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112화
“……예, 아가씨.”
집사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허리를 깊게 숙였다.
“지, 집사님!”
내 앞에 거의 납작 엎드리다시피 하는 집사의 모습에, 기사 놈들이 입을 떡 벌렸다.
이내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는지 놈들이 헐레벌떡 다가왔다.
“오, 오해십니다! 저, 저희는 그, 그게 아니라……!”
덩치가 커다란 놈들이 한꺼번에 우르르 다가온 탓에, 복도가 순식간에 꽉 찼다.
바로 이클리스의 방으로 이동하려던 나는, 길이 막히자 오만상을 찌푸렸다.
그런 내 눈치를 기민하게 알아챈 집사가 허둥지둥 내 앞을 가로막았다.
“어허! 물러들 서게. 어느 안전이라고!”
“집사님! 그게 아니라, 저희가 한 말은 그냥……!”
놈들 중 한 명이 집사에게 변명을 고하려 했다. 하지만 고요히 고개를 젓는 집사에 의해 막혔다.
그제야 놈들이 노선을 바꿔 나를 돌아보았다.
“고, 공녀님! 다, 다 설명하겠습니다. 모두……!”
“꺼져.”
나는 앞을 막무가내로 막아서는 놈을 서늘한 눈으로 바라보며 비킬 것을 종용했다.
“역겨운 냄새 나서 말 섞기 싫으니까.”
“아, 아가씨…….”
“왜. 너도 저번에 연무장에서의 그놈처럼 공개적으로 목 졸라 줄까?”
확실히 게임 속 최고 악녀는 맞는지, 페넬로페에게는 사람의 기를 죽이는 무언가가 있었다.
빙글 웃으며 건넨 말에 산만한 덩치의 사내가 흠칫하며 물러섰다.
머뭇대던 그들은 이내 게걸음을 치며 차례대로 이동했다.
내가 복도 한가운데를 떡하니 차지하고 서 있었기 때문이다.
놈들로 인해 엉망진창이 된 선물 상자를 잠시 물끄러미 응시하던 나는, 이내 집사에게 턱짓했다.
그가 재깍 움직여 이클리스가 머무는 방문을 두들겼다.
“이보게, 이클리스.”
“…….”
“나일세, 집사. 나눌 이야기가 있으니 문 좀 열어 주겠나?”
쿵쿵쿵-.
집사가 여러 번 문을 두드렸지만 묵묵부답이었다.
몇 번의 두드림 이후에도 문이 열리지 않자 집사가 난처한 얼굴로 내게 돌아왔다.
“안에 있는 것 같습니다만…… 열쇠를 가지고 올까요, 아가씨?”
나는 잠시 고민하다, 이내 고개를 저었다.
‘에휴. 은근 까탈스럽단 말이지.’
하지만 그때 후원의 숲에서 본 인영이 이클리스가 정말로 맞는다면 여러모로 낭패였다.
나는 집사를 지나쳐 굳게 닫힌 방 문 앞에 섰다. 그리고 가볍게 손을 들어 노크했다.
똑똑-.
“나야, 이클리스.”
“…….”
“문 좀 열어 주렴.”
직접 나섰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문은 열릴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나는 잠시간의 틈을 둔 후 다시 입을 열었다.
“……걱정돼서 왔단다. 내키지 않으면 그냥 돌아갈까?”
이번에도 반응이 없다면 정말로 그만 돌아갈 생각이었다.
강제로 문을 열고 들어가면 오히려 호감도가 더 떨어질 수도 있으니까.
얼마간 서서 기다리던 나는 이윽고 등을 돌렸다.
그 순간이었다. 부스럭-.
얇고 조악한 문 너머로 작은 기척이 들리더니.
끼이익-.
영영 열리지 않을 것만 같았던 문이 천천히 열렸다.
그 소리에 멈칫하고 다시 뒤를 돌자, 겨우 한 뼘만큼 열린 문틈이 보였다.
커튼을 쳐 둔 건지 훤한 대낮임에도 그 안이 컴컴했다.
나는 다시 집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까 그놈들, 첫째 오라버니께 잘 인솔해 주고 그만 일 봐.”
“하오나, 어찌 아가씨 홀로…….”
집사가 우려스럽다는 듯 얼굴을 굳혔다.
아무리 신분 낮은 노예라도, 사내들이 기거하는 곳에 어찌 귀족 여식 홀로 내버려 두냐는 의미였다.
“오래 있을 생각은 아니니 걱정 마.”
“그러면 지시하신 일을 마치고 바로 돌아와 건물 앞에서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그러든가. 수고해.”
대충 고개를 끄덕이자, 집사가 묵례 후 서둘러 계단을 내려갔다.
나는 그가 완전히 사라진 후 천천히 손을 뻗어 문을 열었다.
끼이익-. 녹슨 경첩 소리와 동시에 문이 조금 더 열렸다.
예상대로 커튼을 쳐 뒀는지, 내부가 어두컴컴했다.
그러나 낡은 커튼에는 구멍이 곳곳에 뚫려 있어, 그 사이로 햇빛이 쏘아져 들어왔다.
덕분에 주변을 식별하는 데 별 무리 없었다.
나는 잠시 문틀에 선 채 눈을 굴려 내부를 확인했다.
침상 두 개와 그 사이를 잇는 탁상만이 덜렁 놓여 있는 협소한 공간이었다.
덕분에 토라진 남주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이클리스.”
나는 작게 속삭이듯 그를 부르며, 방 안으로 한 걸음 떼었다.
창가 측에 놓인 침상 위의 이불이 볼록 솟아 있었다.
그쪽으로 다가서던 나는 일순 멈칫했다.
그가 누워 있는 침대 근처, 탁상 위와 바닥에 웬 꽃송이들이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었기 때문이다.
반쯤 시들어 있는 그것들 때문인지, 방 안은 향긋하면서도 케케묵은 오묘한 냄새가 났다.
나는 꽃들을 피해 침상 끄트머리에 힘겹게 걸터앉았다.
그리고 불룩한 이불 위에 살포시 손을 얹으며 이클리스에게 말을 걸었다.
“주인이 왔는데 얼굴 보여 주지도 않을 거니?”
“…….”
역시나 돌아오는 대꾸가 없자 걱정이 일었다.
나는 이불 위에 얹은 손을 살살 흔들었다.
“혹시 어디 아파?”
“…….”
“이클리스.”
이클리스는 머리끝까지 이불을 뒤집어쓴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말도 못 하고 홀로 끙끙 앓느라 훈련도 참여하지 못한 거 아냐?’
번뜩 스치는 가정에,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안 되겠어. 의원을 불러올 테니, 잠시 기다…….”
황급히 방을 벗어나려고 할 때였다.
옷자락을 붙드는 미약한 손길이 느껴졌다.
나는 우뚝 걸음을 멈췄다.
다시 침상을 돌아보니, 이불 사이에서 삐쭉 빠져나온 팔이 치마 끝을 꽉 붙들고 있었다.
“가지…… 마세요.”
“…….”
“그냥 옆에 있어 주세요, 주인님.”
이불 속에서 무언가를 억누르는 듯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얘가 이렇게 약한 소리를 한 적이 있던가.’
멍하니 치맛자락을 붙든 팔을 내려다보던 나는, 이내 순순히 다시 침상에 앉았다.
가지 않겠다는 의사임에도 불구하고 치맛자락을 붙든 손이 떨어질 줄 몰랐다.
나는 손을 뻗어 이번에는 이불 위가 아닌, 나를 붙들고 있는 타인의 손등을 살짝 겹쳐 잡았다.
열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SYSTEM〉 [이클리스]의 호감도를 확인하시겠습니까?
[800만 골드 / 명성 200]
손을 잡자마자 곧바로 하얀 네모 창이 허공에 떠올랐다.
호감도를 확인하고 싶었지만, 이불에 가려져 있어 게이지 바도 보이지 않았기에 그냥 관뒀다.
다행히 감기 같은 건 아닌지, 손바닥 아래에서 미지근한 온기가 느껴졌다.
“……왜 훈련도 안 나가고 이러고 있어. 걱정스럽게.”
나는 부러 나긋나긋한 목소리를 내었다.
몰빵 남주의 심기가 썩 좋아 보이지 않았기에.
다행히 이번에는 즉각 반응이 돌아왔다.
“……진짜로 절 걱정하신 게 맞아요?”
그러나 긍정적인 반응은 아니었다.
“습관처럼, 절 달래려고 하는 말이 아니고요?”
날이 선 목소리에 나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잠시 할 말을 찾던 나는, 그의 손등을 살며시 쓰다듬으며 말했다.
“걱정되지 않았으면 여기까지 내가 직접 오지도 않았겠지, 이클리스.”
“……그날.”
“…….”
“절 보시고도 바로 찾아오지 않으셨잖아요.”
역시, 그날 잘못 본 게 아니었다.
나는 변명을 하기 위해 입을 벌리며, 무엇이 이클리스의 심기를 건드렸는지 찬찬히 고민했다.
“일이 좀 있어서 바로 올 수 없었어.”
“…….”
“날 만나러 왔던 거니?”
그 말을 내뱉고 나자, 그가 토라진 이유를 좀 알 것 같았다.
‘모처럼 만나러 왔는데 황태자와 있으니까 기분 상한 거로구나.’
어쨌든 나는 지금 나를 향한 호감을 올리는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 중이었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 ‘86%’였으니, 이클리스가 내게 어느 정도 연심을 품게 된 것이다.
‘연심이라니…….’
새삼 뒤늦은 깨달음에 나는 좀 놀랐다.
호감도를 올리기 급급해, 그가 나를 이성적으로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 깊이 고민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럼 검붉은 색이 연심을 뜻하는 건가?’
이클리스의 게이지 바 색을 떠올리며 고개를 갸웃거리던 나는, 너무 틈이 길어졌다는 걸 상기하고 서둘러 말했다.
“그런 줄 알았으면 일을 모두 제치고 한달음에 올 걸 그랬네.”
의도한 대로 꽤 다정하고 상냥한 음성이 튀어나왔다.
당장은 토라진 남주를 풀어 줘야 했으므로.
“선물 상자를 방 안에 놓을 수 없어서 짜증 났어요.”
그런데, 이클리스는 뜬금없는 소리를 웅얼거렸다.
“……응?”
얼떨떨하게 되묻던 나는, 곧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차렸다.
바깥에 내놓아져 있던 내가 준 선물.
부피가 큰 겨울옷을 여러 벌 담은 만큼 상자의 크기도 컸다.
때문에 작은 방 안에 들여놓을 수 없었다는 소리였다.
“주인님은 제가 받고 기뻐하는 모습을 좋아하시니까.”
“…….”
“감사하다는 말을 하러 가고 싶었는데…….”
이클리스의 말은 다소 뒤죽박죽이었다.
무언가 털어놓듯 띄엄띄엄 두서없이 중얼거리던 그가, 천천히 뒤집어쓴 이불을 걷어 내렸다.
낡은 커튼 새로 새어 들어오는 희미한 빛 아래, 밀랍 인형처럼 곱상하고 희멀건 얼굴이 드러났다.
그와 동시에 그가 이불 속에 숨겨 뒀던 손을 불쑥 내게 내밀었다.
“……저는 주인님께 줄 수 있는 게 이런 것밖에 없어요.”
끄트머리가 갈색으로 변색된 채 늘어진 반쯤 시든 꽃송이들.
그것들은 동그랗게 엮여 아기자기한 화관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아…….”
그제야 그 꽃이 어떤 것이었는지 기억났다.
며칠 전 부슬비가 내리던 날, 유리 온실에서 이클리스와 함께 본 흰 들꽃이었다.
나는 다시 시선을 들어 완전히 드러난 이클리스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 순간, 모든 사고가 정지했다.
나는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것이 믿기지 않아 멍하니 입을 벌렸다.
이클리스가 내게 초라한 화관이나마 선물로 주려 했던 것 때문이 아니라.
“……그 사람 누구예요?”
“…….”
“뭘 받고 그렇게 환하게 웃으셨던 거예요?”
흥건하게 젖어 있는 잿빛 눈동자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