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111화
“……네? 무슨 연극이요?”
놈의 뜬금없는 소리에 어리둥절할 무렵.
문득, 아직도 황태자가 내 손을 붙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악착같이 거리를 벌렸던 것 같은데 어느새 퍽 가까워진 거리에, 어디선가 경고음이 울려 퍼졌다.
“이, 이제 그만 돌아가야겠어요. 주신 것들은 감사히 받을게요, 전하.”
놈의 머리 위 빨간색 게이지 바를 흘끔대며 서둘러 다시 거리를 벌리려 하던 찰나.
황태자가 돌연, 붙들고 있던 손을 놓고 내 양 볼을 덥석 부여잡았다.
“억!”
나는 화들짝 놀라 버둥거렸다.
“이, 이게 무슨……! 왜, 왜 이러십니까!”
“잠깐 가만히 있어 봐.”
그 순간, 황태자가 고개를 숙여 제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시뻘건 홍채가 코앞까지 당도했다.
나는 딱딱하게 얼어붙었다.
점점 가까워지는 놈의 얼굴에 눈이 질끈 감기려던 찰나.
불현듯 양 눈가에 뜨끈한 온기가 닿았다.
“아프지 마, 공녀.”
칼리스토는 나를 내려다보며 묵묵히 읊조렸다.
“그대가 아프면, 내가 이 한 몸 바쳐서 구해 낸 보람이 없잖아.”
마치 눈물이라도 닦아 주듯, 뜨거운 엄지가 내 눈 밑을 진득하게 문질렀다.
나는 숨을 멈췄다.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그가 느닷없이 이런 돌발 행동을 하는 이유를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만 들어가.”
그는 한참 동안 그 뜻 모를 행동을 반복한 후에야 내 얼굴을 놓아 주었다.
오만하게 턱짓하는 그를 일별한 채 뒤돌아선 후에야, 막힌 숨이 팍 터져 나왔다.
* * *
방으로 돌아가는 내내, 머릿속이 혼란스럽고 복잡했다.
‘그놈이 대체 그런 짓은 왜 한 거지?’
너무 놀라서 그런지, 아직도 가슴이 요동쳐서 나는 여러 번 심호흡을 해야 했다.
시린 겨울철에 핫팩을 얼굴에 댄 듯, 아직도 눈 밑에 뜨거운 온기와 문지르는 감촉이 남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괜히 기분이 이상해져서 그 주변을 손가락으로 슬슬 긁으며 중앙 계단을 오를 적이었다.
청소를 막 마치고 내려오는 한 무리의 고용인들을 마주쳤다.
잠시 멈춰서 내게 인사를 하려던 그들이 문득, 나를 보고 기겁했다.
“헉!”
“히익!”
“흐읍.”
그러더니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것이 아닌가.
‘뭐지?’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나 이 집 고용인들은 종종 나를 보고 기겁을 할 때가 많기에,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남은 계단을 마저 오른 후 ‘벌컥’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침구 정리 중이었던 에밀리가 고개를 돌렸다.
“아가씨, 오셨…… 꺄악!”
그런데, 느닷없이 나를 보며 비명을 지르는 것이 아닌가.
나는 벌레라도 나왔나 싶어, 주변을 휙휙 둘러보며 외쳤다.
“뭐, 뭐야. 왜 그러는데?”
“어, 얼른 거울 좀 보셔요, 얼른요!”
에밀리가 허둥지둥 다가와 나를 떠밀었다.
나는 어리둥절한 상태로 그대로 욕실 안으로 들어섰고…….
곧바로 마주친 거울 안에서 좀비를 보았다.
“악! 이게 뭐야!”
소스라치게 놀라 짧게 비명 지르던 나는, 이내 허겁지겁 거울에 얼굴을 바짝 들이밀었다.
휑한 몰골 연출을 위해 눈두덩이에 발라 둔 시커먼 인조 다크 서클이 볼까지 내려와 있었다.
게다가 창백한 안색처럼 보이게끔 몇 겹으로 덧입힌 분칠이 군데군데 벗겨진 상태였다.
그것이 꼭 피부가 벗겨진 듯 괴기스러워서, 볼까지 내려온 거뭇한 아이라인과 잘 어우러졌다.
거기에 병색이 짙은 가녀린 아가씨 연기를 한답시고 입은 새하얀 잠옷 원피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정말로 되살아난 시체 같았다.
“대체 언제……!”
정신없이 내 어마어마한 몰골을 확인하던 중.
머릿속에 번뜩 섬광이 일었다.
뜬금없이 볼을 잡고, 눈가를 지그시 문질렀던 황태자.
- 요즘은 연극을 배우는 것이 귀 족의 기본 소양인가 보지?
‘그, 그 새끼!’
놈이다. 내가 분장을 한 것을 눈치챈 놈이, 일부러 얼굴을 손으로 문대 엉망진창으로 만든 것이다.
잠시나마 동요했던 내가 수치스러워서, 더는 참을 수 없었다.
“칼리스토 레굴루스, 이 미친놈아아악-!”
그로부터 한참 동안, 공녀의 방에서는 알 수 없는 괴성이 새어 나왔다.
* * *
미친 황태자놈에 대한 분노로 인해 깜빡 잊었던 것을 다시 상기한 것은 며칠 후였다.
“……뭐? 훈련에 참여를 안 해?”
나는 이른 아침 방문하여 이클리스의 소식을 전하는 집사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예. 같은 방을 쓰는 기사의 말로는, 벌써 며칠째 방 밖으로 나가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왜?”
“이유까지는 잘…….”
집사가 말끝을 흐렸다.
하긴, 그도 막 보고를 받고 내게 전달하러 온 것인데, 이유까지 알 턱이 있을까.
“……첫째 오라버니는 알고 있어?”
“아직 모르십니다.”
가장 우려되는 것이었는데, 다행이었다.
노예 신분으로는 얼씬도 할 수 없는 에카르트 기사단에 받아 준 것으로도 감지덕지한 처지였다.
그런데 제멋대로 훈련을 빼먹은 것을 기사단장인 데릭이 안다면, 공작저에서 쫓겨나는 건 일도 아니었다.
‘그런데, 정말 왜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얼마 전까지 꼬박꼬박 훈련에 참여하던 이클리스였다.
사고 치지 않고 성실하게 제 할 일을 해 온 것을 기특하게 여겨, 목검을 비롯한 선물들까지 잔뜩 떠안겼지 않은가.
“그러고 보니, 집사. 이클리스의 옷은 잘 전달했나?”
‘선물’하니 떠올랐다. 얼마 전 재단을 맡긴 그의 겨울옷들이 모두 완성된 것을.
“네. 분부하신 대로, 모든 기사들이 다 볼 수 있게끔 휴식 시간에 전달하였습니다.”
“그래? 고생했어.”
“한데…….”
집사가 머뭇거리다 말을 이었다.
“그 후에 상자를 열어 보지도 않은 채 받은 그대로 내버려 두는 중이랍니다.”
“뭐?!”
깜짝 놀라 나도 모르게 큰 소리가 튀어나왔다.
‘내가 준 선물을 거들떠도 안 보고 있다고?!’
내겐 훈련을 빠진 것보다 그게 더 심각하게 다가왔다.
‘대체 무슨 일…….’
그 순간, 번뜩 뇌리를 스치는 장면이 있었다.
얼마 전 후원에서 황태자와 만났을 때 얼핏 보았던, 숲속으로 빠르게 사라지는 누군가의 뒷모습.
‘그때 그게, 정말 이클리스였던 건가?’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집사견습 기사들이 쓰는 숙소가 어딘지 알지?”
“네. 연무장 근처에 있습니다만…….”
“안내 좀 해 줘.”
나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며 덧붙였다.
“지금 당장 이클리스를 만나러 가 봐야겠어.”
* * *
견습 기사들이 사용하는 숙소 건물은 연무장 근처 숲속에 위치했다.
모두 훈련을 나가서 그런지, 건물 주변은 텅 비어 있었다.
“이쪽으로 오시죠, 아가씨.”
집사가 먼저 입구 쪽으로 나를 안내했다.
안으로 들어서자, 깔끔하지만 좁은 복도와 계단이 이어졌다.
견습 기사들이 쓰는 숙소치고는 괜찮은 수준이었다.
그러나 빙의 후 내내 호화스러운 공작저와 황궁을 오가서 그런지, 남루한 건물이 퍽 생소하게 느껴졌다.
“몇 층이야?”
“4층입니다.”
집사가 다시 앞서 나를 안내했다.
그를 따라 계단을 오른 지 얼마쯤 지났을까.
“……와, 시발. 이게 다 얼마짜리들이냐.”
하나 남은 층계를 막 오르려던 우리는, 위쪽에서 들려오는 상스러운 소리에 걸음을 멈칫했다.
“노예 주제에 아주 복에 겨웠네, 겨웠어.”
“그 미친개가 푹 빠져서 사족을 못 쓴다며? 저번엔 무기들을 몇 궤짝씩이나 사 주더니…….”
땡땡이라도 치는 모양인지, 네댓 명이 훈련을 할 시간에 저급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누가 들어도 나와 이클리스의 이야기였다.
“야, 뭐가 복에 겨웠냐. 반반한 노예 새끼들은 밤 시중을 든다며. 그 미친개 비위 맞추느라 이놈도 얼마나 힘들겠냐.”
아래쪽에 당사자가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한 건지, 마지막 놈의 말에 와하하 웃음이 터졌다.
집사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나를 흘끔 돌아보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그런 그를 태연하게 지나쳐 계단 위를 올랐다.
층계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어느 방문 앞.
4명의 쓰레기들이 커다란 상자 하나를 둘러싼 채 두꺼운 털옷들을 들춰보며 낄낄거리고 있었다.
내가 이클리스에게 선물한 것들이었다.
“그렇게 부러우면 너희들도 외모부터 가꾸렴. 그런 돼먹지 못한 면상들로는 매춘부의 비위도 맞추기 힘들겠구나.”
여상히 읊조린 말에 웃음소리가 뚝 끊겼다.
“뭐…… 헉.”
나를 발견한 놈들의 눈이 부릅떠졌다.
신나게 지껄여 댈 때는 언제고, 너무나도 뻔하기 그지없는 반응들이 재미도 없고 식상했다.
“아. 이미 그렇게 태어났으니 그른 건가?”
나는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며 지루한 음성으로 물었다.
“그럼 내가 마법으로 얼굴을 손볼 수 있게끔 도와줄까? 말만 하렴.”
“…….”
“미친개가 너희들 얼굴 좀 물어 찢는다고 누가 뭐라 하겠니.”
“헉, 고, 공녀……!”
“들었지, 집사?”
나는 허둥지둥 내 뒤를 쫓아 올라온 집사를 돌아보며 비릿하게 웃었다.
“이것들 얼굴 외워서 책임지고 첫째 오라버니께 보내. 지껄인 말들 한마디도 빠짐없이 같이 전하고.”
이게, 네가 만든 천둥벌거숭이의 결과물이라고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