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117화
‘재판까지요……?’
나는 순식간에 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원하는 처벌을 말하라고 했을 때부터 데릭 놈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저히 종잡을 수 없었다.
“재판에서 승소하면 어떻게 되는데?”
“징역을 살게 됩니다.”
“징…… 역?”
“네. 아니면 거금의 배상금을 물어야 하는데, 그럴 여유는 없을 테니까요.”
입 한번 잘못 놀린 것치고는 너무한 처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문득 스쳤다.
하지만 곧 신경 끄기로 했다. 어차피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데릭이 독단적으로 진행한 일이었다.
“그리고 아가씨.”
집사가 불현듯 목소리를 낮추고 속삭였다.
“이클리스의 스승을 맡을 자를 구했습니다.”
나는 반색했다.
“그래? 누구지?”
“재작년에 은퇴한 황실기사단의 부단장이었던 스펜 경입니다. 은퇴 후로 행방이 묘연하더니, 수도 변경 평민들이 사는 마을에서 아이들에게 글과 검을 가르치는 중이었다고 합니다.”
되게 숨은 재야의 고수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런 내 생각을 뒷받침하듯 집사가 덧붙였다.
“현역 시절 검술 실력이 대단하다고 소문이 자자한 자였지요.”
나는 잠깐 멈칫했다. 가능한 이클리스가 내가 탈출한 이후 소드 마스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노멀 모드에서 그는 실력을 숨기다 종국엔 페넬로페를 배신하므로.
‘뭐, 상관없겠지.’
하지만 나는 잠깐 들었던 기우를 내려놓았다.
내가 나서서 스승을 구해 준 것이니 오히려 호감도에 플러스가 됐으면 됐지, 생뚱맞게 떨어지진 않을 것이다.
게다가 아무리 하늘이 내린 천재라지만 한 달도 되지 않아 소드 마스터의 경지에 오르겠는가.
“조금 뒤 제가 그를 이끌고 스펜 경에게 가는 길을 안내할까 합니다. 후문에 은밀하게 짐마차를 준비해 두었습니다.”
“그럼 먼저 이클리스를 불러 놓고 있어 줘. 나도 곧 준비해서 나갈 테니까.”
“아가씨께서요?”
내 말에 집사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응. 첫날이니 배웅은 해 줘야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싱긋 웃었다.
이제 진짜 여주가 등장하는 성인식까지 3주 남짓.
이 빌어먹을 곳에서 탈출하여 원래 세상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나는 할 수 있는 건 다 해 보기로 결심했다.
* * *
집사가 먼저 기숙사에 있을 이클리스를 데리러 가 있는 사이, 나는 세안을 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그리고 얇은 소재의 검은색에 가까운 짙은 붉은색 원피스를 꺼내 입었다.
일전에 사냥 대회 전야제에 참석할 적, 피처럼 붉고 화려한 드레스를 차려입은 나를 보고 이클리스의 호감도가 소폭 상승한 게 떠올랐기 때문이다.
“좋았어.”
거울을 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이던 나는, 곧장 방을 나섰다.
그리고 후문으로 가기 위해 저택의 뒷문으로 향했다.
조용히 문을 열고 나오자, 얼마 전 황태자를 대면했던 후원이 곧바로 펼쳐졌다.
철저히 관리된 꽃줄기들이 불어오는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렸다.
바로 후문 쪽으로 걸음을 옮기려던 나는, 순간 눈길을 잡아끄는 무언가에 걸음을 멈칫했다.
후원 앞쪽에 이름 모를 연녹색 꽃들이 만개해 있었다.
나는 그쪽으로 다가가 가장 활짝 피어 있는 꽃을 한 송이 꺾었다.
진부하지만, 내 눈동자 색이랑 비슷해서였다.
며칠 전에 받아 와 말리는 중인 시든 화관에 대한 보답도 할 겸, 나는 그것을 소중히 들고 다시 뒤돌아 걸었다.
얼마 후, 후문에 이르니 이클리스와 집사가 이미 도착해 있는 상태였다.
멀찍이서 검붉은 색의 게이지 바가 선명히 빛났다.
나는 재빨리 꽃을 뒤로 숨긴 채 사뿐사뿐 걸음을 옮겼다.
“이클리스.”
“……주인님?”
내가 올 줄은 미처 예상치 못했는지 그의 눈이 강아지처럼 동그래졌다.
“여긴 어떻게…….”
“배웅해 주려고. 처음 가는 건데 긴장되잖아.”
그는 내 말에 눈을 내리깔 뿐, 딱히 긴장한 눈치는 전혀 아니었다.
나는 개의치 않고 생긋 웃으며 물었다.
“기분이 어때? 원하는 대로 이루어졌는데.”
이클리스의 눈 밑이 미세하게 움찔거렸다.
그는 워낙에 표정이 없는지라 얼굴만 봐서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한참 동안 입술을 달싹이더니, 이내 입을 열어 작게 속마음을 내뱉었다.
“……좋아요.”
“다행이네.”
흡족한 대답이었다.
나는 그제야 등 뒤에 숨긴 것을 짠 하고 꺼내 보였다.
“자.”
반동으로 인해 연녹색의 꽃송이가 ‘통’ 하고 이클리스의 코를 살짝 치며 흔들렸다.
부러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그 바람에 달큰한 꽃향기가 우리 사이에 퍼져나갔다.
잿빛 눈동자가 서서히 커다래졌다.
“이건…….”
“오는 길에 네 생각이 나서 꺾었어.”
나는 꽃을 든 손을 천천히 그의 얼굴에 가까이 가져다 댔다.
약지와 새끼손가락으로 흘러내린 머리카락들을 귀 뒤로 넘긴 후, 귓가에 살며시 꽃을 꽂아 주었다.
바로 내 손을 쳐 내면 어쩌나 싶었는데 다행히도 그는 내가 손을 뗄 때까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메마른 얼굴, 버석한 회갈색 머리칼과는 퍽 어울리지 않는 색이어서 장난 반, 혹시 모를 긴장을 풀어 주려는 의도 반이었는데.
막상 관자놀이 옆에 꽃을 꽂은 이클리스의 모습은 오히려…….
놀라울 만큼 화사하고 잘 어울렸다.
나는 한동안 그를 바라보며 눈을 깜빡이다가, 이내 느낀 심경을 고스란히 토해 냈다.
“……예쁘구나.”
순수한 감상이었다.
그 순간, 이클리스의 눈동자가 무섭도록 일렁거렸다.
그는 마치 그것을 숨기려는 듯 곧바로 고개를 푹 숙였다.
얼굴 대신 꽃이 꽂혀 있는 귀 끝이 타오를 듯 붉게 변한 것이 보였다.
‘됐어. 이건 확실히 플러스야.’
반짝이는 검붉은 색 게이지 바와 그를 번갈아 바라보던 나는 회심의 미소를 감추며 입을 열었다.
“네 스승을 구해 주기 위해 내가 힘 좀 썼으니까, 내 생각하면서 열심히 하렴.”
오만하게 고개를 쳐들고 잔뜩 뻐겼다.
데릭이 구해 준 거라는 숨겨진 진실은 그가 알 필요 없었다.
“알았지?”
“……네.”
이클리스는 순종적인 태도로 대꾸했다.
이윽고 그가 숙이고 있던 고개를 쳐들었다. 그리고.
“열심히 해서…… 주인님께 부끄럽지 않은 기사가 될게요.”
알 수 없는 감정들이 득시글거리는 눈으로 나를 보며 말했다.
나는 일순 멍해졌다.
순간적으로, 그의 잿빛 눈동자가 평소보다 훨씬 짙은 색으로 물들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가씨. 이제 그만 가 봐야 할 듯합니다.”
그때, 집사가 다가와 나를 일깨웠다.
“어? 어어…… 가 봐야지. 어서 집사를 따라 가 보렴, 이클리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이클리스에게 손짓했다.
그는 집사의 재촉에도 잠시간 뚫어져라 나를 응시하다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검붉은 색 게이지 바가 멀어진다.
그들이 후문 밖으로 사라질 때까지 우두커니 자리에 서 있던 나는, 한참 후 정신을 차렸다.
“아. 호감도.”
뒤늦게 호감도를 확인하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왠지 모르게, 한순간 폭풍이 몰아치고 사라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 * *
방으로 돌아온 나는 책상 앞에 앉아, 오늘 아침 집사에게서 전해 들은 소식에 대해 고민했다.
“뷘터 베르단디…….”
생각해 보니, 그를 못 본 지 꽤 오랜 시간이 흐른 상태였다.
사실 한 번쯤은 만나 보는 게 좋았다.
그의 머리 위가 무슨 색으로 변했는지 궁금하기도 했고, 여주가 등장하기까지 얼마 남지 않은 시점이니 그가 여주와 접촉했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었다.
톡톡톡-. 나는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리며 중얼거렸다.
“만나려면 역시, 상단 계약 핑계가 가장 적합하려나.”
하지만 에메랄드 광산은 안 된다.
그건 이미 집사를 대리인으로 내세운 것이므로 내가 괜히 나서 소유주임을 알릴 필요는 없었다.
나는 책상 서랍 가장 하단을 열어 흰 봉투 하나를 꺼냈다.
그런데 서랍 안쪽에 있던 무언가가 봉투에 주르륵 딸려 나왔다.
“어…….”
나는 눈을 크게 떴다.
토끼 모양을 띤 흰색 손수건.
재판이 끝나고 뷘터가 마법을 써서 보여 준 것이었다.
짐 정리를 마친 에밀리가 건넨 것을 서랍 속에 넣어 놓고 깜빡 잊고 있었던 게 떠올랐다.
나는 흰 봉투와 함께 모양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조심조심 토끼를 꺼냈다.
“그러고 보니, 이것도 돌려줘야겠네.”
그 둘을 번갈아 보자 갈팡질팡하던 마음이 확고해졌다.
‘근시일 내에 뷘터를 한번 만나러 가야겠어.’
그렇게 결론 지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서 빨리 침대에 누워야 했다.
아침 일찍 방문한 집사와 이클리스의 배웅 때문에 잠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노곤하게 가라앉는 몸을 이끌고 막 걸음을 옮기려던 찰나였다.
화악-!
갑자기 닫혀 있던 책장 옆 창문이 벌컥 열리더니, 엄청난 돌풍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악! 뭐, 뭐야!”
눈을 뜰 수조차 없을 만큼 사정없이 몰아치는 바람에 나는 정신없이 팔을 허우적거렸다.
고개를 숙이기 바빠 이미 한 번 겪은 일이라는 기시감을 느낄 새도 없었다.
얼마 후 거짓말처럼 바람이 가라앉았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시끄러운 잡음을 동반한 남성의 걸쭉한 목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지지직…… 계약을…… 치직…… 합니다…….”
나는 혼이 나간 채 헐떡이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헉, 허억, 어떤 새끼야.”
그리고 이내 발견했다.
“치직…… 단을…… 상단을…… 찾아와…… 부탁…… 니다…….”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천 자락으로 이루어진 토끼가, 기괴하게 머리를 까딱이며 말을 하는 모습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