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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엔딩은 죽음뿐-110화 (110/243)

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110화

나는 그의 턱짓을 따라 멍하니 시선을 내렸다.

아무 생각 없이 건네받은 흰 봉투가 불현듯 천근처럼 무겁게 느껴졌다.

“이참에 그때 사건도 재조사해 봤어.”

그때 황태자가 무심한 어조로 툭 내뱉었다.

“……재조사요?”

“그래. 그대가 작년에 무슨 연유로 그렇게 미쳐 날뛰었을까 궁금해서.”

“…….”

역시나 내가 한 일은 아니지만, 나를 향해 못 박힌 놈의 적나라한 눈초리에 기분이 이상해졌다.

“켈린 백작가를 터는 과정에서도 르테아 백작 부인도 몇 번 털었더니 쉽게도 불더라고.”

“……도르테아 백작 부인이요?”

“그래. 재판장에서 켈린을 쫓아 와서 증언했다며.”

황태자가 성의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그 무리가 원래 돌아가면서 사냥 대회 때마다 티파티를 주최했다던데. 작년 주최자는 켈린이었고, 올해는 도르테아였더군.”

어쩐지, 일면식도 없는 나를 왜 티파티에 초대했나 했더니.

그 촉새 같은 여편네는 작년 사건에도 개입해 있었나 보다.

“알면서 왜 또 그 파티에 기어간 거지?”

황태자가 의아하다는 얼굴로 물었다.

‘기어갔다니! 두 발로 걸어갔다, 이 자식아!’

그들이 같은 패거린 줄 한낱 빙의자인 내가 어찌 안단 말인가.

불쑥 억울함이 치솟았지만, 힘겹게 내리눌렀다.

황태자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의문이 들 만한 일이었기에.

“……1년 만에 참여하는 사냥 대회니, 좀 변한 게 있을 줄 알았어요.”

나는 적당히 얼버무렸다.

그러자 황태자가 정말로 의외라는 듯 나를 돌아보았다.

“천하의 둘도 없는 악녀인 줄 알았더니…… 의외로 순진한 구석도 있군.”

“저는 평화주의자라 누구처럼 기분 좀 나쁘다고 바로 칼을 뽑아 들진 않거든요.”

“대신 석궁은 쏘겠지.”

“…….”

놈에게 더 대꾸할 말이 없어서 이가 부드득 갈렸다.

‘망할 페넬로페!’

기실, 나는 작년의 일을 대략적으로만 인지할 뿐 깊게 알지는 못했다.

하지만 뭐, 안 봐도 뻔한 일이지 않은가.

공작이 다이아몬드 광산을 켈린 쪽에 주고 합의를 봤다는 것은 좀 놀라운 일이지만…….

나는 굳이 내가 빙의하기 전의 일을 들춰내서 페넬로페의 수치를 대신 감당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황태자 놈은 기어이 입을 열어 작년 일을 상세히 읊었다.

“켈린이 그대를 곤경에 빠트리기 위해 미리 매수한 근위병 둘을 티파티장 근처에 세워 뒀었다던데. 알고 있었나?”

“……매, 매수요?”

나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공녀 하나 골탕 먹이자고 근위병까지 매수하다니.

‘진짜 징하다, 징해.’

이번에는 왜 그러지 않았을까, 의문이 들었으나 곧바로 납득했다.

작년에 그 꼴을 겪고도 공녀가 또 참여할 줄은 미처 생각지 못한 것이다.

내가 전혀 모르는 눈치이자, 황태자가 곧바로 다음을 이었다.

“그리고 모기를 한 움큼 우려낸 오물을 내주고 그대와 어울리는 차라고 다 같이 조롱을 했다지.”

“모…….”

‘모, 모기?!’

버럭 튀어 나갈 뻔한 소리를 가까스로 삼켰다.

내가 직접 겪은 일이나 마찬가지이니, 처음 듣는 사람처럼 굴면 큰일이었기에.

‘아니, 모기는 너무 심했잖아!’

생각해 보니, 나도 사냥 대회에서 겪은 일이었다.

도르테아 부인이 먹으라고 권했던 지린내가 나는 노란 차.

마시는 척만 하고 내려놨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꼼짝없이 당할 뻔했다.

‘못된 년들. 그때 아주 그냥 난사를 하고 왔어야 했는데.’

나는 석궁을 한 방도 쏘지 않고 나온 게 못내 아쉬워 이를 빠득빠득 갈았다.

고작 17살의 페넬로페가 눈이 뒤집혀서 날뛸 만한 일이었다.

“그대가 미쳐 날뛸 만도 했어.”

때마침 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황태자가 퍽 재밌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래도 주변에 날아다니는 모기를 잡아다 직접 우려 주겠다며 켈린의 입에 석궁을 들이밀었던 건 정말 대단하더군.”

“…….”

“역시, 소문대로 보통이 아니야.”

짝, 짝. 놈이 뜬금없이 박수를 치며 감탄했다.

나는 눈살을 와락 찌푸렸다.

“지금 저 놀리시는 거죠?”

“그럴 리가? 사람이 참고 살면 병 나기 마련이지. 칭찬이야.”

전혀 칭찬으로 들리지 않았다.

한순간 저놈과 동급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마음이 심란해졌다.

“그런데, 그때 있었던 일을 공작에게 상세히 말하지 않았나?”

그때, 황태자가 불쑥 물었다.

“뭘요?”

“모기 우린 차를 줬다는 것 말이야.”

“…….”

“말했으면 다이아몬드 광산까지 가지는 않았을 텐데. 쌍방이니 대충 사파이어 정도 떼 주고 무마했겠지.”

칼리스토는 비꼬는 게 아니라, 순수하게 질문하는 듯했다.

“…….”

나는 말문이 턱 막혔다.

게임에서는 나오지 않았던 장면이라, 그때의 페넬로페가 어떻게 행동했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공작에게 정말 말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하드 모드의 미친 선택지를 떠올리면, 페넬로페는 충분히 말하고도 남을 성격이었다.

분명 ‘저년들이 감히 제게 모기 섞인 차를 주었다고요!’ 하고 악에 받쳐 난장을 피웠을 테지.

하지만 나는 페넬로페가 그냥 ‘착한 여주병’에 걸려 바보처럼 아무 변명도 안 했을 거라 믿기로 했다.

만약 공작에게 말을 했는데도 변하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면.

그러면 너무 비참하지 않은가.

“……안 믿어 줄 것 같아서요.”

나는 한참 뒤늦게 황태자의 물음에 답했다.

어느덧 나도 모르게 한 손으로 뺨을 슬며시 쓰다듬는 중이었다.

황태자의 의미 모를 시선에 퍼뜩 정신을 차린 나는, 머쓱한 얼굴로 손을 내렸다.

“그쪽은 다수고, 저는 혼자였잖아요. 철이 안 들었을 때였기도 하고요.”

어깨를 으쓱이며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했다.

나는 칼리스토가 내 말에 무참히 조소하며 빈정댈 거라 생각했다.

입꼬리를 픽, 비틀어 올린 것까진 내 예상과 같았다.

“그대의 아비도 알 만하군.”

그러나 그는 예상외로 나를 조롱하지 않았다.

“우리 황제 폐하 못지않아.”

칼리스토는 사나운 기세를 풍기며 웃었다.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그 얼굴이 음울해 보였다.

나는 또다시 가슴이 울렁거리는 기현상을 겪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황급히 화제를 전환했다.

“그런데…… 이걸 저한테 왜 주세요?”

나는 흰색 봉투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원래 저희 아버지 것이잖아요.”

“내 손에 들어왔으니, 누구한테 주든 내 마음이지.”

칼리스토가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공작에게 돌려줄 생각이 없다는 뜻이었다.

나는 잠시 멈칫하다가, 그에게 그냥 광산 소유서를 내밀었다.

“그래도…… 제게는 너무 과분합니다. 스크롤만 감사히 받을게요.”

나는 그것을 ‘웬 떡이냐.’ 하고 덥석 받을 수 없었다.

작년의 페넬로페가 겪었을 수치와 오욕, 눈물 값이 아닌가.

내가 함부로 받을 수 없는 것이었다.

흰 봉투를 다시 돌려주려 하자, 황태자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공녀답지 않게 왜 이래?”

“예? 무슨…….”

“부티 나는 걸 좋아한다며? 그놈의 보석, 질리도록 끌어안고 살아 보라고.”

황태자가 코웃음을 치며 하는 말에 영문 모를 표정을 짓던 중이었다.

불현듯 동굴에서의 대화가 귓가에 스쳐 지나갔다.

- 사람이 돈 좀 있어 보이면 좋잖아요.

- 제가 원래 보석을 좀 좋아해요. 물론 황금도요.

떠오르는 내 흑역사에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괜히 죽이지 말라느니, 헛소리 그만하고 감사히 받아.”

“…….”

“황태자의 목숨을 구한 포상이다.”

그 순간, 황태자가 불쑥 다가와 내 손을 잡아챘다.

〈SYSTEM〉 [칼리스토]의 호감도를 확인하시겠습니까?

[200만 골드 / 명성 200]

예상치 못한 접촉으로 인해 그의 머리 위로 하얀 네모 창이 떠올랐다.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던 순간.

놈이 돌려주기 위해 내밀었던 흰 봉투를 꽉 쥘 수 있도록 내 손등을 힘 있게 겹쳐 잡았다.

“받고, 살갑게 좀 웃고 다녀.”

“…….”

“매번 만날 때마다 개똥이라도 씹은 것처럼 뚱한 표정 짓지 말고.”

“개, 개똥이라니요!”

나는 놈의 저질스러운 말투에 질색을 하며 물러섰다.

원한 것은 아니었으나, 이왕 기회가 생겼을 때 놈의 호감도를 서둘러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그때였다.

바스락-.

황태자와 나를 제외하고 고요하기 그지없던 후원에 미세한 인기척이 느껴졌다.

나는 반사적으로 휙 고개를 돌렸다.

연무장으로 향하는 길과 맞닿은 무성한 풀숲.

빽빽한 나무 사이로, 빠르게 사라지는 누군가의 뒷모습이 언뜻 비쳤다 사라졌다.

묘하게 익숙한 인영이었다.

“이클리스……?”

나도 모르게 혼잣말처럼 작은 중얼거림이 새어 나왔다.

순식간에 사라져 자세히 보지 못했지만, 회갈색 머리칼을 본 것은 분명했다.

‘이클리스가 여긴 왜……?’

지금쯤 훈련을 하고 있어야 할 이가 나를 만나러 올 리 없었다.

잘못 본 건가 싶어 고개를 갸웃거릴 때.

“일하는 고용인인가?”

“네? 아…….”

황태자가 묻는 소리에, 그제야 퍼뜩 정신이 들었다.

다시 앞으로 고개를 돌리니, 칼리스토가 시뻘건 눈을 가느스름하게 뜬 채 텅 빈 숲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런가 봐요.”

서둘러 대수롭지 않은 목소리로 대꾸하자, 그의 시선도 스르륵 내 쪽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공녀.”

그가 여전히 내 손을 꽉 쥔 채 묘한 얼굴로 나를 불렀다.

“요즘은 연극을 배우는 것이 귀족의 기본 소양인가 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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