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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엔딩은 죽음뿐-108화 (108/243)

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108화

“다 끝났어요, 아가씨.”

나는 둘러싸고 있던 하녀들을 분주히 물렸다.

거울에 허여멀건 얼굴이 비쳤다.

“어떠세요?”

요리조리 변한 모습을 훑어보던 나는 만족스러운 목소리로 답했다.

“곧 피 토하고 쓰러져야 할 것 같아.”

“……노, 농담이시죠?”

“아니, 칭찬이야.”

정말이었다.

분칠을 몇 겹을 했는지 얼굴은 귀신처럼 허옇게 동동 떠 있었고, 입술은 핏기란 게 아예 없었다.

눈 밑엔 뭘 발랐는지 시커먼 인조 다크서클이 드리워져 있는 것이, 과연 병색이 완연한 가녀린 귀족 아가씨 같은 모습이었다.

“마음에 드는데.”

거울을 들여다보며 히죽 웃고 있을 때.

똑똑-.

“아가씨, 펜넬입니다.”

집사가 방문을 두드렸다.

나는 그 순간 화장대에서 벌떡 일어나 침대로 달려가 누웠다.

혹시나 황태자가 참지 못하고 집사를 따라 내 방으로 쳐들어온 건가 싶었기 때문이다.

이불을 목 끝까지 덮고, ‘큼큼’ 헛기침을 한번 한 나는 입을 열었다.

“들어…… 오라고 하렴…….”

다 죽어 가는 목소리가 꽤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얼마 후, ‘끼이익’ 하고 문이 열렸다.

다행히 방 안으로 들어서는 사람은 집사 한 명뿐이었다.

뒤에 딸린 인간이 없나 샅샅이 훑어본 나는 안심하고 멀쩡한 상태로 돌아갔다.

“어떻게 됐어?”

“헉.”

침대로 다가오던 집사가 불현듯 숨을 들이켜며 잠시 멈춰 섰다.

그는 묘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입을 달싹였다.

“짧은 시간…… 몰라보게 변하셨군요, 아가씨.”

“좀 병자 같나?”

“관에서 방금 뛰쳐나온 사람 같습니다.”

흡족한 대답에 나는 씩 미소 지었다. 집사가 다시 한번 흠칫했다.

“그나저나, 어떻게 됐어? 갔어?”

분을 두텁게 바른 얼굴이 갑갑했다. 빨리 씻어 내고 싶었다.

그러나 내 물음에 집사는 선뜻 답을 하지 못하다가, 숙연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공작님께서, 황태자 전하와의 만남을 허락하셨습니다.”

“뭐?!”

나는 입을 떡 벌렸다. 한동안 버벅거리다가 되물었다.

“나, 나 운신하기 힘들다니까……?”

“크흠, 이미 그렇게 말씀드렸으나…… 전하께서 병문안을 하시겠다며 당장 아가씨 방으로 쳐들어가야겠다고 하여…….”

“뭐, 뭐라고?!”

“공작님께서 차마 방 안에서 단둘이 만나는 것만은 절대로 안 된다고 막으셔서, 결국 드넓은 후원에서 잠깐 만나는 것으로 타협을 보았습니다.”

“…….”

“대신 좋은 소식이 하나 있습니다. 아가씨의 몸 상태를 생각해 대면 시간은 30분 이내로 하기로…….”

“그게…… 좋은 소식이야?”

나는 기가 막혀 연신 입을 뻐끔거렸다.

굳이 내가 나서지 않아도, 공작이 먼저 방패막이 되어 줄 거라 굳게 믿고 있었다.

그러나 믿었던 공작이 날 배신했다.

“하하.”

나는 허탈하게 웃으며 생각했다.

‘X 됐구나…….’

꼼짝없이 황태자와 면담 확정이었다.

* * *

나는 흰 잠옷에 카디건 하나만 입은 채 방을 나섰다.

이왕 분장까지 한 마당에 아주 그냥 황태자에게 양심의 가책을 팍팍 심어 주기 위해서였다.

‘나쁜 놈. 아프다는 사람한테까지 기어이 쫓아와서 난리를 쳐야겠냐고.’

물론 놈에게 그런 양심이 존재하기나 할지는 의문이지만.

뒷문을 열자마자 나는 걸음을 늦추고 골골거리는 연기를 하며, 후원을 향해 떼어지지 않는 발길을 떼었다.

며칠 내내 비가 내려서 그럴까.

오랜만에 맑게 갠 가을 햇살이 너무나 푸르고 높다랬다.

깨끗한 하늘과 그 아래 펼쳐진 공작가의 아름다운 후원을 보자니, 긴장으로 응축됐던 마음이 좀 풀렸다.

‘그래. 설마 내 본진까지 와서 죽이겠다고 설치겠어.’

아무렴, 그놈이 아무리 뵈는 게 없는 미친놈이래도 그렇게까지 막 나가지는 않을 것이다.

‘게다가 일전에 보험을 들어 놨기도 했고.’

- 무슨 일이 있어도 저를 죽이지 말라고 말씀드리는 거예요. 포상을 주실 거면 이걸로 주세요.

- 하. ……알았다.

과거의 약속을 떠올린 나는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디 있지?’

바로 보이지 않아 얼마쯤 두리번거리며 걸었을까.

멀찍이서 커다란 뒷모습이 보였다.

연무장으로 향하는 숲 쪽, 이름 모를 노란 꽃들이 허리춤까지 수북이 피어 있는 한가운데.

인기척을 바로 알아차렸는지, 꽤 먼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놈이 휙 뒤돌아 나를 바라보았다.

“여어, 하나뿐인 내 과거의 연인께서 드디어 나오셨군.”

환한 대낮에 보아도 황금을 얇게 저며 놓은 듯한 찬란한 머리칼은 빛을 잃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만큼은 그 부티 나는 머리통이 조금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사…… 이렌?’

나는 그에게 향하던 걸음을 우뚝 멈춰 섰다.

그의 정수리 위에서 위협스럽게 깜빡거리고 있는 새빨간 색 때문에.

“뭘 그렇게 멍청하게 응시하고 있는 거지?”

“…….”

“왜. 걷어찬 마당에 이제 와 새삼 다시 반했나?”

나는 놈이 지껄이는 경악스러운 소리에도 멍하니 놈의 머리 위만 바라보았다.

‘대체 이게 뭐야…….’

나를 응시하는 시뻘건 홍채.

사이렌처럼 깜빡이는 호감도 게이지 바가 너무나도 불길해 보였다.

‘이제…… 이제 사이 좀 괜찮아진 거 아니었냐고!’

사냥 대회 에피소드를 겪으면서 이제 황태자로 인한 데드엔딩에서는 많이 벗어났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저 불길한 빨간색을 보자니, 덜컥 겁이 났다.

‘색이 짙어질수록 위험하단 소린가? 그럼 이클리스의 검붉은 색은 뭐야.’

불안함이 순식간에 턱 끝을 잠식했다.

도무지 놈에게 다가갈 엄두가 안 나 대답 없이 서 있기만 하자, 황태자가 의아한 얼굴을 했다.

“……공녀. 진짜로 어디 아픈 건가?”

그가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다가왔다.

“정말로 안색이 창백한데.”

코앞까지 당도한 놈이 갑자기 허리를 숙여 불쑥 제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리고 샅샅이 내 얼굴을 훑는 것이 아닌가.

“왜, 왜 이러십니까?”

나는 화들짝 놀라 뒷걸음질 치며 소리쳤다.

뒤늦게 내가 아파 보이도록 분장을 했다는 것이 떠올랐다.

아무리 감쪽같다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어색한 곳을 발견할 수밖에 없었다.

화다닥 물러서서 세 발짝 정도 거리를 벌리자, 황태자가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흠……. 겉모습은 꽤 병자 같은 꼴이군.”

“벼, 병자 같은 꼴이 아니라, 저 병자 맞습니다, 전하.”

“난 또 나 만나기 싫어서 거짓말 친 줄 알았지.”

바로 거짓임을 간파당한 나는, 떨리는 속을 가까스로 내리누르며 태연히 대꾸했다.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거짓을 고하겠어요.”

“왜, 약 먹으면 금방 나을 쇳독도 몇 달을 앓았잖아.”

“…….”

지난 일을 들먹거리는 바람에 할 말을 잃었다.

잠시 침묵하던 나는 허겁지겁 고개를 숙이며 인사로 화제를 돌렸다.

“……제국의 작은 태양을 뵙습니다.”

“참 빨리도 하는군그래.”

황태자가 입꼬리를 비틀며 빈정댔다.

나도 너무 뒤늦은 인사란 걸 알아 조금 민망해졌다.

“어쩐 일로……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하, 어쩐 일?”

내 물음에 그의 눈초리가 위로 사납게 들렸다.

“그거 아나, 공녀? 요즘 사교계에선 할 짓 없는 인간들이 모였다 하면 공녀와 내 얘기를 주절거린다더군.”

“…….”

“그대가 사냥 대회의 전야제에서 나와 나눴던 대화와 재판장에서 지껄인 말들이 얼마나 와전됐는지, 무려 황태자까지 걷어찰 만큼 공녀가 사랑에 빠진 사내가 누군지 기를 쓰고 찾고 있다던데.”

“네? 그, 그런……!”

“게다가 숲에서의 밀회는, 내가 그대에게 다시 만나 달라고 비참하게 매달리기 위해 쫓아간 거라더군. 허, 기가 막혀서.”

“뭐, 뭐라고요?!”

신경질적으로 비소를 터뜨리는 황태자의 모습에, 나는 입을 떡 벌렸다.

물론 내가 재판장에서 일부 거짓을 지어낸 건 사실이지만, 그렇게까지 망발을 한 적은 없었다.

‘미친! 황태자가 개빡쳐서 쫓아올 만하잖아!’

대체 어떤 망할 놈이 그딴 헛소리를 퍼뜨리고 다녔는지 이가 부득부득 갈렸다.

그때, 불현듯 누군가 비죽거리던 음성이 귓가에 울려 퍼졌다.

- 혹시 아냐? 내가 소문 잠재우는 데 도움될지.

‘설마…….’

차오르는 불길함에 나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무식하다 해도, 레널드 놈이 나를 위한답시고 그런 헛소리를 지껄이고 다니진 않았을 것이다.

아니라는 변명을 하기 위해 막 입을 떼던 찰나였다.

“하루아침에 황태자까지 매달리게 할 만큼 제국에서 가장 매력적인 여자가 되었는데. 기분이 어떻지, 공녀?”

“…….”

“덕분에 내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됐어.”

황태자가 꽉 깨문 이를 드러내고 귀신같이 웃으며 내게로 한 발, 한 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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