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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엔딩은 죽음뿐-105화 (105/243)

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105화

* * *

공작의 갑작스러운 방문으로 오지 못했던 집사는, 다음 날 이른 아침 나를 찾아왔다.

“동남부 에메랄드 광산 투자자 목록입니다.”

책상 위에 그가 서류 몇 개를 내려놓았다.

내가 하루아침에 광산 소유주가 된 것에 대한 언질을 공작으로부터 받은 듯, 일 처리가 발 빨랐다.

“며칠 뒤에 채굴된 원석의 수를 정리한 장부도 올리겠습니다.”

“알아서 잘 부탁해.”

나는 집사가 내게 건넨 서류들을 대충 훑어보다 말았다.

타국인들도 섞여 있기 때문에 어차피 봐도 누가 누군지 모른다.

내가 관심 있는 것은 돈뿐이었다.

“그런데 보통 원석 판매는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지?”

“하등품들은 계약된 상단에 납품합니다. 상등품들은 가공한 후 경매장에 내놓습니다.”

“수익률은 좋은 편인가?”

내 물음에 집사가 불현듯 목소리를 낮췄다.

“가문 내 마법사들을 통해 마법을 새기는 것에 성공한 원석들은 은밀히 암시장에 내놓고 있습니다. 시중 가격의 열 배가 넘게 뛸 때도 있지요.”

“그래?”

귀가 솔깃해졌다.

공작이 말했다. 최근 동남부 광산에서 상등품의 에메랄드들이 쏟아지듯 채굴되었다고.

그런데 그 채굴된 에메랄드의 판매를 개시하기도 전에 내게 넘긴 것이다.

나는 이것으로 ‘호감도 수치 현질’에도 아무런 타격을 받지 않는, 떼부자가 될 예정이었다.

절로 실룩거리는 입꼬리를 꾹 내리 누르며, 태연히 말했다.

“집사가 알아서 팔던 대로 팔아 줘. 장부만 제때 갖다 주면 돼.”

아무렴, 어떻게 팔든 돈만 내 손에 들어오면 그만이다.

“한데…….”

집사가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당분간은 가문 내 마법사들을 통해 마법 세공을 거치기 힘들 듯합니다, 아가씨.”

“왜지?”

“그게 아직 소공작님께서는 알지 못하는 일인지라…….”

나는 집사의 말을 바로 알아차렸다.

알면 데릭 놈이 필시 공작에게 쫓아가서 왜 줬냐고 지랄을 할 것이다.

때문에 광산 운영이 안정될 때까진 함구하기로 약속한 상태였다.

“공작님께서 마법사를 고용한 상단을 추려서 접촉한 후 계약하라는 고견을 주셨습니다만…… 어떻게 하는 게 좋겠습니까, 아가씨?”

집사가 조심스럽게 내 의중을 물었다.

“음…….”

잠시 고민하던 나는 이윽고 태연히 답했다.

“급한 것도 아니니 우리가 먼저 상단을 찾아 나설 필요는 없지.”

재벌가의 사생아로 굴러먹던 것이 모두 헛짓거리만은 아닌 모양이다.

현생에서 친부가 옥션 참여에 대해 첫째 개새끼와 나눈 대화를 몇 번 들었던 것이 얼핏 떠올랐다.

“먼저 경매장에 가공하지 않은 최상등품 원석 몇 개를 내놓고 지켜봐. 알아보는 이들이 있다면 저들끼리 알아서 경쟁하겠지.”

“그럼…….”

“우린 기다렸다가 가장 괜찮은 조건을 제시한 곳과 계약하면 돼.”

“아.”

내 말에 집사가 나지막한 탄성을 내다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아가씨.”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퍽 생경했다. 마치 ‘네가 어떻게 그런 생각을……?’ 이라고 말하는 듯했다.

‘다 보이거든요, 아저씨.’

속으로 코웃음을 친 나는 어제 묻지 못했던 본론을 물었다.

“그리고, 이클리스의 옷들은 어느 정도 완성됐어?”

“거의 다 완성됐다고 합니다.”

“얼마 정도 더 걸린다는데?”

“이제 마무리만 지으면 된다는 연락을 받았는데…… 많이 급하신 겁니까, 아가씨?”

집사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그럴 만도 한 게, 사냥감의 가죽으로 지은 옷들은 모두 겨울옷이었다.

가을로 넘어가는 따뜻한 요즘 날씨에는 어차피 입지도 못할 것들이다.

“웃돈을 주고 재단사를 더 재촉할까요?”

“아니야, 됐어. 당장 급한 건 아니고…….”

나는 고개를 저었다. 급한 건 옷보다 내 마음이었다.

한 달이라는 기한이 생기자, 전에 없이 마음이 초조해졌다.

“집사, 오늘 기사들의 훈련이 몇 시에 끝나지?”

“오후에 비가 올 예정이라 오늘은 오전 훈련 일정만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훈련 마치고 이클리스한테 내가 있는 곳으로 오라고 전달 좀 해 줘.”

“네, 알겠습니다, 아가씨.”

더는 토를 달지 않고 고분고분 답하는 집사의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 * *

막 점심을 먹고 나자, 거짓말처럼 부슬비가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이클리스를 기다리는 동안 후원에서 책을 읽으려 했던 나는, 목적지를 유리 온실로 바꿨다.

끼이익-.

유리문을 열고 들어서자 푸르른 초목과 향긋한 꽃향기가 뒤섞인 채 나를 반겼다.

엊그제 오찬을 하는 동안에는 남주 놈들의 머리 위를 확인하는 데 여념이 없어, 온실 안을 제대로 둘러볼 새가 없었다.

다시 찾은 유리 온실은 아름답고, 고요하고, 적막했다.

“……괜찮네.”

나는 널따란 안을 둘러보다가, 휘적휘적 걸음을 옮겼다.

정 가운데에 차를 즐길 수 있는 아기자기한 테이블이 있었지만, 그대로 지나쳤다.

그리고 입구에서 잘 보이지 않는 구석으로 가 철퍼덕 주저앉았다.

주변에 이름 모를 작은 하얀색 꽃무리가 소담스럽게 만개해 있었다.

누가 봐도 잘 관리된 모습이었다.

‘신경 좀 썼나 본데.’

오늘 아침 방을 나가기 직전에 들은 집사의 당부가 떠올랐다.

- 타국에서 희귀한 꽃과 초목들을 잔뜩 들여왔으니 유리 온실을 자주 방문해 주십시오, 아가씨. 공작님께서도 앞으로 사시사철 관리하라고 지시해 두셨습니다.

식당에서의 어처구니없는 공녀 학대 사건 목격 이후, 공작은 나름 여러모로 애를 쓰는 것 같았다.

그 방증으로 6년간 폐쇄했던 3층을 개방하여 다락방도 다시 오를 수 있게 해 주었다.

하지만 레널드와 거하게 싸운 내가 얼씬도 하지 않자 이번에는 유리 온실을 개방하는 쪽으로 방향을 바꾼 듯했다.

‘페넬로페였다면 희희낙락했겠네.’

나는 좀 안쓰러운 기분이 들어 가녀린 볼을 살며시 쓰다듬었다.

공작의 노력은 고마웠지만, 나는 이 푸르고 아름다운 온실 안의 정경을 온전히 즐기는 게 아닌, 철저히 이용해 먹을 작정이었다.

이클리스는 다른 남주들에 비해 만날 장소가 한정돼 있었다.

내가 외출을 안 하면 밖으로 데리고 나가기도 힘들거니와, 신분 차로 인해 함부로 나다닐 수도 없었다.

노예를 데리고 귀족들이 포진한 오페라를 보겠는가, 유명 레스토랑을 가겠는가.

‘쯧, 은근히 까다롭네.’

엊그제 본 그의 모습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여전히 제대로 된 검술을 배우지 못하고 있던 이클리스.

‘게임대로 공작이 데리고 왔으면 지금쯤 처지가 좀 나아져 있었을까…….’

하지만 그렇다면 이클리스가 내게 이만큼이나 호감을 가질 리 없었을 것이다.

끔찍하기 그지없는 노예 경매장에서 구해 준, 구원해 준 하나뿐인 주인이 바로 나였으니까.

안타깝지만, 당장 그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게 없었다.

입지가 형편없는 ‘가짜 공녀’로서 데릭이 그를 가문의 견습 기사로 받아 준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해야 했다.

게다가 데릭도 공작도, 지난번에 기사의 목을 조른 사건으로 이클리스를 더더욱 못마땅해했다.

‘그래도 바로 내쫓지 않은 걸로 선방은 한 건가.’

비록, 게임의 본 스토리와는 달리 이클리스가 소드 마스터가 되는 것이 좀 늦어질 테지만…….

‘어차피 진짜 공녀가 돌아오면 다 해결해 주겠지.’

나는 다소 냉정하게 생각했다.

내게 당장 중요한 건 호감도뿐.

이클리스에게는 이런 나보단 다정다감하고 천사 같은 여주가 필요하다.

‘모든 건 내가 탈출한 후의 여주가 해 줄 몫이야.’

애써 합리화하며, 나는 무릎 위로 책을 펼쳐 들었다.

책을 읽은 지 얼마나 지났을까.

마법으로 따듯한 온풍이 감도는 내부 탓에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앉기 시작했다.

잠기운이 몰려오면서 글자가 흐릿해졌다.

나는 그냥 책을 덮고 꽃밭 위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눈을 감은 채 잠들락 말락 한 몽롱함에 휩싸여 있을 때였다.

끼이익-.

문득 누군가 온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사박, 사박. 잔디를 밟는 소리가 들렸다.

한동안 온실을 배회하던 발걸음이, 이윽고 목표물을 정했는지 일정해졌다.

점점 가까워지던 그 소리는 마침내…….

내 머리맡에 우뚝 멈춰 섰다.

그때까지 나는 눈을 뜨지 않고 있었다.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정말로 잠이 쏟아져서 비몽사몽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스윽- 머리맡에 멈춰 선 누군가가 움직였다.

숨소리가 가까워졌다. 내 쪽으로 몸을 숙인 듯했다.

문득 한쪽 뺨에 희미한 감촉이 닿았다. 아니, 완전히 닿은 것은 아니었다.

닿을 듯 말 듯…… 천천히 피부를 덧그리던 온기가 점점 입꼬리로, 입꼬리에서 아랫입술로 옮겨 갔다.

계속 모른 척해 주고 싶었지만, 더는 참을 수 없는 간지러움에 나도 모르게 설핏 웃음이 터져 나왔다.

“……만지고 싶으면 그냥 만져.”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리며 눈을 떴다.

“그렇게 하면 간지러우니까.”

속삭이듯 중얼거린 말에 서서히 커지는 회갈색 동공.

생각보다 퍽 가깝게 위치한 거리에 놀란 것은, 내가 아닌 상대방이었다.

이클리스는 뜨거운 한숨을 토해 내듯 나를 불렀다.

“……주인님.”

허름한 옷 위에, 내가 선물한 화려한 이빨 조각들이 달랑거렸다.

나의 하나뿐인 기사는, 오늘도 충실한 노예 역을 이행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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