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107화
* * *
결국 초커를 빼기 싫다는 이클리스를 그대로 돌려보내고, 방으로 돌아왔다.
“아가씨, 오셨습니까?”
그런 나를 집사가 반겼다.
“또 무슨 일이야, 집사?”
나는 의아해졌다. 이클리스를 만나기 바로 전, 이미 그와 한차례 긴히 대화를 나눴기 때문이다.
“아가씨 앞으로 급보가 왔습니다.”
“급보? 무슨 급보? 초대장이면 다 거절하라 했잖아.”
우산과 숄을 에밀리에게 넘긴 후 나는 책상으로 가 앉았다.
사냥제에서 퀸을 해 먹은 탓인지 요즘 들어 초대장이 물밀 듯이 밀어닥치는 중이었다.
집사는 한두 곳 정도, 명망 있는 가문에서 열리는 파티에는 참석하는 것이 어떠냐며 권했지만, 나는 칼같이 불쏘시개로 쓰라고 명령했다.
제2의 켈린을 상대할 여유 따위 없었기 때문이다.
“그게…….”
의문에 찬 내 물음에, 집사는 조금 망설이는 태도로 어물어물 답했다.
“황궁의 전령이 보내온 서신인지라, 제 선에서 처리할 수 없었습니다.”
“황…… 궁?”
기이한 눈빛으로 집사를 돌아보자, 그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무언가를 내밀었다.
번쩍번쩍한 황룡이 새겨진 고급스러운 편지 봉투.
번뜩 기시감이 들었다. 이 망할 것은 틀림없이…….
“어머! 우리 아가씨가 사냥제에서 너~무 활약하셔서, 황궁에서 초청이 왔나 봐요!”
사람 속도 모르고, 에밀리는 눈을 빛내며 끔찍한 소리를 늘어놓았다.
“하…….”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올 게 왔구나, 올 게 왔어.’
도망치듯 황궁에서 빠져나온 이후, 나는 폭주하는 초대들을 모두 거절하고 집에 틀어박혀 두문불출했다.
괜히 바깥에 얼쩡댔다가, 혹시라도 황태자의 귀에 소식이 들어갈까 봐서였다.
별다른 반응이 없기에 그대로 넘어갈 수 있을 줄 알았건만…….
“하…… 이리 줘.”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집사로부터 서신을 건네받았다.
그리고 페이퍼 나이프로 봉투를 열고 내용물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친애하는 페넬로페 에카르트 공녀.
아니, 이제는 ‘은애하는’이라고 적어 줘야 하나?
거두절미하고, 지난번 내가 깨어났을 때 나눴던 대화에서 참 많은 일이 생략되어 있더군, 공녀.
재판장에서 생난리를 쳐 놨던데, 덕분에 내 입장이 아주 난처해졌어.
그간 그것을 수습하기 바빠 이제야 서신을 보낸다.
다시 진지한 대화를 나눠야 할 필요가 있을 듯한데,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지?
빠른 시일 내에 황궁으로 찾아오도록 해.
안 그러면 후회하게 될 테니까.
- 칼리스토 레굴루스]
“아악, 미친!”
나는 처음 놈의 서신을 받았을 때처럼, 종이를 사정없이 와작 구겼다.
“……또 그분께 온 겁니까?”
진저리를 치는 내 모습에 집사가 걱정 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하…….”
말해 뭐 하나. 입만 아프지.
한숨으로 대답을 대신하자, 집사가 알 만하다는 듯 숙연해졌다.
나는 음울한 얼굴로 골머리를 짚었다.
서로 연모의 감정을 가졌던 사이에다 졸지에 내게 차인 꼴이 된 황태자가, 이제 이걸로 얼마나 물고 늘어질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차라리 그냥 내가 고백하려고 숲으로 따로 불렀다고 했어야 했나?’
하지만 이제 와 재판장에서 했던 말들을 후회한들, 이미 늦었다.
게다가 그런 식으로 말했더라면 더 심각한 상황이 초래됐을 수도 있다.
‘역시 아직도 나를 연모하는 중이었군. 왜 아닌 척 내숭을 떨지?’
놈이 내게 필히 지껄였을지도 모를 말이 떠오르자 나도 모르게 몸서리가 쳐졌다.
‘됐어. 공작저 밖으로 한 발자국도 안 나가면 뭐 어쩔 거야.’
그렇게 생각한 나는, 머리를 부여잡고 황궁으로 가지 않을 만한 방법을 쥐어짜기 시작했다.
다친 곳이 한 군데도 없어서 이제 쇳독 핑계는 어림도 없었다.
‘하루아침에 중병에 걸렸다 할 수도 없고…….’
떠오르는 핑계가 마땅치 않자, 나는 집사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집사, 이번엔 뭐가 좋을까? 오랜 시간 움직이지 못하는 것으로.”
“음.”
잔뼈가 굵은 공작의 수족답게, 집사는 되묻는 것 없이 바로 고민에 빠졌다.
그리고 이내 썩 마음에 드는 답을 내놓았다.
“사냥 대회에서 너무 무리를 하여 심한 근육통을 동반한 몸살에 걸리신 것이 어떻습니까.”
“그거 괜찮네. 나 당분간 한 발자국도 운신하기 힘들 예정이야.”
“네. 당장 주치의를 불러오겠습니다, 아가씨.”
“좋아. 수고해.”
팔다리가 척척 맞아떨어지는 집사 덕분에 순식간에 병명이 완성됐다.
‘됐어. 이걸로 공작저 안에서 존버하면 돼.’
나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입을 맞추는 게 성황리에 끝나자, 집사는 분주하게 내 방을 빠져 나갔다.
이제 내 대신 주치의의 소견서를 첨부하여 황궁으로 답신을 보내야 하기 때문이다.
“아가씨, 어디 아프세요?”
옷장으로 숄을 정리하러 갔다가 뒤늦게 돌아온 에밀리가 ‘주치의’ 소리에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
나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나 오늘부터 몸살이야.”
* * *
며칠 후 이클리스의 옷들이 모두 완성됐다.
짓고 나니 커다란 상자 하나를 가득 채울 정도의 부피라, 연약한 내가 직접 가져다줄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기사들이 모두 보는 앞에서 나 대신 전달해 주라고 집사에게 지시하던 차였다.
“아, 아가씨!”
벌컥, 방문이 열리고 에밀리가 난데없이 들이닥쳤다.
“아가씨! 어, 어서 나와 보셔야겠어요!”
“에밀리. 지금 집사와 중요한 얘기 중이잖니. 예의 없이 이게 무슨…….”
“지금 그, 그게 문제가 아니어요!”
에밀리는 평소와는 달리 싸늘한 타박에도 굴하지 않고 소리쳤다.
“바, 밖에, 지금 밖에 황태자 전하께서……!”
“……뭐?”
“저택 앞에 황태자 전하께서 찾아오셨어요!”
* * *
그 시각, 저택 앞에는 황룡이 새겨진 화려한 황금 마차가 당도해 있었다.
마차 표면에 도금된 황금처럼 찬란한 금빛 머리를 휘날리며, 한 남자가 느긋하게 내려섰다.
“안녕하셨나, 공작.”
칼리스토는 저택 앞에 나와 서 있는 공작을 보며 반갑게 인사했다.
“마중을 나와 준 건가? 이거 참, 몸 둘 바를 모르겠는걸.”
대문 앞에 황가의 문양이 그려진 마차가 당도했다는 연락을 받고 깜짝 놀라 뛰쳐나온 공작이 떨떠름한 얼굴로 황태자를 맞이했다.
“전하. 따로 연락도 없이 어인 일로 이 누추한 곳까지 발걸음을 다 하셨습니까.”
“앞으로 자주 들락거릴 곳인데, 따로 연락까지 할 필요 있나? 섭섭하게.”
황태자의 뜻 모를 말에 공작의 얼굴이 기어이 일그러졌다.
“그게 무슨…….”
“잘 부탁하네, 공작. 아니 사석에서는 장인이라 불러야 하나?”
“……예?”
공작의 입이 떡 벌어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황태자는 뻔뻔스럽게 주변을 둘러보며 누군가를 찾았다.
“그런데 나와 연모의 감정을 나눴다던 내 전 연인은 보이지 않는군. 아직 치장이 덜 끝났나 보지?”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현관으로 걸음을 옮기는 것이 아닌가.
하마터면 공작을 포함하여 나와 있는 고용인 모두가 깜빡 속아 길을 터 줄 뻔했다.
“전하!”
공작이 눈을 부릅뜨고 허겁지겁 황태자의 앞을 막아섰다.
“그, 그 무슨 망발을……! 그리고 어딜 들어가시는 겁니까! 아무리 황 태자 전하라 하셔도, 이런 경우는……!”
“자, 자. 일단 응접실로 가서 마저 얘기 나누지, 공작. 손님을 저택 밖에 세워 둘 참인가?”
황태자가 그런 공작의 등을 떠밀며 물 흐르듯 저택 안으로 이동하려 들었다.
“아니, 손님은 누가 손님이란 말입니까!”
황족을 상대로 차마 무력을 쓸 수 없어, 공작은 시뻘게진 얼굴로 밀리지 않도록 버티는 것이 다였다.
“이건 무단 침입이십니다! 자꾸 이러시면, 당장 황제 폐하께 연통을 드릴 수밖에……!”
“무단 침입이라니! 그렇게 안 봤는데 너무하는군, 공작. 앞으로 가족이 될지도 모를 사이에.”
“전하-!”
공작은 거의 비명이라도 지르듯 소리쳤다. 하지만 막무가내로 들이닥치는 황태자를 막을 수 없었다.
‘저런 미친놈!’
그리고 그 위.
살짝 열린 창틈 너머로 몰래 그것을 내려다보고 있던 나는 그야말로 치를 떨었다.
“아가씨…….”
조금 전까지 나와 대화를 나누고 있던 집사가 퍽 안타까운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놈에게 아프다는 답신을 보낼 때까지만 해도, 아무도 저 미친놈이 공작저까지 쳐들어올 줄 몰랐다.
‘후회하게 만들어 준다는 게 이런 거였어?!’
나는 주먹을 꽉 쥔 채 부들부들 떨다가, 울며 겨자 먹기로 에밀리를 불렀다.
“에밀리.”
“네, 네?”
“가서 애들 좀 불러와.”
“무슨…….”
뜬금없는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그녀를 보며 이를 악물고 읊조렸다.
“최대한 병자처럼 꾸며. 누가 봐도 곧 쓰러져 죽을 사람처럼 말이야.”
물론 그러지 않아도, 나는 황태자 놈의 기행에 이미 기절하기 직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