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119화
너무나도 기겁하다.
적나라한 놈의 말에 입이 스르륵 벌어졌다.
‘그, 그걸 다 보고 있었단 말이야?!’
얼굴이 그 어느 때보다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와 동시에 갑작스럽게 몰아친 돌풍과 천 조각에서 흘러나온 걸걸한 목소리에 경악했던 아까의 일이 떠올랐다.
“그, 그럼 오늘도…….”
“아. 동물 교감 마법은 저 또한 희미하게 동물의 오감을 느낄 수 있어 가능합니다. 하지만 무생물은 불가능합니다.”
어쨌든 처음 토끼를 보냈을 때의 반응은 다 보였다는 것이다.
나는 그의 말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알 수 없어졌다.
“어떤 식으로 전해 드려야 덜 놀라실까 고민하다가, 마법을 걸었던 손수건이 떠올랐습니다.”
“…….”
“미약하게 남아 있던 마력에 기대를 건 것인데, 그래도 전달이 잘 된 것 같아 다행이군요.”
머리를 까딱이며 걸걸한 남성의 목소리를 내는 손수건도 기괴한 건 매한가지였다.
그러나 그것을 입 밖에 꺼내면, 오늘도 소스라치게 놀라 꽥 비명을 지른 것을 내 입으로 실토하는 꼴이 된다.
나는 잠시 숙연해졌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그래서 말인데. 이건 그만 돌려주려고.”
품을 뒤적여 조심스럽게 토끼 모양의 손수건을 꺼냈다.
다행히 순간 이동을 한 덕에 크게 모양이 흐트러지거나, 눌리지는 않은 상태였다.
테이블 위로 스윽 내밀자 뷘터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는 우두커니 내가 내민 손수건을 내려다보기만 했다.
그런 그의 모습이 조금 의아했지만, 나는 개의치 않고 말했다.
“앞으로 연락은 가급적 서신을 통해서 했으면 좋겠어.”
매번 이런 식으로 연락하다간 심장이 남아나질 않을 것이다.
내 말을 들은 뷘터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다시 드러난 군청색 동공이 왜인지, 얕게 흔들렸다.
“그 말씀은…….”
“…….”
“저와 계약 생각이 있다는 것으로 받아들여도 됩니까?”
나는 그의 말에 어리둥절해졌다.
그럼 계약하러 온 거지, 내가 뭣 하러 직접 여길 오겠는가.
“계약 얘기 이전에 단도직입적으로 묻지.”
나는 마침 나온 주제에 바로 본론을 꺼냈다.
“내가 에메랄드 광산주인 것은 어떻게 알았지?”
내 직설적인 물음에 가면 틈새로 보이는 동공이 서서히 확장됐다.
대뜸 의심부터 하는 것은 조금 실례가 됐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꺼림칙했다.
“혹시, 내 뒤를 캐고 다닌 건가? 아니면.”
“…….”
“이걸로 도청이라도 한 건…… 아니겠지?”
“도, 도청 말입니까?”
뷘터가 말까지 더듬으며, 전에 없이 당황한 기색을 비쳤다.
순간 ‘너무 나갔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런 부분은 확실히 짚고 넘어가는 편이 좋았다.
“맙소사, 레이디.”
그러나 뷘터는 한탄 같은 한숨을 내쉬며 제 이마를 짚었다.
“여기엔 도청같이 섬세한 마법이 발동될 만한 마력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보십시오.”
그는 그렇게 말을 하며 토끼를 손가락으로 툭 건드렸다.
그러자 방금 전까지 형태를 유지하고 있던 토끼가 거짓말처럼 스르륵 무너지더니…….
그대로 구깃구깃한 손수건 한 장으로 변했다.
“오늘 연락도 마력의 파장을 이용하여 간신히 전달한 것을요. 제가 말을 전할 때 여러 잡음이 들리지 않으셨습니까?”
들렸었다.
나는 침묵했다.
“게다가 도청은 범죄 행위이지 않습니까. 정 의심이 가시면 다시 가지고 돌아가셔서 가문 소속 마법사에게 확인하셔도 됩니다.”
속사포처럼 내뱉은 뷘터는 정말로 억울해 보였다.
수상하고 괴짜 같은 마법사란 설정이라더니, 그렇게까지 막장은 아닌 듯했다.
“뭐 그럴 것까지야…… 아니라면 됐어.”
난 조금 무안한 표정으로 답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토끼 가면 너머 남자의 눈동자가 가느스름해졌다.
“저번부터 이곳을 무슨 암흑의 조직과 연관되어 있다고 여기시는 것 같은데…….”
“…….”
“여긴 그냥 평범한 정보상일 뿐입니다, 레이디. 범법 행위는 하지 않습니다.”
“크흠흠!”
너무 투명하게 속을 들킨 것 같아 나는 허겁지겁 헛기침으로 무마했다.
“……레이디의 광산 관련은 반쯤은 찍어 맞춘 겁니다.”
뷘터가 먼 산을 쳐다보는 나 대신 선선히 입을 열어 궁금증을 해결해 주었다.
“사냥 대회에서 부친을 만났을 때 동남부에 있는 에메랄드 광산에서 상등품의 원석들이 쏟아져 나왔다는 자랑을 들었습니다.”
나는 그 말에 미간을 좁혔다.
‘공작이?’
돌이켜보니, 사냥 대회 출정식 때 공작과 뷘터가 화기애애한 모습으로 대화를 나누던 것이 떠올랐다.
‘둘이 친한 사이인 건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 사이, 뷘터는 차분히 말을 이었다.
“당연히 가문 내에 소속된 마법사들을 통해 가공하겠거니 생각했는데, 얼마 후 경매장을 자주 오가며 상단을 찾는 듯한 가신 한 분을 보고 소유주가 바뀐 것을 추측했습니다.”
“…….”
“부친이나 다른 형제분들이라면, 굳이 다른 이를 앞세우진 않을 테니까요.”
내 대리인으로 나서 일을 처리하던 집사를 보고 간파했다는 것이다.
나는 순수하게 그의 눈썰미에 경탄했다.
‘하긴…… 집사의 얼굴을 알 정도면 공작가와 연이 있을 만큼의 고위 귀족 정도는 되어야겠지.’
일개 상단에서는 절대로 알 수 없는 정보였다.
지체 높으신 후작임과 동시에, 정보상을 운영하는 괴짜나 가능한 추측이지.
신빙성 있는 그의 답변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음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왜 하필 나야?”
“…….”
“그것도 보석을 취급하지 않는 상단에서, 왜 굳이 내 광산과 계약을 하겠다는 건지 의문이군.”
사실 진짜 궁금한 것은 이것이었다.
왜 내가 아닌, 뷘터가 먼저 나를 찾는 것인가.
“그건…….”
그가 입술을 달싹였다.
“답례는 서로 한 번씩 주고받은 것으로 끝났다고 생각하는데.”
나는 또 그가 매번 하는 변명을 되될세라 얼른 사전 차단했다.
그 순간, 가면 너머에서 ‘피식’하고 바람이 빠지는 것 같은 작은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레이디야말로…… 셈이 정말로 철저하시군요.”
나는 그의 말에 천천히 눈을 크게 떴다.
- 후작님은 매번 셈이 정말로 확실하시네요.
일전에 답례 타령을 하던 그에게 내가 했던 말이었기 때문이다.
매번 정체를 반쯤은 숨긴 채 대화를 나눠서 그런가.
뷘터와는 매번 서로의 말을 적당히 인용하여 돌려주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게…… 썩 불쾌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 깨달음이 머릿속을 타고 흐르자, 기분이 정말로 묘해졌다.
‘여주를 데리고 와서 나를 죽일지도 모를 경계 대상인데…….’
그런데 막상 만나면, 그에 대한 경계가 옅어졌다.
뷘터 또한 나를 퍽 살가운 태도로 대해서일까.
머리가 복잡해졌다. 멀거니 토끼 가면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을 때쯤.
“그럼 저도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려도 됩니까?”
불현듯 그가 몸을 바짝 바로 하고 나를 똑바로 응시했다.
“당신에게 관심이 생겨서 그렇습니다.”
나는 한발 늦게 그 말을 알아들었다.
“……뭐?”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어떤 사고와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지, 제가 이렇게 행동하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했습니다.”
“…….”
“그런데 레이디와 접점을 만들기 위해 제가 이용할 수 있는 것이, 상단과 계약뿐이더군요.”
그가 깔끔하게 말을 마쳤을 때, 내 시선은 이미 군청색 눈동자를 벗어나 그의 정수리 위로 향한 상태였다.
선명한 보랏빛 게이지 바.
‘뭐야. 보라가 사랑의 색이야……?’
나는 이런 연애 쪽으로는 둔한 편이었다.
그러나 검붉은 색을 가진 이클리스나 연분홍색을 띠는 공포의 주둥이가 내게 호감을 가졌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데 아무리 색깔이 뭘 뜻하는지 모른다지만, 보라색을 사랑이라 말하는 건 너무하지 않은가.
‘아니면…… 그냥 변태?’
오싹한 생각이 들어서, 나는 말까지 더듬거리며 되물었다.
“그, 그런 게…… 왜 궁금한데?”
“저는 정보를 수집해서 사고파는 사람입니다.”
뷘터는 마치 준비하기라도 한 양 막힘없이 대꾸했다.
“그런 만큼 사람을 잘 파악할 줄 안다고 생각했는데…….”
“…….”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그의 대답을 들으면 들을수록 혼란만 가중시켰다.
나야말로 그가 어떤 인간인지 종잡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물었다.
“……알게 되면? 뭔가 달라지는 게 있나?”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지요.”
애매모호한 답변이었다. 그는 곧바로 덧붙였다.
“마법사들은 호기심이 많은 족속들입니다. 그 호기심을 충족하기 위해서 물불을 가리지 않는 편이지요.”
이 상단 계약이 아니더라도 어떻게든 나를 알아내기 위해 물불 가리지 않겠다는 말로 들렸다.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협박인가?”
“제안입니다.”
눈꼬리가 얄밉게 휘어졌다. 기가 막혀서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다행히 그는 어처구니없는 변명 이후 다시 본론으로 돌아왔다.
“보석에 손을 대지 않은 것은, 시장을 쉽게 점유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
“제국에서 저만큼 강력한 마법을 원석에 새길 수 있는 마법사는 없습니다. 가공 과정 중에 실패할 확률 또한 거의 없을 거라고 확신합니다.”
대단한 자신감이었다.
나는 놀란 눈으로 뷘터를 돌아보았다.
순도 높은 광물일수록 마법을 새기기가 극히 까다로워진다.
가공 과정에서 광물이 변성되거나 그냥 깨져 버릴 확률이 컸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법사가 소속된 상단을 찾아 계약을 해도, 바로 판매 개시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섣부르게 진행하다가 채굴한 원석들이 모두 깨져 버리면 광산이 부도 나는 지름길이기에.
그러나 뷘터는 그런 것 따위 모른다는 듯, 무척이나 당당한 태도로 거침없이 내뱉었다.
“원석 가공과 유통을 제게 맡겨 주시면 그 어떤 상단보다 빨리, 단시간에 최고의 수익률을 낼 수 있습니다. 그러니…….”
“…….”
“제게 맡겨 주십시오, 레이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