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118화
“치직, 치지직…… 흰 토끼…… 입니…….”
굳이 어디서 보내는 전언인지 알리는 듯한 말을 끝으로, 토끼에게서 흘러나오던 소리가 뚝 끊겼다.
나는 혹여 걸걸한 목소리가 계속 흘러나올까 싶어 한동안 손수건을 유심히 지켜봤다.
그러나 더 추가되는 건 없었다. 방 안은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대체…….”
나는 그제야 경악으로 굳어진 몸을 움찔움찔 움직였다.
“왜 이런 미친 방식으로 전하는 거야. 평범하게 전보를 보내면 안 되냐고.”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투덜거릴 때였다.
불현듯 눈앞이 환해지더니.
〈SYSTEM〉 [마법사, 뷘터 베르단디]에게서 [수상한 초대]를 받았습니다.
상단으로 바로 이동하시겠습니까?
[예. / 아니오.]
“……뭐야.”
나는 일순 정신이 멍해졌다.
“시스템 창이 왜 떠?”
시스템 창은 보통 새로운 에피소드의 시작을 알렸다.
그것은 곧 이 또한 게임의 여러 루트 중 하나라는 소리였다.
이미 지난 히든 퀘스트 때 한번 겪어 본 일이었다.
그러나 내가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이, 게임 스토리대로 움직이고 있었다는 사실에 머리끝이 쭈뼛 섰다.
‘아니야. 그만큼 내가 게임을 잘 헤쳐 나가고 있다는 뜻이겠지.’
나는 애써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어차피 집사에게 알리고 외출 준비를 하는 게 영 껄끄러웠는데 잘됐다.
“기다려, 시스템.”
내 말을 알아듣는 것도 아닌데, 나는 명령이라도 하듯 내뱉으며 재빠르게 움직였다.
옷장에 숨겨 둔 로브와 가면을 꺼내기 위해서였는데.
“아.”
나는 불현듯 발걸음을 우뚝 멈췄다.
생각해 보니 가면이 없었다. 지난번에 데릭에게 압수당했기 때문이다.
나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굳이 저번처럼 얼굴을 가릴 필요가 있나?’
사실 이미 서로의 정체를 알고 있으니 무의미한 일이었다.
하지만 상단에서 만나는 거면 뷘터는 필히 가면을 쓰고 있을 것이다. 그게 게임 설정이었으니까.
놈은 가면을 쓰고 모르는 척 상단주 행세를 할 텐데, 나만 신분도, 얼굴도 홀랑 깐 채 대면하긴 뭔가 좀 꺼림칙하지 않은가.
“하여튼 도움 안 되는 데발놈…….”
하나뿐인 가면을 압수해 간 데릭을 욕하던 중, 문득 머릿속을 스치는 것이 하나 있었다.
나는 허겁지겁 책상 쪽으로 걸음을 틀었다.
그리고 벌컥 두 번째 서랍을 열었다.
그 안에는 데릭이 가면을 압수해 간 후 주었던, 자주색 보석들이 자잘하게 백금 줄에 달린 팔찌가 고이 놓여 있었다.
- 보석들에 마법을 새겼다. 끼고 있으면 보호 마법과 외양 변화 마법이 발동되지.
- 시행한 마법사가 말하길, 다른 이의 눈으로 볼 땐 네 또래 소년의 모습으로 보일 것이라더군.
귓가에 그때 놈이 했던 말이 되새겨졌다.
“외양 변화 마법이란 말이지.”
나는 얼른 서랍에서 팔찌를 꺼내 손목에 찼다. 그러자 자주색 보석들에 번쩍하고 빛이 들어왔다.
신기한 눈으로 그것을 바라보다가, 이내 화장대로 분주하게 걸음을 옮겼다.
“대박. 정말이잖아.”
거울을 보자 내 본모습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
대신 짧은 고수머리를 가진, 예쁘장한 소년이 비쳤다.
나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건 청록색 눈동자뿐, 머리 색도 길이도 몽땅 변해 있었다.
내 본 얼굴 형태가 약간 남아 있긴 했지만, 오히려 그로 인해 훨씬 자연스러워 보였다.
“완전 신기한데? 아아. 목소리도 변하는 건가?”
나는 더듬더듬 말을 내뱉어 보았다.
남자치고는 가느다랗지만, 원래 내 목소리보다는 조금 더 허스키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얼추 변성기가 오지 않은 소년의 목소리처럼 들렸다.
몇 번 더 ‘아아. 마이크 테스트.’를 반복하던 나는, 이내 완전히 목소리에 적응해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래도 도움되는 데발놈으로 신분 상승시켜 줘야겠네.”
흑단같이 새카만 머리칼을 보자니, 마법 팔찌를 준 데릭이 떠올랐다.
‘놈이 어렸을 땐 이렇게 생겼으려나…….’
지금의 그는 너무나도 날카롭고 성숙한 외모인지라 어렸을 때 얼굴이 조금도 상상 가지 않았다.
청소년의 데릭 놈을 떠올리던 나는, 문득 입고 있는 옷이 미스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미소년의 모습에 흰 원피스 차림새는 어울리지 않았다.
다행히 내게는 변한 외양과 썩 어울릴 만한 옷이 있었다.
사냥 대회 때 여러 벌 맞춰 둔 사냥복 말이다.
회색 재킷과 반바지, 반 스타킹 차림새로 갈아입고 나오니 정말로 감쪽같았다.
“예쁜 아가씨 꼬시러 가는 부잣집 도련님 같네.”
거울 보며 히죽 웃던 나는 책상에 올려 두었던 토끼 모양 손수건과 흰 봉투도 잊지 않고 품에 챙겨 넣었다.
“자, 가 보자고.”
예쁜 아가씨 대신, 예쁜 마법사 꼬시러 갑시다.
* * *
환한 빛과 함께 눈을 뜨니, 허름한 건물 앞에 서 있었다.
곧장 계단에 올라 낯익은 낡은 문 앞에 섰다.
노크를 하려다가, 일전에 문이 저절로 열렸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래서 바로 문고리를 잡고 돌렸다.
그러나, 철컥-.
“응?”
문은 열리지 않았다. 나는 당황해서 몇 번 더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철컥, 철컥-.
“뭐야. 어디 간 거…….”
“당신 누굽니까.”
그 순간이었다. 뒤에서 서늘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나는 흠칫 놀라 뒤돌았다.
흰 토끼 가면을 쓴 장신의 남자가 사자 가면을 쓴 어린아이와 함께 지팡이를 내게 겨누고 있었다.
‘아니! 저놈은 비밀스러운 마법사라면서, 왜 맨날 지팡이부터 꺼내는 거야!’
버벅대며 지팡이 끝에 맺힌 두 개의 동그란 빛무리를 번갈아 바라보던 중이었다.
불현듯 뷘터의 정수리 위가 눈에 들어왔다.
‘보라색……?’
선명한 보랏빛의 게이지 바가 빠르게 깜빡였다.
“누군데 남의 영업장 앞에서 서성이는 겁니까?”
멍하니 머리 위를 바라보는 나를 보고, 뷘터가 차갑게 쏘아붙였다.
“당신 나이 대의 사람들과는 의뢰를 진행하지 않습니다. 그만 돌아가십시오.”
“토끼한테 전언 받고 온 의뢰인 맞아.”
정신이 번쩍 든 나는, 혹시라도 호감도가 또 폭락할까 봐 얼른 답했다.
“……요.”
그리고 아차 싶어 어색하게 덧붙였다.
전처럼 일방적으로 반말을 쓰는 오만한 귀족 행세를 할 수가 없어졌기에.
내 대답에 다행히도, 놈의 보라색 호감도 게이지 바가 깜빡임을 멈췄다.
휘이잉- 썰렁한 바람이 텅 빈 골목길 안을 한차례 휩쓸고 지나갔다.
이윽고 토끼 가면은 내게 겨누고 있던 지팡이를 천천히 내리며 입을 열었다.
“그 모습은 대체…….”
황당함이 잔뜩 묻어 있는 음성으로 내게 말을 걸던 뷘터는, 이내 옆에 있는 사자 가면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만 내려라. 손님이시다.”
“…….”
사자는 대꾸 없이 작은 손을 내렸다.
그리고 재빠른 몸짓으로 지팡이를 품속에 집어넣었다. 잘 훈련된 모습이었다.
지난번, 뷘터 놈의 호감도 폭락 때 나를 도와준 전적이 있어서 그런지 퍽 반가웠다.
아는 체를 하고 싶었으나, 어차피 알아볼 것 같지 않아 관뒀다.
“일단…… 안으로 들어가서 얘기를 나누시죠.”
덩달아 품속에 지팡이를 집어넣은 뷘터가 한쪽 손가락을 까딱였다.
철커덕. 끼이이익-.
그와 동시에 내 등 뒤, 굳게 잠겨 있던 문이 거짓말처럼 열렸다.
“들어가시죠.”
계단을 올라 다가온 뷘터가 정중한 태도로 내게 권했다.
왠지는 모르겠지만 나를 내려다보는 군청색 눈동자에 착잡함이 담겨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신경 쓰지 않고 당당하게 안으로 들어섰다.
한 번 와 본 그의 사무실은 한 치의 변화도 없이 그대로였다.
“앉으시죠.”
나는 그의 두 번째 권유에 순순히 소파에 앉았다.
그런데 뒤따라 들어온 그는, 사자 가면 소년을 밖에 그대로 둔 채 문을 닫아 버렸다.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자, 뷘터가 아무렇지 않게 답을 내주었다.
“뒷문으로 들어갈 겁니다.”
외투를 벗어 옷걸이에 건 그가 마침내 내 맞은편에 착석했다.
그리고 전과 같이 누군가를 부르듯 손짓했다.
벽에 붙어 있는 찬장 문이 절로 열리고 주전자와 찻잔이 휙휙 날아왔다.
보글보글 끓는 주전자가 알아서 차를 붓는 모양새를 멍하니 구경하고 있을 때.
“지난번에도 금방 오셨기에 빠르게 일을 보고 돌아오던 참이었는데…….”
뷘터가 불쑥 말을 걸었다.
“이렇게 빨리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군청색 눈동자가 빤히 나를 응시했다.
어디서 들어 본 말이었다. 그 생각이 듦과 동시에, 불현듯 잊고 있던 사실 하나가 떠올랐다.
- 의뢰자분들은 보통 연락을 받고 하루나 이틀 후에 찾아오시기 마련인지라…… 이렇게 빨리 방문하실 줄 몰랐습니다.
이곳의 오만한 귀족 놈들에게는 게 으른 관례가 있었다는 것을.
‘망할, 또 오라는 소리 듣고 헐레벌떡 달려온 꼴이 됐잖아!’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당황한 나는 헛기침과 함께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크흠! 시간 끌 것 없이 빨리빨리 처리하는 게 좋겠지.”
“…….”
“……요.”
정말 아무 말이었다.
뒤늦게 ‘요’자를 붙이자, 토끼 가면에 뚫린 구멍 사이로 얼핏 눈꼬리가 휘어지는 게 보였다.
“그냥 하던 대로 편히 말씀하십시오.”
뷘터 놈은 웃음기 섞인 목소리를 애써 감추며 배려해 주었다.
“어차피 이곳에 있는 이상 저는 일개 상단주에 불과합니다.”
“그럴까?”
나는 사양하지 않고 덥석 그 배려를 받아들였다.
절대 민망해서 그런 건 아니었다.
“그런데 그건…… 외형 변화 마법을 새긴 팔찌입니까?”
문득 뷘터의 시선이 내 손으로 옮겨 갔다.
여전히 자줏빛을 뿜어내고 있는 데릭이 준 팔찌가 보였다.
“응. 몰래 나오느라.”
“제 의미를 알아들으셔서 다행입니다.”
이해한다는 듯 뷘터가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저 또한 어떤 식으로 전언을 보내는 게 좋을지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뭔 고민?’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자 놈이 곧장 말을 이었다.
“저번처럼 토끼를 보내려 했는데…….”
“…….”
“너무나도 기겁을 하시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