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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엔딩은 죽음뿐-113화 (113/243)

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113화

마주치고 있는 회갈색 동공에 처음 보는 격정들이 소용돌이쳤다.

반짝이는 것들이 그의 볼을 타고 아롱아롱 흘러내렸다.

그럼에도, 이클리스는 언제나처럼 변함없이 무표정했다. 감정이라곤 일말도 없는 사람처럼.

나는 그래서 바로 알아차릴 수 없었다.

그가 지금 울고 있다는 사실을.

“……이클리스.”

인형같이 말간 얼굴 위로, 거짓말처럼 흘러내리는 눈물들.

나는 그 이질적인 모습을 한동안 멍하니 바라보다가, 가까스로 목소리를 쥐어짰다.

“너…… 지금 우니?”

믿기지 않는다는 내 심정을 고스란히 담은 듯, 말끝이 떨렸다.

“…….”

이클리스는 숨소리 하나 내지 않은 채, 그저 눈물만 뚝뚝 흘리며 나를 바라볼 뿐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머리 위, 선명한 검붉은 색 호감도 게이지 바가 위태롭게 반짝이기 시작했다.

덜컥, 가슴이 내려앉았다.

나는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그의 뺨에 가져다 댔다.

“울지 말렴, 이클리스. 왜 울고 그래.”

엄지로 흥건한 물줄기를 쓸 듯 닦아 주며, 아이 어르듯 울음을 달랬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여전히 떠 있는 시스템 창의 [800만 골드]를 선택했다.

이윽고 호감도 게이지 바 옆 [호감도 확인하기]가 수치로 변했다.

[호감도 84%]

‘……뭐야?’

나는 선명한 흰색 숫자들을 보고 날카로운 숨을 들이켰다.

‘왜, 왜 84%지?’

머릿속이 갑자기 미친 듯이 혼잡해졌다.

유리 온실에서 마지막으로 확인했을 때, 분명 ‘86%’였었다.

그것을 똑똑히 기억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이클리스의 호감도가 처음으로 하락했다.

“……말해 주세요.”

그때, 눈물을 닦아 주던 것도 멈추고 그대로 굳어 있는 나를 보며 그가 입을 열었다.

“그 남자 누구예요?”

꽉 억눌린 듯한 음성에 그제야 퍼뜩 정신이 들었다.

“……그분은 황태자 전하셔.”

나는 고민할 새도 없이 사실을 털어놓았다.

그러자 이클리스의 동공이 한차례 흔들렸다.

“황태자…… 요?”

“그래.”

눈물을 흘리면서도 변함없던 그의 낯빛이, 그 순간 기묘하게 움텄다.

나는 그가 왜 그러는 건지 바로 알아차렸다.

황태자는 그의 고국을 멸망시킨 주범이었으니까.

“전하께서 내게 전해 줄 게 있어서 공작저에 잠깐 들르신 거야. 난 그걸 받은 거고.”

“뭘 전해 주러 왔는데요?”

말을 끝맺기 무섭게 이클리스가 득달같이 물었다.

“황궁에서 보관하던 고대 유물과 그에 대한 자료들을 받았단다.”

나는 순순히 대답하되, 다이아몬드 광산을 받았다는 사실은 숨겼다.

말해 봤자, 득 될 게 없었으므로.

대신 납득될 만한 이유를 적당히 덧붙였다.

“사냥 대회 우승 포상으로 원하는 것을 한 가지 요청할 수 있었거든.”

“……왜 시종을 시키지 않고 그 남자가 그걸 직접 주인님께 가져다줘요?”

“이클리스.”

그러나 이클리스는 별로 납득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게다가 제국의 황태자임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남자’라는 무례한 발언을 서슴없이 내뱉었다.

나는 깜짝 놀라 그를 부르다가 흠칫했다.

눈조차 깜빡이지 않고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그가, 어쩐지 조금 섬뜩하게 느껴졌다.

무슨 답이 좋을지 머리를 굴리던 나는 망설이는 것처럼 답했다.

“……내가 아팠어.”

이보다 더 좋은 변명거리가 생각나지 않았다.

예상대로였다. 놀란 듯, 이클리스의 눈이 천천히 커졌다.

“아프…… 셨어요?”

“그래서 황궁에 갈 수 없었고, 전하께서 볼일을 볼 겸 들러서 전달해 주신 거란다.”

“…….”

“말하지 않으려 했는데…… 그게 널 바로 만나러 오지 못한 이유야.”

마침내 집요하게 되돌아오던 질문이 멈췄다.

“…….”

이클리스는 쉬이 말을 꺼내지 못했다.

무슨 대답을 꺼내야 할지 모르는 사람처럼 입술을 달싹거리던 그는, 한참 후 속삭이듯 물었다.

“많이…… 많이 아프셨어요?”

“사냥 대회 때 너무 무리를 했는지 감기 몸살에 걸렸어.”

“…….”

“그래서 침대 밖으로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었지.”

아무렇지도 않게 거짓을 읊조리는 내 모습이 그에게는 어떻게 비춰지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손 밑에 닿아 있는 미지근한 피부가 움찔거리는 것이 느껴지고…….

“왜.”

그의 뺨을 감싼 손을 적시는 물줄기가 더욱더 많아지기 시작했다.

“왜 주인님은, 저한테는…….”

“…….”

“저한테는 매번 한 마디도 언질을 주지 않으세요?”

“이클리스. 그건…….”

“다른 사람을, 집사님을 보내서 알려 주실 수도 있었잖아요.”

여전히 무미건조한 표정과는 달리 서러움이 가득 담긴 어투에 나는 어쩔 줄을 몰랐다.

그렇게 따지고 물으니 할 말이 없었다.

그런 내 모습에 혼자 결론을 지었는지, 시든 화관을 움켜쥔 손에 와락 힘이 들어갔다.

“저는, 저는 주인님께 그 정도 가치도 안 되는…….”

“쉬이, 비약하지 마렴.”

나는 허겁지겁 그를 다시 달랬다.

“1등을 차지해서 당당하게 호강을 시켜 준다 해 놓고, 골골대는 모습을 보이면 내 체면이 뭐가 되겠니. 응?”

“…….”

“그리고 내 선물, 구기지 마.”

나는 이클리스가 쏟아낸 눈물로 흥건해진 손을 내려, 화관을 짓뭉개다시피 하고 있는 그의 손을 겹쳐 잡았다.

“망가지고 있잖아.”

“이건 이미 다 시들어서 쓰레기에 불과해요. 버려야…….”

“내 선물이니 그건 내가 판단할 일이야.”

내게서 손을 빼내 그것을 뒤로 숨기려 드는 이클리스를 빠르게 저지했다.

그리고 꽉 움켜쥔 그의 손가락을 억지로 펼쳤다.

사실 그가 정말로 주기 싫어 나를 뿌리치려면 얼마든지 뿌리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내게 마지못해 져 준다는 듯 손에 힘을 풀었다.

‘귀엽게 굴긴.’

기분이 조금은 풀린 것 같아 보여, 나는 속으로 안도했다.

이윽고 그의 손아귀에서 흰 꽃 뭉치들을 꺼내는 데 성공했다.

얼마나 세게 쥐었는지, 이미 절반이 뭉그러져 너덜거렸다.

꽃줄기가 조금만 더 질기지 않았더라면 이미 다 뚝뚝 끊어져, 그의 말대로 버려야 하는 수준에 이르렀으리라.

나는 혀를 차며 더는 화관이라 부를 수 없는 화관을 조심스럽게 간추렸다.

이내 시들고 다 뭉그러진 그것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어때. 잘 어울리니?”

이클리스가 만든 화관을 머리 위에 쓴 채, 할 수 있는 한 가장 환히 웃으며 그를 돌아보았다.

황태자에게 스크롤을 받으며 웃었다는 그의 목격담을 상기했기 때문이다.

“…….”

이클리스는 한동안 말없이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왜, 별로야?”

나는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이클리스는 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

“너무…… 아름다워요, 나의 주인님.”

그가 혼잣말을 내뱉듯 중얼거렸다.

눈물로 젖은 잿빛 눈동자가 일순 혼탁해진 것 같다는 착각이 일었다.

다시 확인하려 했으나, 반짝이는 검붉은 색의 호감도 게이지 바가 확 눈길을 끌었다.

‘칭찬이니, 더 떨어지지는 않겠지.’

2% 하락했던 호감도를 되뇌며, 나는 사르륵 눈을 접어 웃었다.

“다행이구나. 고마워.”

“…….”

“내가 좋아하는 꽃이라고 말해 줬던가?”

기억 안 나는 척 태연하게 묻자, 지금까지 내내 들려 있던 이클리스의 고개가 떨궈졌다.

대답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눈 밑이 미미하게 붉어진 것이 보였다.

나는 전보다 더 짙은 미소를 지으며 입을 뗐다.

“선물을 받았으니, 답례를 해 줘야겠지. 뭐 더 필요한 거 있니?”

이렇게 물으면 그는 으레 고개를 저었다.

아니면 발칙하게도, ‘자신을 자주 찾아 달라’고 호소하며 기사단 내의 불안한 입지를 다지려 했다.

“저는…….”

하지만 오늘의 이클리스는,

“저는 주인님의 하나뿐인 기사가 되고 싶어요.”

둘 다 아닌, 뜬금없는 것을 요구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예상치 못한 답변에, 나는 이클리스를 찬찬히 다시 살폈다.

그가 우는 것에만 정신이 팔려 미처 보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저걸 계속 차고 있었단 말이야? 잘 때도?’

개인적인 공간에서마저 내가 준 상아 조각들을 목에 걸고 있을 줄은 몰랐다.

허름한 옷차림과 대조되는 화려한 목걸이를 바라보며 나는 한발 늦게 말했다.

“넌 이미 내 기사야. 하나뿐인 전사이기도 하고.”

“…….”

“그렇지 않다면 내가 왜, 네게 잡은 사냥감들을 몽땅 바쳤겠니.”

마치 구애라도 하는 것처럼 모호하게 말하며, 다시 사르륵 웃었다.

내가 무엇을 응시하는지 알아차린 걸까.

이클리스가 제 목에 걸고 있던 목걸이를 슬쩍 내려다보고는 답했다.

“사실 제게 이런 건 필요 없어요, 주인님. 더는 안 주셔도 돼요.”

“……뭐?”

나는 그 말에 당황했다.

내가 그에게 목걸이를 건네주었을 때 그는 그것에 입을 맞췄고, 호감도가 대폭 상승했다.

지금까지 선물을 빙자한 금전적인 지원을 아낌없이 퍼 줄 때마다, 호감도 어김없이 상승했다.

나는 그것에 무척 만족했다. 이클리스 또한 당연히 그럴 줄 알았다.

그런데 지금 그의 투정은 꼭, 내가 억지로 그것들을 떠안기기라도 한 것 같지 않은가.

“그럼 넌, 뭐가 갖고 싶은 건데?”

내가 뭔가 놓친 게 있는 걸까?

차오르는 불안감에 나는 다급히 물었다.

“저는…….”

이클리스는 머뭇거리다가, 이내 명료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저도, 검술 스승을 갖고 싶어요, 주인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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