌다고 그러셨잖습니까!”
“크흠, 크흠! 어떤 놈이 그걸…….”
집사를 통해 비밀스럽게 전달한 것이 어떻게 알려진 건지, 놈이 나를 삿대질하며 떼를 썼다.
‘으휴, 초딩.’
공작이 헛기침을 하다가 황급히 놈을 외면하고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갑자기 사재는 왜 달라는 게야? 한 번도 그런 소리 한 적 없지 않느냐.”
“관심사가 좀 변했어요. 액세서리 같은 것 말고 현금으로요.”
“상금은 어쩌고?”
“그건 아까워서 못 쓰겠어요. 처음으로 제가 번 돈이잖아요. 고이 보관해 두려고요.”
“흠, 그건 그렇지.”
공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천방지축 양딸이 처음으로 온전히 벌어들인 돈, 그것도 사냥 대회 1등 상금이었다.
나는 기세를 몰아 덧붙였다.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융통할 수 있는 자금을 생일 선물로 주시면 안 될까요?”
“혹시 모를 상황이라니? 하나뿐인 에카르트의 공녀가 혹시 모르게 대비할 일이 뭐 있겠느냐.”
“뭐, 나중에 출가할 때를 대비할 수도 있고, 혼인 자금이나…….”
“출가라니-!”
그 순간 세 명의 남자가 동시에 버럭 외쳤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들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공작이 못마땅한 목소리로 호통치듯 소리쳤다.
“또 그 소린 게야? 아직 성인식도 안 치른 귀족 영애가 출가는 무슨 출가!”
“곧 치를 예정이잖아요. 그러니…….”
“페넬로페 에카르트.”
“…….”
혀를 차는 공작의 모습에 나는 결국, 입을 다물었다.
“사재는 안 된다.”
그때, 입을 다물고 있던 데릭이 차가운 음성으로 단호하게 마지막 싹까지 잘라 냈다.
“네 씀씀이를 뭘 믿고. 그리고 매번 배정될 예산 이상으로 네 물품들을 사들이고 있는데 무슨 돈이 더 필요한 거지?”
“…….”
“네가 사업을 할 것도 아니고, 자금을 융통해야 하는 납득할 만한 이유를 말해라.”
소공작답게 데릭은 저택의 재정 상황에도 깊이 관여했다.
사실 저렇게 이유를 말하라면 할 말이 없었다.
그저 만약을 대비해 현금을 되도록 많이 보유하려 했을 뿐이다.
호감도를 확인할 때마다 보석을 돈으로 바꿀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마침 공작이 큰마음 먹고 뭘 준다니, 한번 질러 본 것뿐이었다.
“그래, 사재는 안 된다.”
“맞아, 안 되지!”
그러나 데릭 놈의 말에 이 집 남자들이 차례차례 동의를 표했다.
‘치. 이럴 거면 묻지나 말지.’
나는 입을 삐쭉거렸다.
솔직히 나만 개인 예산이 책정되지 않은 것에 불만이 없는 건 아니었다.
지금까지는 딱히 말을 안 해서 그렇지, 누가 봐도 진짜 공녀가 돌아오면 쫓겨날 임시 공녀 같지 않은가.
‘나한텐 땡전 한 푼도 줄 수 없다는 거야, 뭐야.’
한숨을 삼키며 아무 답도 하지 않자, 공작이 어린아이를 어르듯 설득했다.
“이번에 남쪽 광산에서 최상등품의 다이아몬드가 나왔다더구나. 그것을 가공하여서 티아라를 만들어 줄 터이니…….”
“그럼 됐어요.”
나는 다소 무례하리만치 공작의 말을 끊었다.
“그런 것을 탐낼 나이는 지났잖아요.”
그리고.
드르륵- 의자를 끌며 그만 자리에서 일어났다.
“페넬로페.”
공작의 목소리가 순식간에 차가워졌다.
이 집 인간들이 요즘 들어 내 건방을 많이 봐주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것이 사냥 대회 때 있었던 내 재판의 여파라는 것 또한.
하지만 호감도를 일정 궤도에 올려 놓은 이상, 더는 비굴하게 머리 숙여 비위를 맞추고 싶지 않았다.
“잘 먹었습니다. 저 먼저 일어날게요.”
“페넬로……!”
공작이 노한 목소리로 나를 부르는 게 들렸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 * *
방으로 돌아오자, 막 침구 정리를 끝내던 에밀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가씨, 벌써 오셨어요?”
“에밀리. 가서 집사 좀 불러와. 지금 당장.”
나는 다급하게 읊조리며 책상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네? 네, 네!”
뜬금없는 내 명령에 놀란 표정을 짓던 에밀리는 이내 잽싸게 방을 빠져나갔다.
톡, 톡, 톡. 나는 허공을 노려보며 손가락으로 정신 사납게 책상을 두드렸다.
집사를 불러오라 시킨 이유는 일전에 사냥감의 가죽으로 지으라 했던 옷들이 어느 정도 진척됐는지 묻기 위해서였다.
“……빨리 남은 선물들부터 안겨 줘야겠어.”
이클리스의 호감도를 당장 올릴 수 있을 만한 방법이 그것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바뀐 호감도 시스템 때문에 너무 정신이 없어서 초커를 벗겨 주는 것도 잊은 채, 목걸이만 덩그러니 걸어 주고 와 버렸다.
톡, 톡, 톡. 초조하게 책상을 두드린 지 얼마나 지났을까.
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집사는 올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왜 이렇게 안 오는 거야?”
눈살을 찌푸리며 신경질적으로 혼잣말을 중얼거릴 때였다.
똑똑- 마침내 노크 소리가 울려 퍼졌다.
한껏 예민해진 나는 퉁명스레 방문자를 확인했다.
“누구야.”
“애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