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109화
놈의 머리 위, 새빨간 게이지 바가 깜빡거린다.
왜에에엥-, 어디선가 사이렌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아픈 사람 연기를 하던 것도 잊어버리고, 놈이 다가온 만큼 주춤 주춤 물러서며 황급히 외쳤다.
“다, 다 헛소문입니다, 전하! 저는 그런 말 한 적 없어요! 정말로요!”
“글쎄. 공녀가 내게 했던 말을 떠올리면 완전히 헛소문도 아닌 것 같은데.”
“네? 어떤 말을…….”
“더 괜찮은 남자로 갈아타기 위해 나를 연모하는 것을 그만둔다고 하지 않았나?”
“무슨 그런……!”
눈앞에서 벌어지는 왜곡의 현장에 나는 허겁지겁 못을 박았다.
“저는 당분간 누구를 연모할 생각이 없습니다. 절대로요.”
“물론 그래야 할 거야.”
내 확답에 황태자가 무시무시한 기세를 뿜으며 대꾸했다.
“대(大)잉카 제국에서 나보다 더 괜찮은 새끼가 누군지, 내 이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볼 테니까.”
시뻘건 눈이 나를 향해 섬뜩하게 번뜩였다.
‘……응? 뭔가 이상한데?’
나는 일순 위화감에 멈칫했다.
묘하게 대화가 원 주제에서 벗어난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놈의 말을 다시 한번 되새기고 있는 순간,
“왜 자꾸 똥 마려운 개처럼 주춤거리는 거지?”
문득 황태자가 눈살을 찌푸리며 한 발짝 더 다가왔다.
‘똥 마려운 개라니!’
나는 여전히 저급한 놈의 언어 선택에 치를 떨며 또다시 한 발짝 물러섰다.
사실 좀 쫄아 있는 상태였다.
호감도가 어떤지 바로 알 수도 없는 상태에서 따지러 온 놈과 가까이 붙어 있다가 무슨 봉변을 당할 줄 아는가.
공작가의 후원은 잘 정돈되어 잘못 넘어져 머리를 박을 만한 위험 요소는 없었다.
하지만 ‘만약’이라는 게 있었다.
이 망할 게임에서 일어날 수 있는 혹시 모를 비극을 예방하기 위해, 나는 황태자와 계속 거리를 두는 중이었다.
“허?”
또다시 훌쩍 물러선 내가 이상해 보였던 걸까.
황태자가 ‘이것 봐라?’ 하는 표정으로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놈이 큰 걸음으로 성큼 다가왔다.
어느새 나는 화원에서 벗어나 숲과 맞닿은 곳까지 떠밀리듯 도망쳤다.
샛노랗고 여린 꽃줄기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은 시뻘건 눈을 가진 남자 가, 화원 한가운데 홀로 우뚝 서 있는 꼴이 퍽 기괴했다.
나는 자꾸만 거리를 좁히는 황태자의 행태에 크게 당황하며 외쳤다.
“왜, 왜 자꾸 다가오세요?”
“그러는 그대야말로 왜 자꾸 도망가지?”
역시. 도망가는 나를 눈치채고 일부러 자꾸 다가온 것이다.
‘집요한 놈.’
욕설을 삼키며 나는 최대한 연약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저, 저 아픈 사람입니다, 전하.”
“누가 뭐래?”
“저랑 한 약속…… 잊지 않으셨죠?”
“무슨 약속?”
“침실에서 했던 약속이요. 자고로 전쟁터에서도 노약자는 건드리지 않는 불문율이 있습니다.”
“…….”
그새 잊어버렸는지, 놈이 잠시 골몰히 생각하던 눈치이더니 불현듯 헛바람을 터뜨렸다.
“하. 그대는 내가 소문 하나에 공작 영애의 목을 따러 온 미친놈처럼 보이나?”
“…….”
침묵하자 황태자가 사납게 얼굴을 굳혔다.
그가 불현듯 두 팔을 벌리며 제 허리춤을 드러냈다.
“자, 칼 안 가져왔다.”
“어, 어…….”
나는 좀 놀랐다. 연회장에까지 들고 올 만큼 거의 분신처럼 여기더니, 정말로 놈이 장검을 안 들고 온 것이다.
텅 빈 그의 허리를 쳐다보다가 소심하게 중얼거렸다.
“……꼭 칼로만 사람을 위협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요.”
“난 누구처럼 몇 주 만에 손 뒤집듯 말을 뒤바꾸는 사람이 아니라서 말이야.”
“…….”
“하. 나 참, 내가 왜 이런 변명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군.”
황태자는 기가 막힌다는 어투로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다가 불쑥 물었다.
“그래서 그딴 포상을 내려 달라 했던 건가? 어쩐지 영 수상쩍더니만…….”
“큼큼!”
속내를 전부 들킨 나머지 ‘전적이 있지 않느냐.’고 반박할 전의를 상실했다.
“재판장에서의 일은…… 유감입니다, 전하.”
지은 죄가 있으므로 나는 우물쭈물 변명을 읊조렸다.
“엘렌 후작의 작당 모의를 피하기 위해, 저로서는 정말로 어쩔 수가 없었어요.”
“유감이라고 했나? 하. 보고를 받고 얼마나 어처구니가 없던지, 화도 안 나더군.”
“……죄송해요.”
나는 놈이 불쾌한 것을 넘어 화를 내기 전에 잽싸게 단어를 바꿔 순순히 사과했다.
하기야 독에 당해 사경을 헤매다 간신히 눈을 뜨니, 저를 좋아한다던 영애에게 되레 뻥 걷어차인 상황이 돼 있으니 얼마나 어이가 없을까.
‘그래. 칼을 가지고 오지 않은 것만으로도 데드 엔딩에서 꽤 멀어졌다는 증거야.’
나는 깜빡임이 멈춘 놈의 불길한 호감도 게이지 바를 아련하게 바라보며 애써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뭘 또 그렇게 풀 죽은 얼굴을 하고 그래? 누가 보면 진짜로 아픈 사람 죽이러 쫓아온 줄 알겠어.”
그런 나를 보고 오해를 했는지, 황태자가 픽 웃으며 뇌까렸다.
‘아니었니?’
나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그를 다시 보았다.
그런 내 행동에 황태자가 눈을 부라렸다.
“그대에게 만나자고 서신을 보낸 것은 겸사겸사 결과도 알려 주고, 전해 줄 것도 있어서야.”
“그 협박, 아니, 편지가…… 그런 뜻이었다고요?”
“뭐. 내 편지에 불만 있나?”
“아, 아닙니다.”
빠른 부정을 하는 내게, 황태자가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건넸다.
“자, 이거 받아.”
나는 그가 건넨 것을 내려다보며 눈을 깜빡였다.
갈색의 빛바랜 종이에 빨간색 리본이 매어져 있었다.
“이게…… 뭐예요?”
“그대가 해골에서 발굴해 낸 발타의 지도다. 우리가 동굴을 빠져나올 때 쓴 마법 스크롤 말이야.”
“마법 스크롤이요?”
“황궁 마법사들이 손을 봐서 좀 더 멀쩡하게 복원했다.”
나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다시 보니, 유골이 잡고 있던 탓에 시커멓게 썩어 있던 부분들이 말끔하게 변해 있었다.
황태자가 내게 왜 이것을 주는지, 의미를 알 수 없었다.
“이걸 제게 왜…….”
“그대가 발굴했으니, 그대의 것이지.”
내 물음에 칼리스토는 당연하다는 듯 답했다.
“고고학에 관심이 많아 보이던데. 시종을 통해 발타와 관련된 자료도 같이 보내 뒀으니 확인해 보든가.”
말을 마친 그가 머쓱하게 시선을 피했다.
나는 기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칼리스토는 정말로 나를 잡아 죽이러 온 것이 아닌 듯했다.
게다가 예상치 못한 선물까지 안겨 주는 것이 아닌가.
일순, 가슴이 울렁거렸다. 나는 한참 동안 우두커니 그가 건넨 스크롤을 내려다보았다.
“뭐 해. 받기 싫은가?”
결국, 기다리다 못한 놈이 스크롤을 까딱이며 짜증스럽게 재촉할 때서야 얼떨결에 그것을 받아 들었다.
“……이걸 저한테 주셔도 돼요? 중요한 거잖아요.”
“연구 자료로 쓰려고 복사본을 따로 만들어 놨으니, 걱정 마.”
정말로 내게 줄 심산이었는지, 그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 말에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런데, 공작에겐 고고학을 공부했다는 것을 비밀로 했나 보지? 유물을 전해 주러 왔다고 사실대로 말했는데도 통 믿질 못하더군.”
그때 문득 생각났다는 듯 황태자가 물었다.
나는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진짜 페넬로페도 아니거니와, 어차피 공작은 양딸의 관심사가 뭔지 관심도 없을 것이기에.
“……선물 감사히 받을게요, 전하.”
나는 대답 대신 순수하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그리고 건네받은 스크롤을 조심스럽게 꼭 끌어안았다.
이곳에 온 후로 가장 기분 좋은 선물이라, 자꾸만 슬그머니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때였다.
“감사하긴 아직 일러.”
“……네?”
“선물이 하나 더 있거든.”
황태자가 콧잔등을 찌푸리며 또 한 번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자.”
이번에는 하얀 종이봉투가 튀어나왔다.
“이건 또 뭐예요?”
“일단 받아.”
팔랑팔랑 봉투를 흔들며 하는 채근에 못 이겨 나는 그것 또한 순순히 받았다.
유적과 관련된 또 다른 무언가이겠거니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쉽게도 엘렌 후작의 목을 베어다 줄 수는 없게 되었어, 공녀.”
그런데 선물에 대한 설명 대신 칼리스토는 뜬금없는 소리를 늘어놓았다.
“그게 무슨…….”
“그 늙은이가 무혐의로 풀려났다는 소리야.”
“네?!”
형편없는 암살 사건의 결과를 알리는 소식에 나도 모르게 버럭 큰 소리가 터져 나왔다.
엘렌 후작은 누가 봐도 암살을 사주한 세력이었다.
‘망할 퀘스트대로 다 진행했는데 대체 왜…….’
나는 순식간에 심각해진 얼굴로 되물었다.
“어, 어째서요?”
“후작이 정신 나간 툴렛 남작에게 모두 뒤집어씌우는 것으로 꼬리를 끊어 버렸거든.”
“아.”
나는 짧은 침음을 냈다. 황태자의 말에 불쑥 떠올랐다.
퀘스트가 보상으로 준 [암살자의 증표]는 엘렌 후작의 것이 아니었다는 걸.
“그, 그럼…… 그럼 이대로 다, 없었던 일이 되는 거예요?”
‘너무하잖아.’
얼마나 개고생하며 넘긴 에피소든데, 이럴 수는 없었다.
나도 모르게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리고 있었던지,
“너무 그렇게 아쉬워하진 마.”
황태자가 위로라도 하듯이 말했다.
나는 귀로 듣고도 믿기지 않아, 시선을 번쩍 들고 그를 바라보았다.
칼리스토는 조금 어색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래도 공녀의 복수는 확실하게 해 뒀으니까.”
“……복수요?”
“그래. 그대를 귀족 살해범으로 몰아 재판장에 세운 귀족 7명의 목을 내가 직접 베었거든.”
남자는 그 말을 내뱉고는 이를 드러내며 씩 웃었다.
눈앞이 아연해졌다. 목을 벤 것을 자랑이라도 하듯 말하는 그가 오싹할 만큼 잔인하게 느껴졌기에.
그러나 한편으로는 담담히 결과를 전하는 그의 모습이 꼭…….
‘이미 그럴 줄 알고 있던 사람 같잖아.’
엘렌 후작을 잡을 수 없어 통곡할 정도로 아쉬워야 할 건, 내가 아니라 당사자인 칼리스토였다.
하지만 그는 마치 내가 속상해할 것을 염려하듯, 서둘러 덧붙였다.
“켈린 백작가 일원은 암살 사건에 연루한 것이 인정돼 재산을 몰수당하고 노예로 전락했다. 가문의 일원이 직접 가담한 것은 아닌지라 처형은 피할 수 있었지.”
“켈린 백작가가요?”
모처럼 속 시원한 소식이었다.
한결 나아진 내 표정을 확인한 황태자가 묘한 눈빛으로 나를 응시했다.
그러더니, 내가 들고 있는 흰 봉투를 턱짓하며 마침내 선물의 정체에 대해 털어놓았다.
“그거, 몰수한 켈린가의 재산 중 하나야.”
“무슨…….”
“작년에 그대가 사냥 대회에 참여 금지당했던 일을 기억하나? 일명 ‘석궁 든 미친 침팬지’ 사건 말이야.”
“네, 물론 기억하고 있습니다만…….”
나는 떨떠름한 목소리로 답했다.
내가 직접 한 것은 아니라 큰 타격은 없었다.
하지만 굳이 ‘석궁 든 미친 침팬지’라고 지껄이는 놈의 언행에 기분이 걸쩍지근해졌다.
그러나 그 생각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대의 아비가 다이아몬드 광산을 켈린 백작에게 넘겨서 그대가 투옥되지 않도록 나름대로 합의를 봤더군.”
“……다, 다이아몬드 광산이요?!”
이어진 그의 말에 귀가 번쩍 뜨였다. 그런 사정이 있는 줄은 전혀 몰랐다.
“그게 지금 그대가 들고 있는 거야. 다이아몬드 광산 소유서.”
까무러치게 놀란 나를 보며, 황태자가 오만하게 고개를 까딱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