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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엔딩은 죽음뿐-114화 (114/243)

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114화

“……스승?”

생각지 못한 요구에 나는 멍하니 눈을 깜빡거렸다.

“하지만 넌…… 진검을 사용할 필요가 없다고 했잖니.”

과거 어느 때가 떠올랐다.

그가 기사단 내에서 따돌림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난 후, 함부로 무시당하지 않게 하기 위해 잔뜩 목검과 훈련용 물품들을 사 주었을 때였다.

- 주인님, 저는 이걸로 충분해요.

- 진검을 가지고 있어 봤자 쓸 일이 없을 것 같아서요.

- 노예는 정식 기사가 될 수 없으니까요. 그러니 수련을 하는 데 필요한 목검만 있으면 됩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클리스는 검술에 그다지 미련이 없어 보였다.

오로지 공작저에 붙어 있는 데에만 열중하는 것 같았다.

- 저를 위한다면 차라리 모르는 척 가만히 계세요. 아무렇지도 않으니까.

그런 그에게 굳이 ‘고대 마검’을 쥐여 준 것은, 모두 내 안위를 위해서였다.

내게 별다른 충성심도, 애정도 없어 보이는 것에 기인한 불안감.

회상에 잠겨 있던 나를 나지막한 목소리가 깨웠다.

“……분명 그랬는데.”

“…….”

“생각이 바뀌었어요.”

이클리스가 젖은 눈을 나와 맞추며 또렷하게 읊조렸다.

“그렇게 하다간 주인님께서 명령한 것을 지키기는커녕, 훈련에서 계속 뒤떨어질 것 같아서.”

“…….”

“가르침을 주실 분이 필요해요.”

‘명령?’

한순간 뭘 말하는지 아리송해졌던 나는 곧바로 이어지는 말에 무슨 명령인지 떠올렸다.

“열심히 해서, 조금이라도 쓸 만한 검 실력을 만들게요.”

“이클리스. 그 말은…….”

“노예 신분을 벗어나지 못해도 괜찮아요.”

변명을 하기 위해 입을 열던 나를 막아서고, 이클리스는 애원했다.

“그냥 주인님께서 주신 검을 쓰고 싶어요. 그렇게…… 해 주실 거죠?”

그는 기묘하게 일렁거리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런 그를 보자니, 기분이 이상해졌다.

‘……언제부터 이렇게 변한 거지?’

언제나 건조한 눈을 한 채 표정이 없던 이클리스는, 최근 들어 의미 모를 감정의 파편들을 조금씩 내비치기 시작했다.

게다가 딱히 바라는 게 없었던 그가, 이토록 명확하게 무언가를 요구했다는 자체가 충격으로 다가왔다.

나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쭉쭉 상향세만 보이던 그의 호감도가 처음으로 주춤거렸다.

여주가 와서 알아서 해 줄 거란 생각은 고쳐먹어야 했다.

“……그러면 앞으로 훈련에 잘 참여할 거지?”

나는 이곳을 찾은 이유를 되새기며 그에게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그가 의아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약속해.”

“…….”

“이번처럼 무단으로 빠지는 일 없도록 하겠다고.”

내가 탈출할 때까지 제발 그 자리에 가만히 있어 달라고.

이클리스는 내가 내민 새끼손가락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러더니, 이내 제 손가락을 엮어 걸며 눈을 내리깔고 수줍게 답했다.

“……약속할게요.”

이클리스의 손은 나보다 훨씬 크고 길쭉했다.

넝쿨처럼 손가락을 강하게 휘감는 타인의 온기를 느끼며, 나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

“네가 원하는 게 그거라면, 들어줄게.”

그게 과연 가능할지 확신도 못하면서, 나는 호언장담했다.

호감도가 하락한 남주 앞에서, 기사단은 내 권한 밖이라는 말을 할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았기에.

〈SYSTEM〉 [1000만 골드]를 차감하여 [이클리스]의 호감도를 확인합니다.

(남은 보유 자금 : 70,000,000 골드)

나는 피어나는 꽃처럼 화사하게 웃었다.

“그러니 울지 말렴. 알았지?”

[호감도 88%]

앞으로 12%.

내게는 그가 원하는 게 무엇이든, 무조건 들어주는 일만이 답이었다.

* * *

깊은 생각에 잠긴 채 천천히 숙소 건물을 빠져나오던 때였다.

“아가씨.”

입구에 다다랐을 즈음, 불쑥 누가 나를 불렀다.

“아, 집사.”

“이야기는 잘 나누셨습니까?”

“응, 뭐…….”

나는 대충 얼버무리며 화제를 돌렸다.

“그놈들은?”

“지시하신 대로 이행하였습니다.”

“그래? 수고했어.”

솔직히 엿이나 한번 먹으라고 한 것이지 별 기대 없었다.

어차피 데릭 놈은 보지 않았으니 내 말을 별로 신뢰하지도 않을 것이다.

‘믿는다 해도 연무장에서 좀 굴리는 걸로 퉁 치겠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저택으로 가는 길에 오르던 차.

“한데…….”

“음?”

“아까 일과 관련해서 소공작님이 잠시 보았으면 한다고 전언하셨습니다.”

집사가 예기치 못한 말을 더했다.

“……첫째 오라버니가?”

떨떠름하게 되묻던 나는 잠시 고민했다.

아직 생각과 계획을 다 정리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오늘 일이 흐지부지될 때보다 터졌을 때 빌미 삼는 편이 좋았다.

나는 집사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바로 가지.”

* * *

데릭이 사용하는 집무실은 공작의 집무실이 있는 쪽과는 정반대 방향, 저택의 서쪽에 위치했다.

집사의 뒤를 따라 걸음을 옮기던 나는 연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생각해 보니 이쪽으로는 와 본 적이 없어 생소하기 그지없었다.

얼마 후, 집사가 커다랗고 고풍스러운 양 문 앞에 멈춰 섰다.

똑똑-.

“소공작님. 페넬로페 아가씨 오셨습니다.”

“들여보내.”

끼이익- 집사의 손에 문이 열렸다.

나는 가벼운 긴장감을 가진 채 안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게임 일러스트를 통해 몇 번 본 적 있었지만, 직접 와 본 데릭의 집무실은 퍽 낯설었다.

주인의 냉혹한 성격을 보여 주듯, 집무실은 무척이나 삭막하고 절제되어 살풍경해 보였다.

안으로 들어서는 그 짧은 순간 내부의 감상을 마친 나는, 불현듯 멈칫했다.

‘……저게 뭐야?’

환한 정오의 햇살이 들이닥치는 통창 앞 창틀.

삭막한 집무실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는 아름답게 세공된 새장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난생처음 보는 화려한 새가 들어 있었다.

“삐요, 삐요오-.”

횃대에 앉아 있던 새가 낯선 이를 경계하듯 ‘푸드덕’ 날개를 퍼덕였다.

그와 동시에 깃털 여러 개가 하늘 하늘 새장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 모습이 꼭, 진달래꽃이 휘날리는 것처럼 예뻤다.

‘저놈이 저런 애완동물을 키운다고?’

저 더러운 성격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심미안이 놀라웠다.

새장 안의 진분홍빛 새에게서 시선을 떼고 고개를 막 돌리던 찰나였다.

시리도록 푸른 눈과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다.

새의 주인은 서류가 잔뜩 쌓여 있는 책상에 앉아 안으로 들어서는 나를 고요히 응시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사냥 대회 이후 처음 보는 거네.’

여전히 주황색인 호감도 게이지 바가 선명하게 보였지만, 별로 신경 쓰이지는 않았다.

나는 책상과 일정 거리를 두고 걸음을 멈췄다.

놈과 내 사이에 잠시 냉랭함이 감돌았다.

하지만 아랫사람은 나였으므로, 나는 슬쩍 드는 반발심을 억누르고 고개 숙여 인사했다.

“부르셨다고요.”

놈이 고개를 까딱였다. 남매간의 인사라기엔 퍽 성의 없고 사무적이기 그지없었다.

“잠깐 앉아 있어라. 일이 아직 남아서, 마저 끝내고 대화하지.”

데릭이 뒤쪽에 있는 응접용 테이블을 턱짓하며 말했다.

새장이 있는 통창 앞이었다.

사람을 불러 놓고 저는 일을 하겠다는 행태가 괘씸했지만, 나는 순순히 몸을 돌려 그쪽으로 향했다.

새를 구경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삐요, 삐요. 삐요오-.”

다가오는 나를 보며 새가 또 한 번 날갯짓을 하며 경계했다.

그래서 나는 새장 가까이 다가가지 않고, 그냥 그 앞 소파에 앉아 구경했다.

이름 모를 새는 마치 구미호처럼 진분홍색의 구불거리는 꽁지를 세우고 있었다.

동물임에도 참 고아한 자태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움직임이 있을 때마다 새의 몸에서 반짝반짝 빛이 감도는 게 아닌가.

‘뭐지?’

자세히 보니 진분홍빛 털을 제외한 부리와 발톱, 눈마저도 정말로 특이한 모양새였다.

꼭 다이아몬드처럼 햇빛에 반사되어 오색찬란하게 빛이 나는 것이다.

‘대박. 완전 신기해.’

그중 가장 돋보이는 것은 영롱한 보석안이었다.

넋을 잃고 아름다운 새의 자태를 구경하는 중이었다.

문득, 옆에서 팔이 쑤욱 튀어나오더니.

달칵-.

“차를 들겠나?”

누군가가 찻잔을 내 바로 앞,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흠칫 고개를 들자, 막 상체를 든 데릭이 소파를 빙 돌아 맞은편으로 가는 중이었다.

“아니요.”

예의상 내어준 찻잔이 무색하게, 곧장 거절했다.

한가하게 놈이랑 차나 들자고 온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맞은편에 앉은 데릭은 내 대답에 잠시 멈칫했다.

그리고 이내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제 잔에 주전자를 기울였다.

쪼르륵-. 직접 우린 건지 아니면 항시 준비해 놓은 건지, 불그스름한 액체에서는 모락모락 김이 났다.

달칵, 찻주전자를 내려놓으며 놈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기사들과 또 마찰이 있었다지.”

“네.”

나는 지체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집사에게 들으셨겠지만, 제가 먼저 시비를 건 것도 아니고, 따로 보복한 것도 없어요.”

변명하는 것 같아서 말하기 썩 마뜩잖았다.

그러나 이미 한 번 몽땅 내 잘못으로 몰린 경험을 겪었으니 별수 없었다.

게다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선점을 잘해야 했다.

때문에 나는 억지로 입을 열었다.

“게다가 무단으로 훈련에 빠진 것 같아 보였기도 하고요.”

“…….”

“나중 가서 와전될 수도 있으니 이런 일이 있었다는 것 정도를 미리 말씀드리려고…….”

“됐다.”

그런데 데릭이 불쑥 손을 들어 내 말을 끊었다. 그러고는.

“넌 어떤 처벌을 원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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