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115화
“……처벌이요?”
“그래.”
데릭이 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훈련을 무단이탈한 것도 모자라 상스럽게 네 험담을 하고 있었다 하지 않았나.”
“…….”
“네가 원하는 것을 최대한 반영할 테니 말해.”
나는 의아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언제부터 내 말을 신경 썼다고?’
물론 진짜 페넬로페였다면 ‘그놈들을 당장 죽여요!’ 하고 난리를 부렸을지 모른다.
하지만 난 그럴 생각이 없었다. 언제 또 반복될지 모를 일화였다.
게다가 오늘은 그것을 빌미 삼아 기회를 만들려는 것뿐이니까.
“제 의견이 중요한가요? 그냥 놔두세요.”
“……뭐?”
“험담 좀 한 게 뭐 대수겠어요. 제 평판이 원래 좋지 않은 것을요.”
“…….”
어깨를 으쓱이며 여상히 대답하자, 데릭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는 한동안 침묵하다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저번에 마크란 놈들을 파면시켰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을 텐데.”
“네. 들었어요.”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아차 싶어 사근사근 덧붙였다.
“굳이 그렇게 해 보았자, 기사들의 태도가 달라지진 않더라고요. 물론 그것 또한 제가 제대로 행실하지 못한 탓이겠지요.”
“…….”
데릭은 다시 입을 꾹 다물었다.
그 순간, 내게로 향해진 푸른색 눈이 한차례 흔들린 것 같다는 착각이 일었다.
그럴 리 없을 테지만.
나는 신경 쓰지 않고 곧장 목적을 이야기했다.
“기사들의 처벌은 괜찮아요. 대신, 부탁드릴 게 있어요.”
“……뭐지?”
“이클리스에게도 검술 스승을 붙여 주세요.”
“뭐?”
예상치 못한 말이었는지 그의 미간에 깊은 골이 새겨졌다.
“노예는 기사가 될 수 없다. 너도 그 정도는 알고 있을 텐데.”
“정식 기사는 될 수 없더라도, 명색이 제 호위 기사인데 훈련에서 뒤처지게 할 수는 없잖아요.”
“그래, 네 호위.”
달칵. 그가 문득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았다.
“안 그래도 그 노예의 처우에 관해 이야기를 나눌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어떤…… 이야기요?”
“이제 말장난은 그만하고, 정식 호위 기사를 뽑아서 곁에 두고 다녀라.”
“……네?”
“1사단에서 실력이 괜찮은 놈들을 몇 명 추려 두었다.”
나는 순식간에 뒤바뀐 화제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이클리스의 스승을 붙여 달라는 말에서 갑자기 웬 호위……?’
데릭은 이미 확정된 사실을 통보하는 것처럼 거침없이 말을 이었다.
“집사를 통해 인적사항을 보낼 테니 네가 보고 직접 마음에 드는 놈들로…….”
“잠시만요. 잠시만요, 소공작님.”
나는 곧바로 정신을 되찾고 그의 말을 막아섰다.
“말장난이라니요? 제 호위 기사는 이클리스 하나뿐인걸요.”
놈은 내가 제 말을 멈춘 것이 기분 나쁜지, 썩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축제 때 네가 그 노예에게서 받은 도움에 대한 보상은 그간 넘치도록 베풀었다고 보는데.”
“무슨 보상이요?”
“네가 끼고도는 것도, 노예 주제에 분에 겨울 만큼 퍼다 바치는 것도 모두 묵과해 주었지 않느냐.”
“…….”
나는 할 말을 잃고 물끄러미 놈을 바라보았다.
내가 살아남기 위해 이클리스에게 절절매는 것이, 놈의 눈에는 소꿉장난을 하는 것처럼 비쳤다는 것이 조금 충격이었다.
결국, 이클리스를 호위로 삼겠다는 내 말은 처음부터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는 소리지 않은가.
입매를 굳히는 나를 보며, 데릭이 목소리를 한결 누그러뜨렸다.
“저택에서 내쫓겠다는 소리가 아니다. 그 노예와 그만 거리를 두란 소리이지.”
“…….”
“기사단 내에서 너와 그 노예에 관한 눈초리나 소문이 좋지 않아. 그러니 오늘 같은 일이 자꾸 벌어지는 게 아니냐.”
“아니요. 기사단 내에서 이클리스의 대우가 형편없으니 오늘 같은 일이 발생하는 거지요, 소공작님.”
나는 그의 책임 전가를 짧게 일축했다.
데릭은 잠시 멈칫하더니 차가워진 눈으로 나를 쏘아보았다.
“노예의 처지가 어디에서나 그런 것이지.”
“그러나 동시에 제 하나뿐인 호위 기사지요.”
“페넬로페 에카르트.”
틈을 두지 않고 곧장 대꾸하는 내 모습에 데릭이 서늘하게 이름을 불렀다. 경고였다.
그러나 나는 개의치 않고 자조적으로 웃었다.
“공녀의 호위 기사에게 스승조차 없으니 얼마나 우습게 보이겠어요. 자연히 그 주인도 우습게 여겨지는 게 아니겠어요.”
“그러니 새 호위 기사들을 배치해 준다고 하지 않았나.”
“그들이 원한다고 하던가요?”
“…….”
“아니면, 가문 내에서 바닥을 치는 제 입지를 되짚어 주시는 것을 제가 지금 알아듣지 못하고 있는 건가요?”
얼마나 입지가 형편없으면 호위기사와 공녀의 염문설이 나돌아다니며, 그를 해명하기 위해 호위 기사까지 갈아치우냐는 뜻이었다.
그것을 알아차렸는지, 데릭의 턱이 꽉 단단해졌다.
“너…….”
놈은 화를 참는 건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건지, 여러 번 입술을 달싹였다.
이윽고 그가 깊이 틀어 잠긴 듯한 목소리를 내었다.
“……그런 게 아니다, 페넬로페.”
꽉 맞물린 잇새로 의외의 답변이 새어 나왔다.
“그게 아니라…… 재판 이후로 네게도 호위 기사가 여러 명 필요하다고 판단했을 뿐이야.”
“…….”
“엘렌 후작의 표적이 될 수도 있으니.”
나는 놈의 말에 일그러질 뻔한 표정을 가까스로 다잡았다.
귀족들에게 석궁을 난사한 천둥벌거숭이로 몰 때는 언제고, 왜 지금에서야 그런 판단을 한단 말인가.
‘내가 진짜 페넬로페였으면 암살자를 마주쳤을 때 벌써 죽었어.’
호위도, 시녀도 하나뿐인 페넬로페는 애당초 사냥 대회에서 여러 번 죽을 운명이었던 것이다.
“……그러면 제가 말한 대로 해 주세요.”
나는 치밀어 오르는 감정들을 억누르며 다시 한번 요구했다.
“저는 저를 무시하는 기사 같은 거 필요 없어요.”
“…….”
“그렇게 제가 걱정되시면, 이클리 스에게 검술 스승을 붙여 주고 이름 뿐인 호위가 아니라 제대로 된 호위 노릇을 할 수 있게 만들어 주세요.”
“…….”
“그렇게 해 주실 거죠?”
데릭은 지금까지와는 달리 칼같이 내 말을 거절하지 않았다.
오늘을 포함하여, 내가 그간 당해 온 저택 내의 형편없는 대접들을 빌미 삼아 요구하는 중이었으니까.
철두철미한 소공작에게 언제나 애물단지 취급을 받던 나는, 최근 들어 별다른 사고를 치지 않았음에도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따로 개선해 달라 요구하지 않았다.
오늘과 같이 진짜 필요한 것을 요구할 때를 대비하기 위해서.
데릭은 한참이 지나서야 깊은 한숨을 내쉬며 가까스로 허락했다.
“……알았다.”
한시름 놓였다. 그와 동시에 그간 받아 온 고용인들의 푸대접마저 이용해야 하는 처지가 더없이 비참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알아 둘 게 있다. 다른 견습 기사들처럼 가문 내의 기사들을 스승으로 붙일 수는 없다.”
그때, 데릭이 퍽 착잡해 보이는 음성으로 문제점을 지적했다.
“지금은 제국에 귀속된 노예일지라도 놈은 패전국 출신이다. 적에게 검술을 가르치는 것은 제국법에 어긋나지.”
“그럼…….”
“누군가 근위대에 찌르기라도 한다면 자칫 반역으로까지 몰릴 수 있는 사안이다.”
“반역이요?”
눈이 절로 부릅떠졌다. 생각지도 못한 현실적인 벽이었기 때문이다.
‘……게임에서는 어땠었지?’
나는 기억을 되새겼다.
자세히 나오지 않았지만, 게임에서는 공작이 이클리스를 데리고 와 책임졌다.
‘저런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그의 능력을 높이 샀던 건가…….’
입 안이 씁쓸해졌다.
게임대로 공작이 그를 데리고 왔다면 그는 지금보다 좀 더 수월하게 검술을 연마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를 가로챈 것을 후회하지 않았다.
나는 시궁창에서 구원해 준 ‘한 줄기 빛’이라는 위치가 얼마나 값진 것인지 잘 알고 있었으므로.
“……그러니 외부에서 적당한 이를 수배해 보지.”
문득 데릭의 목소리가 일시적인 상념을 깨웠다.
“일단은 그것으로 만족하도록 해라.”
“……감사해요, 소공작님.”
나는 한발 늦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그토록 까다로운 과정일 줄 몰랐던 터라 놈이 이렇게까지 나서 준다는 게 놀라웠다.
목적을 달성하자 날이 서 있던 신경이 누그러졌다.
덕분에 감사의 의미로 어색한 미소나마 입가에 걸칠 수 있었다.
그 순간, 나와 마주친 푸른색 눈이 미세하게 움찔거렸다.
그와 동시에 그의 머리 위, 주황빛이 깜빡거렸다.
‘어…….’
멍하니 그것을 올려다보던 도중.
“삐요, 삐요오-.”
어디선가 맑은 음이 정적을 깨트렸다.
퍼뜩 고개를 돌리자, 진분홍색 새가 또다시 나를 경계하며 날개를 퍼덕이는 중이었다.
새는 부엉이처럼 고개를 좌우로 갸웃거렸다. 그럴 때마다 보석안이 오색으로 반짝반짝 빛났다.
“가까이 가서 구경하지그래?”
“……네?”
나는 돌연 들려온 음성에 얼떨떨한 표정으로 시선을 돌렸다.
“경계하는 게 아니다. 네가 저와 같은 색을 가진 것을 신기해하는 것이지.”
“저를…… 알아봐요?”
깜짝 놀라 되묻자, 그가 고개를 까딱였다.
나는 다시 새에게로 눈을 돌렸다.
“삐요, 삐요오. 삐요-.”
경계하는 소리가 아님을 들어서일까.
한 번 더 날개를 퍼덕이는 새가 자기를 봐 달라며 애교 부리는 것 같았다.
새장이 있는 창틀은, 응접용 소파 바로 앞이었다.
아까부터 신기한 새의 모습에 호기심을 가지고 있던 나는, 거절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새장 앞으로 다가갔다.
“삐요, 삐요오-.”
가까워진 나를 보고 새가 맑은 소리를 내며 고개를 좌우로 마구 갸웃거렸다.
데릭의 말처럼, 정말로 제 털 색과 내 머리 색이 비슷한 것을 어리둥절하게 여기는 것 같았다.
“예타 공국에서는 플라포피뉴를 신의 전령새라 여긴다지.”
그때 뒤쪽에서 건조한 목소리가 나지막이 들려왔다.
어느새 나를 따라 일어선 데릭이 뚜벅뚜벅 걸어와 옆에 섰다.
“이 새의 이름이 플라포피뉴예요?”
“그래.”
나는 문득 기시감이 들었다.
분명 처음 보는 새인데, 어디서 들어 본 듯한 이름이었다.
‘어디서 들은 거지……?’
곰곰이 생각에 잠길 무렵.
“원래 예타 공국에서는 국보로 여겨지는데, 국왕이 이번 사냥 대회를 기념하여 특별히 한 마리를 공물로 바쳤다더군.”
“아.”
이어진 데릭의 말에 번뜩 뇌리를 스쳐 지나가는 장면이 있었다.
그가 사냥 대회에서 잡았다던 희귀 동물.
사냥감들 사이에 진분홍빛 무언가가 늘어져 있는 것을 얼핏 본 기억이 났다.
‘그럼 이게…….’
순위권에 들 만했다.
이렇게 희귀한 것을 잡았다는 사실이 새삼스러워서 그를 흘끔거리는 와중이었다.
“플라포피뉴는 자웅동체로, 사는 동안 딱 한 번 알을 낳는다.”
내가 새에 관심을 가지는 것을 눈치챘는지, 그는 묵묵히 새에 관해 설명을 덧붙였다.
“그중 새끼가 태어나지 않은 무정란은 딱딱하게 굳어져 이 눈과 같은 모습으로 변하지.”
“눈…… 이요?”
나는 그의 말에 새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사방으로 빛이 반사되는 찬란한 보석안.
꼭 다이아몬드를 박아 놓은 것 같이 이질적이면서도 신묘했다.
“그러면 값을 매길 수 없을 만큼 엄청난 값어치를 지닌 보석이 되는 거다.”
“…….”
“네가 작년 생일에 갖고 싶다 했던 그 포피뉴 다이아몬드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