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106화
이클리스는 내 머리맡에 앉아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밀랍 같은 멀건 얼굴이 오늘도 무미건조했다.
하지만 나를 응시하는 회갈색 동공에 묘한 빛이 감돌고 있었다.
나는 습관처럼 그의 머리 위를 흘긋 눈짓하며 여상하게 입을 열었다.
“그만 일어나고 싶은데.”
“…….”
“좀 비켜 주련?”
느른하게 그를 올려다보며 눈을 마주치자, 이클리스가 일순 몸을 움찔거렸다.
그는 한발 늦게 내 쪽으로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나는 그가 완전히 물러서고 나서야 느릿하게 몸을 일으켜 앉았다.
“생각보다 일찍 끝났네.”
“네. 비가 와서…….”
내가 일어나 앉자 그는 눈을 내리깔며 고분고분 답했다.
그런 이클리스를 찬찬히 살피자, 목에 건 초커 위에 얼마 전에 준 목걸이를 거추장스럽게 덧걸고 있는 것이 보였다.
지난번에 벗겨 주지 않은 탓이었다.
허름한 몰골과 소유주가 있는 노예임을 나타내는 마도구.
그에 반해 가치를 매길 수 없는 화려하고 장엄한 상아 조각들이 현저하게 대조되었다.
우스꽝스럽게 느껴질 만도 한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잘 소화해서 문제였다.
‘과연 남주는 남주야.’
“목걸이. 하고 왔네.”
나는 불쑥 손을 뻗어 그의 목걸이를 매만졌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이클리스의 동공이 한차례 흔들렸다.
“……주인님께서 주신걸요.”
그러나 그는 발칙하게도, 물러서지 않고 묵묵히 답했다. 왠지 모르게 꽉 틀어막힌 음성이었다.
나는 회갈색 동공과 시선을 마주치고는 사르르 눈을 접었다.
“예쁘구나.”
그리고 호감도를 확인하기 위해 상아 조각을 만지는 척하며, 그의 쇄골 근처를 슬며시 쓸었다.
알아차릴 수 없도록 손끝으로 살짝 건드린 것에 지나지 않은데, 이클리스가 기민하게 몸을 움찔거렸다.
그리고.
〈SYSTEM〉 [이클리스]의 호감도를 확인하겠습니까?
[400만 골드 / 명성 200]
‘하…… 진짜 환장하겠네.’
나는 떠오른 시스템 창을 보며 이를 아드득 갈았다.
골드가 올랐다. 무려 2배나.
‘돈 잡아먹는 귀신 같으니라고…….’
태평하게 49번이나 남았다고 좋아했던 내가 어리석었다.
이 미친 게임이 어떤 게임인지 잠시 잊었다.
흔한 과금 패턴임을 알았지만, 울분이 터져 나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나는 부글부글 끓는 속을 가다듬으며, 신경질적으로 [400만 골드]를 눌렀다.
〈SYSTEM〉 [400만 골드]를 차감하여 [이클리스]의 호감도를 확인합니다. (남은 보유 자금 : 94,000,000 골드)
[호감도 81%]
마지막으로 봤을 때에 비해 올라 있는 호감도가 보였다.
그나마 올라서 다행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걱정도 들었다.
이런 식이라면 의외로 돈이 금방금방 소진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기우는 금방 잦아들었다.
‘아, 맞다. 나 이제 곧 떼부자지, 참.’
어제부로 나는 에메랄드 광산 소유주가 됐기에.
“왜…….”
다시 [호감도 확인하기]로 변한 그의 머리 위를 흘끔거리고 있을 무렵이었다.
문득 이클리스가 입을 달싹였다.
“여기서 이렇게 누워 계세요?”
“……응?”
“이슬 때문에 바닥이 차요.”
“아…….”
하긴. 귀족 영애가 의자 놔두고 바닥에 벌러덩 누워 있는 꼴이 좀 웃기기도 했겠다.
“그냥.”
나는 주변에 피어 있는 작고 아담한 꽃송이들을 어루만졌다.
“꽃이 예뻐서.”
“들꽃을 좋아하세요?”
이게 들꽃인지 몰랐다. 어쩐지, 다른 종류에 비해 구석에 피어 있더라.
“응.”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쁘고 화려하면 누구에게나 쉽게 사랑받잖아. 그러니 나라도 사랑해 줘야지.”
별 뜻 없이 중얼거린 말이었다.
이제 한 달 뒤면 이 온실의 주인은 내가 아닌, 다른 이가 될 테니까.
그런데 그 순간, 이클리스의 얼굴이 기묘하게 일렁거렸다.
“주인님이 왜…….”
그는 무어라 중얼거리다 말을 멈췄다.
빤히 바라보았지만, 더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없었다.
딱히 중요한 것은 아니었기에, 나는 아무렇지 않게 말을 돌렸다.
“그보다, 오늘 부른 건 네 초커를 벗겨 주기 위해서야.”
“……초커요?”
“응. 저번에 빼 주겠다고 했는데 그냥 가 버렸네. 미안.”
빈말인 줄 알았던지, 이클리스의 눈이 커졌다.
하지만 나는 진심이었다.
솔직히 그에 대한 생리적인 두려움이 완전히 가신 것은 아니었다.
아직도 내 머릿속에는 맨손으로 사람들을 패 죽이고, 가차 없이 목검을 내게 겨누던 그가 생생했다.
‘이클리스는 아직도 나를 증오하고 있는가.’
순종적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그의 표정으로는 알 수 없었다.
그를 제어할 수 있는 유일한 목줄을 푸는 행위가, 어쩌면 내 죽음을 자초하는 것일지도…….
하지만 나는 지금 이것저것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호감도를 올릴 수만 있다면.’
초커든 선물이든, 뭐든 다 갖다 바칠 것이다.
“……뒤 좀 돌아보겠니, 이클리스?”
나는 입가에 상냥한 미소를 걸친 채 권유했다.
초커를 풀려면 역시나 루비 반지가 필요했다.
뒤쪽에 파여 있는 홈에 루비를 맞추고 돌려야만 잠금을 풀 수 있었기에.
“…….”
이클리스는 알 수 없는 무기질 적인 눈빛으로 나를 빤히 바라보기만 할 뿐 선뜻 움직이지 않았다.
‘……왜지? 얼씨구나 좋아할 줄 알았는데.’
의아해져서 그를 멀거니 바라보고 있을 적.
“……괜찮아요, 주인님.”
이클리스가 이윽고 입을 열어 답했다.
“안 벗겨 주셔도 돼요, 아니.”
“…….”
“벗기 싫어요.”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이었다.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이걸 벗더라도, 제가 노예인 사실은 변함없잖아요.”
“……그건 그렇지.”
초커를 풀어 주면서 또 한 번의 호감도 상승을 노렸던 나는, 이클리스의 무뚝뚝한 대답에 떨떠름하게 수긍했다.
“하지만 계속 하고 있어 봤자 너만 불편하잖니.”
사실이었다. 노란 구슬이 달린 초커는 누가 봐도 노예 신분임을 증명했다.
계속 차고 있어 봤자, 기분도 더럽고 몸도 마음도 불편할 것이다.
그런 부정적인 감정들은 장기적으로 봤을 때 내게 썩 이롭지 못했다.
“…….”
그러나 그는 정말로 풀고 싶은 생각이 없는지 대답 없이 가만히 앉아 있기만 했다.
덜컥 불안감이 샘솟았다.
“……혹시, 아직도 누가 널 괴롭혀?”
나는 조급하게 물었다.
“노예 신분이라고 또 차별하는 놈이 있니?”
“…….”
“어서 말해 봐. 가서 깽판은 쳐 준다고 했잖아.”
“그게 아니라…….”
내 채근에 못 이기겠는지, 이클리스가 느릿느릿 입을 뗐다.
“그게 아니라, 이걸 하고 있어야 주인님이 계속 절 찾으실 것 같아서요.”
통 의중을 알 수 없는 말이었다. 나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되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주인님은 제가 이걸 하고 있는 걸 안쓰럽게 여기시죠.”
“…….”
“그건 제가 큰 사고 없이 얌전히 굴고 있어서예요. 맞죠?”
그의 물음에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이클리스는 생각보다 나를 아주 잘 간파하고 있었다.
“그건…….”
무어라 변명하려던 나를 막아서며 그는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만약에 초커를 푼 후에 저번 같은 일이 일어났는데, 제가 혼자 사고라도 친 것으로 와전돼서 주인님께 전달된다면, 그러면.”
“…….”
“그러면 주인님은 가차 없이 절 내치시겠죠.”
그가 그런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조금 섬뜩하게 느껴졌다.
어느 정도 맞는 말이었다. 공작저에 온 이후 그가 사고를 쳤다면, 나는 초커를 풀어 줄 생각 따윈 조금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런 내색을 한 기억이 없었다.
오히려 마검까지 쥐여 주며 하나뿐인 호위기사 자리를 내주었지 않은가.
더는 호감도 수치가 보이지 않는데도 나도 모르게 그의 정수리 위를 반사적으로 흘끔거렸다.
“그렇지 않아, 이클리스. 난 언제까지고 네 편이란다.”
다소 성급하게 되뇐 탓인지, 상투적인 말이 흘러나왔다.
이클리스는 여전히 무표정했다. 내 말을 신경 쓰는 눈치는 아니었다.
그저 한 손을 들고 제 목 주변을 매만지며 중얼거리길.
“이걸 차고 있는 한, 주인님은 제가 함부로 날뛰지 않을 걸 알고 저를 계속 안쓰럽게만 여기실 테니까…….”
그는 천천히 상체를 기울였다.
엎드려 눕기라도 하듯, 무릎 위에 아무렇게나 놓여 있는 내 손 위에 제 뺨을 가져다 대었다.
손등에 타인의 온기가 질척하게 문질러졌다.
“……착하게 굴게요.”
이클리스는, 나만 들리도록 작게 속삭였다.
“그러니 계속 제 목줄을 틀어잡고 계세요, 주인님.”
나는 피부를 간질이는 갈색 머리칼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그의 행동만 보자면, 꼭 자주 찾지 않는 냉정한 주인에게 내치지 말아 달라며 애원하는 것 같았다.
‘……연기일까, 진심일까.’
이클리스에게는 ‘가짜 공녀’의 알량한 비호나마 아직은 필요했다.
여전히 기사단 내에서 제대로 자리를 잡은 상태가 아니었기에.
사냥 대회에서 돌아온 후 공작저는 꽤 많은 것이 변화했다.
도나 부인을 필두로 공녀를 우습게 여기던 식당의 고용인들이 모두 물갈이되었다.
그도 모자라 이클리스를 공공연히 괴롭힌 무리들이 모조리 파면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내가 가끔 던져 주는 선물, 관심들이 그에게는 곧 기사단 내의 서열과 입지로 굳어질 것이다.
예상치 못한 이클리스의 직구에, 요동치던 심장이 차차 고요해졌다.
머리가 차가워졌다.
나는 그가 베고 누운 한 손을 ‘스르륵’ 빼내었다.
이내 그의 머리 위에 얹은 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그와 동시에.
〈SYSTEM〉 [이클리스]의 호감도를 확인하시겠습니까?
[600만 골드/ 명성 200]
“……그래.”
내 입에서 한발 늦은 답이 흘러나왔다.
〈SYSTEM〉 [600만 골드]를 차감하여 [이클리스]의 호감도를 확인합니다. (남은 보유 자금 : 88,000,000 골드)
[호감도 86%]
나는 이클리스의 머리칼이 아닌, 그의 머리 위 호감도를 보며 눈을 번뜩였다.
‘아무렴 연기면 또 어떤가.’
호감도만 오른다면, 이제 와선 모두 상관없는 일이었다.
“네가 원한다면 얼마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