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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엔딩은 죽음뿐-104화 (104/243)

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104화

뚝. 책상을 두드리던 손가락이 멈췄다.

‘……응?’

나는 내가 집사의 목소리를 잘못들은 줄 알았다. 그래서 멍하니 문을 바라보고 있을 적.

“크흠. 페넬로페, 내 들어가마.”

끼이익-.

방문이 열리는 것과 동시에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 아버지?”

안으로 들어서는 것은 집사가 아니라, 공작이었다.

‘뭐, 뭐야. 갑자기 여긴 왜 온 거지?’

그가 내 방을 찾아온 적은, 아니, 게임에서도 페넬로페의 방을 찾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큼. 뭘 하고 있었느냐.”

공작이 퍽 어색한 얼굴로 뒷짐을 진 채 방 한가운데까지 걸어 들어왔다.

“그냥 있었는데…… 여긴 어쩐 일이세요, 아버지?”

“할 얘기가 있으니, 이리 와 앉아 보아라.”

공작이 통창 앞 테이블 쪽으로 걸어가 앉았다.

책상 앞에 선 채 뻘쭘하게 그를 바라보던 나는, 쭈뼛쭈뼛 그쪽으로 이동했다.

‘……뭐지. 식사 자리에서 버릇없었다는 이유로 혼내려고 온 건가?’

머릿속에 의문들이 가득 들어찼다.

하지만 말이 되지 않았다. 매번 집무실로 불러 젖히던 사람이 혼내러 방까지 쫓아오다니?

나는 얼떨떨한 심경으로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자.”

그러자 공작이 대뜸 들고 있던 것을 테이블 위에 턱 올려두었다.

에카르트의 문양이 정중앙에 찍혀 있는 두꺼운 종이봉투였다.

“이게…… 뭐예요?”

뭔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의아함이 한껏 담긴 눈으로 공작을 바라보자 그가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휙 피했다.

“열어서 꺼내 보거라.”

궁금했던 차였으므로, 나는 순순히 종이봉투를 열었다.

안에 들어 있는 흰 종이를 막 꺼내 든 찰나였다.

“동남부에 있는 에메랄드 광산 양도 확인서다.”

공작이 툭 내뱉었다.

꼭 ‘오다 주웠다.’ 하는 어투라서 나는 일순 의심했다.

“광산 양도…… 확인서요?”

“맨 아래 네 이름이 적혀 있으니 확인해 보거라.”

공작의 말에 시선이 저절로 스르륵 내려갔다.

피양도인 페넬로페 에카르트.

정말이었다. 스르륵 입이 벌어졌다.

“아, 아버지. 가, 갑자기 이게 무슨…….”

“별건 아니다.”

“이게요……?”

“사재를 가지고 싶다지 않았어.”

내 반응에 오히려 공작이 의아한 얼굴로 되물었다.

“왜. 마음에 들지 않는 게야?”

“아, 아니요. 마음에 들지 않은 게 아니라…….”

용돈 좀 달랬더니 에메랄드 광산이 돌아왔다.

이 어찌 황당하지 않겠는가.

“……저한텐 너무 과분해요, 아버지.”

아연해진 나는, 한동안 입술을 달싹이다 어렵사리 답했다.

급히 먹을수록 체하기 마련이었다. 게다가 이건 내가 원하는 목적과는 전혀 다른 방향이었다.

“이런 걸 바라고 말씀드린 것은 전혀 아니…….”

“너는 예전부터 네 눈동자 색과 닮은 에메랄드를 좋아했었지.”

적당히 거절하려던 나를 공작이 막아섰다.

“어차피 네가 나이가 차면 주려고 생각해 두었던 것이다. 시기가 좀 이르게 된 것뿐이지.”

들려 온 말에 기분이 미묘해졌다.

[공작은 하나뿐인 친딸의 귀환 선물로 마력석 광산을 통째로 선물했다.]

불현듯 게임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노멀 모드에서 [선택지 ON/OFF] 기능을 얻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잊혀진 아버지란 이름] 퀘스트로 여주에게 처음 ‘아버지’ 소릴 들은 공작은 좋아 죽으려고 했다.

그래서 수양딸의 생일이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아무런 이유도 없이 여주에게 광산을 양도하였는데…….

“이제 에메랄드도 질린 게냐? 그러면, 마력석 광산으로 줄까? 요즘 마도구에 관심이 늘지 않았느냐.”

물끄러미 공작을 바라보고만 있자, 그가 조금 당황한 얼굴로 다시 물었다.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불필요한 감정을 다스리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저한테 이렇게까지 해 주실 필요 없어요, 아버지.”

나는 예의 바르게 읊조리며 양도 확인서를 도로 집어넣은 종이봉투를 공작에게 스윽 내밀었다.

어차피 탈출에 성공하면 이건 모두 ‘진짜 공녀’의 몫이었다.

“마음만 감사히 받을게요.”

“페넬로페.”

공작이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먼저 내민 호의를 거절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입이 썼다.

“…….”

잠시간 내 방에 싸늘한 적막이 내려앉았다.

나는 차라리 공작이 ‘오만방자하기 그지없노라.’ 하고 역정을 내며 방을 나가기를 원했다.

하지만 한참 동안 말없이 우두커니 앉아 있던 공작은.

“아직도…….”

불현듯 적막을 깨고 조심스러운 음성을 내었다.

“아직도 화가 나 있는 게냐?”

“……네?”

“사냥 대회 때의 일 말이다.”

“사냥 대회요?”

뜬금없는 주제에 나는 어리둥절해졌다. 그러자 공작이 황급히 덧붙였다.

“페넬로페. 네가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은데…….”

“무슨…….”

“난 널 믿었다.”

“……예?”

“귀족들을 석궁으로 쏘지 않았으리라는 걸 말이다.”

갑자기 화제가 급변했다.

나는 이미 다 끝난 재판 얘기를 왜 다시 꺼내는지 좀체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공작은 무언가 단단히 오해했는지, 영 뜬구름 잡는 말을 이었다.

“처음엔 네가 그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잠깐 들긴 했지. 하지만, 몇 번이고 약속했지 않느냐.”

“……약속이요?”

“아무도 없는 곳으로 유인해서 쏴 죽이기로.”

“주, 죽이다니요, 아버지.”

상당히 과격해진 약속의 내용에 나는 황당함을 금치 못했다.

흥분해서 아무 말이나 내뱉던 공작도 아차 싶었는지, 여러 번 어색한 헛기침을 했다.

“크흠, 어쨌든! 너도 요즘 꽤 철이 든 듯하니 많은 이들이 보는 앞에서 그럴 리 없을 거라 믿었다.”

“…….”

“그리고 황태자와 그런…… 그, 그런 말도 안 되는 일도, 순간적인 재치였다면서.”

‘연모의 감정을 나눈 사이’라는 말이 차마 나오지 않는지 공작이 심하게 말을 더듬었다.

“내가 직접 너와 미리 대화를 해야 했는데, 황태자파와 2황자파, 양쪽 모두에게 견제를 받는 통에 섣불리 움직일 수 없는 처지였다.”

“……”

“……미안하다.”

요약하자면, 그 말이었다.

내가 억울한 누명을 썼다는 것을 자신은 믿었지만, 본인이 직접 감옥에 올 수 없어 데릭을 대신 보냈다는 것.

길고 긴 변명 끝에 마침내 가장 중요한 한마디가 전해졌다.

데릭 놈이 내게 했던 짓거리가 공작도 동의한 것이 아니란 것은 다행인 일이었다.

그런데 기분이 썩 나아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첫째 오라버니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던데요.”

나는 삭막한 목소리로 답했다.

“걔는 원래 애가 성격이 좀 못났지 않았느냐.”

그러자 공작이 기다렸다는 듯 데릭 놈을 깎아내렸다.

“재판이 끝난 직후 크게 혼을 냈다. 그러니 그만 기분 풀려무나.”

“아버지가 첫째 오라버니를…… 혼내셨다고요?”

“그럼! 이것도 그 자식 몰래 너만 주는 것이다. 응?”

공작이 내가 돌려준 종이봉투를 다시 내 쪽으로 스윽 밀었다.

“그놈은 이제야 광산 사업에 손을 댄 햇병아리 수준이야. 그것도 돈 날릴까 무서워서 여러 명이 모여 공동 투자를 하는 듯하더구나. 쯧쯧, 배포 없는 놈.”

“…….”

“그렇지만 너는 오늘부로 어엿한 광산주이지 않느냐. 네 오라비보다 훨씬 앞선 게지.”

칭얼대는 어린아이를 달래는 듯한 말투였다.

‘허.’

거침없이 장남을 깎아내리고 나를 띄워 주려고 노력하는 공작을 바라보니, 나도 모르게 기가 막힌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러자 공작이 덩달아 미소 지으며 웃음기가 가득한 푸른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쌤통이지? 그 고얀 놈.”

장난스럽게 뇌까리는 공작의 모습이 퍽 생소하면서도 어처구니없었다.

“하…….”

나는 결국, 싸늘했던 표정을 풀고 웃어 버렸다.

“네 큰 오라비 몰래 주는 것이니 당분간은 입 밖에도 꺼내면 안 된다.”

내 기분이 풀렸음을 기민하게 알아차린 공작이 남몰래 속삭였다.

“특히 레널드 그놈! 그놈 앞에선 더더욱 입도 벙긋 말아야 해. 알겠느냐? 응?”

“……알았어요, 아버지.”

나는 하는 수 없이 그가 내민 종이봉투를 받아 들었다.

받아 둬서 나쁠 것도 없거니와, 이렇게까지 내게 굽혀 주는데 더 뻗대는 것도 무의미했다.

“그리고……. 감사해요. 이렇게 과분한 선물을 주셔서.”

나는 살며시 고개를 숙이며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그러면서 머리로는 이제 이 광산을 어떻게 굴릴지 맹렬히 생각하던 찰나.

“……너도 내겐 과분했단다, 페넬로페.”

문득 공작이 씁쓸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내가 어리석어, 그간 그걸 몰랐구나.”

나는 그의 말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었다.

페넬로페를 무턱대고 입양해 온 과거를 후회하는 건지.

혹은 지금의 철든 막내딸 노릇을 하는 내게, 미안해서 하는 소린지.

〈SYSTEM〉 공작가 주변인들과의 관계 개선으로 명성이 +10 되었습니다. (total : 410)

그러나 문득 새하얘지는 눈앞을 바라보자니 참을 수 없는 감정이 솟아났다.

이 말을 듣고 있는 것이 진짜 페넬로페가 아니라는 사실이, 그리고 내 친부에게서는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소리라는 것이.

나는 울렁이는 속을 가까스로 내리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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