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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엔딩은 죽음뿐-120화 (120/243)

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120화

나를 지그시 응시하는 군청색 홍채에 알 수 없는 빛이 감돌았다.

고민 끝에 그와 비밀스러운 계약을 맺으려고 설득하러 온 것은 나인데.

지금 봐서는, 오히려 그쪽에서 이 계약을 맺어 달라고 간청하는 것처럼 들렸다.

‘……왜지?’

나는 또다시 의미 모를 감정에 휩싸였다.

정말로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다는, 어처구니없는 호기심으로 인해서라고는 믿기지 않았다.

나는 일순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그를 살폈다.

‘이미 여주를 만나고 언제쯤 공작저로 돌려놓으면 좋을지, 나를 떠보는 건가?’

그렇다 한들 내가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뷘터가 무슨 꿍꿍이든, 이것이 수많은 루트 중 하나라는 것은 변하지 않았다.

게다가 그와의 계약이 필요한 것은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에메랄드 광산 계약을 진행하도록 하지.”

나는 의구심을 거두고, 순순히 그의 제안에 긍정적으로 답했다.

그러다 갑자기 억울해져서 입을 삐쭉였다.

“어차피 이미 다른 상단이랑 계약도 할 수 없게 경매장에 아예 공포를 해 놨던데?”

“하하.”

밉지 않게 눈을 흘기자 그가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그 건은 집사와 이야기를 나누도록 해.”

내 본 목적은 그게 아니었으므로, 나는 바로 선을 그었다.

“오늘 내가 집사를 보내지 않고 직접 찾아온 것은, 에메랄드 광산에 대한 계약이 아니라 개인적인 의뢰를 맡기기 위해서야.”

“무슨…….”

뷘터가 의아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품에서 가지고 온 것을 꺼내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이건…….”

“내 소유의 다이아몬드 광산이야.”

흰 봉투를 그쪽으로 스윽 밀며 말했다.

가면 틈새로 보이는 뷘터의 눈이 이번에는 놀라움으로 물들었다.

“다이아몬드…… 말씀이십니까?”

“응. 이걸 어떻게 굴릴지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채굴부터 시작해서 유통, 가공, 판매 전 과정을 맡아 줄 대리인이 필요해.”

“…….”

“이에 대한 것들을 나와 따로 계약해 줬으면 좋겠는데.”

그는 조금 얼떨떨한 기색을 비치며 내가 내민 흰 봉투를 바라보았다.

에메랄드 얘기를 하다가 갑자기 다이아몬드가 튀어나왔으니, 그가 놀랄 만도 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 방법이 최선이었다.

데릭까지 알아 버린 이상 에메랄드 광산은 내 온전한 사재라고 볼 수만은 없었다.

장부 관리도 집사가 맡아 할 예정이었다.

내가 딱히 사치를 부리는 것도 아닌데, 많은 액수의 돈이 갑자기 공중 분해되는 사태가 반복되다 보면 금방 이상함을 눈치챌 것이다.

공작저 인간들 몰래 내 비자금을 축적하고 동시에, 공녀를 언제 갈아 치울지 각을 잴 예정인 뷘터와 공적으로 엮인다.

계약서상의 긴밀한 관계에 놓인 이상, 그는 노멀 모드처럼 ‘가짜 공녀’를 마냥 고깝게만 여기지 않을 것이다.

이런 내 계산을 알 턱이 없는 뷘터는 이내 당황한 기색을 갈무리하고 침착하게 물었다.

“가문 내의 가신들을 두고 어찌 하여…….”

“가문 내의 그 누구도 내가 이것을 가지고 있는 것을 몰라.”

나는 목소리를 살짝 죽이며 답했다.

본인의 말처럼 정보를 사고파는 만큼, 그는 아는 것도 많고 의심도 많았다.

나는 그것을 역이용하기로 했다.

“그대도 가문 내의 내 처지를 잘 알겠지.”

손을 뻗어 흰 봉투 끝을 와락 움켜쥐며 읊조렸다.

“이건 내 비자금이자, 목숨 줄이야.”

사실 억만장자가 되어 호감도를 마음껏 열어 보기 위한 것에 지나지 않았지만.

야망에 찬 귀족보다는 이름뿐인 공녀의 서글픈 발악처럼 보이는 것이 더 잘 먹히지 않겠는가.

시선을 들어 뷘터를 바라보았다. 가면을 쓰고 있어 그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는 전혀 알 수 없었다.

다만, 그의 눈이 ‘목숨 줄’이란 말을 듣고 한순간 일렁거리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내게는 다이아몬드 광산 사업 대리뿐만 아니라, 거기서 나온 돈을 따로 보관하고 관리해 줄 사람도 필요해.”

“…….”

“그대야말로 나와 계약을 해 주겠어?”

“…….”

“그 대신 총수익의 6할을 내어 줄게.”

파격적인 제안이었다.

귀족이 6, 아니 그 이상을 가져가면 가져갔지, 한낱 하수인일 뿐인 상단에게 그렇게까지 퍼 주지는 않았다.

‘좋았어. 완벽해.’

나는 하릴없이 흔들리는 뷘터의 눈동자를 보고, 내 호소가 먹혔음을 예감했다.

말없이 내 이야기를 듣던 그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레이디께서는, 저를…….”

“…….”

“이제 완전히, 신뢰하여 주시는 겁니까?”

허락의 말이 아닌, 생뚱맞은 되물음이었다.

나는 일순 멍해졌다.

‘신뢰……?’

갑자기 그 얘기가 왜 나오는 건가. 멀뚱멀뚱 뷘터를 바라보던 중.

- 레이디께 빚진 것을 갚을 수 있어 기쁩니다.

- 신뢰는 확실히 회복했네.

- 그럼, 저희 상단을 또 찾아 주시는 겁니까?

- ……글쎄. 우리가 다시 볼 일이 있을까.

그와 예전에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그때는 다신 안 볼 것처럼 굴었는데, 이렇게 개인 의뢰를 하러 찾아 왔으니 그로서는 그렇게 받아들일 만했다.

‘기억력도 참 좋지.’

그걸 아직도 기억하고 신경 쓰고 있었단 말인가.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와 내 사이에 ‘신뢰’라는 것이 쌓이는 일은 영영 없을 것이다.

여주를 데리고 와서 내게 엿을 먹일지도 모를 남주를 어떻게 신뢰한단 말인가.

잠깐 들었던 묘한 기분들이 천천히 침잠하다가, 종국엔 메말랐다.

뷘터 뿐만 아니라 이 게임 속 어디에도 내가 신뢰할 것은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곧이곧대로 말할 수는 없으니, 나는 싱긋 웃으며 적당히 에둘렀다.

“그대보다는, 후작님을 신뢰하는 것에 가깝지.”

나는 비자금을, 그는 그의 정체를.

우리는 서로의 약점을 쥐고 있고, 그것을 신뢰한다는 소리였다.

흔들리던 뷘터의 눈동자가 우뚝 멈췄다.

“……조건이 있습니다.”

“무슨 조건?”

“저도 제 호기심을 채우기 위하여 몇 번의 만남을 의무 사항으로 삼고 싶습니다.”

“만남……?”

나는 기이한 것을 들은 사람처럼 되물었다.

뷘터는 굳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 대신 6할이 아니라 관례대로 3할만 가져가겠습니다.”

나는 짧은 시간 고민했다.

자꾸 만나자고 밀어붙이는 그가 낯설고 부담스럽긴 했지만, 내게는 나쁘지 않은 조건이었다.

어차피 나 또한 그가 여주와 접촉하면서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었다.

“……좋아.”

빠르게 판단을 마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불쑥 한 손을 내밀었다.

“앞으로 내 돈 잘 부탁해, 흰 토끼 씨.”

빙긋 미소 지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계약이 성립되었으니 악수하자는 뜻이었는데, 뷘터는 선뜻 손을 맞잡지 않았다.

빤히 내 손을 내려다보는 통에 약간 뻘쭘해졌다.

‘뭐야. 남자 모습으로는 악수하기 좀 껄끄럽다 이건가?’

뒤늦게 마법으로 변장한 내 모습이 떠올라, 그만 손을 거두려던 찰나.

타악- 뷘터가 다소 성급하게 내 손을 잡아챘다.

한순간에 나보다 훨씬 커다랗고 뜨거운 온기 안에 손이 꽉 갇혔다.

“저 또한……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레이디.”

내 손을 맞잡은 채 그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한층 가라앉은 음성이었다.

그때였다.

〈SYSTEM〉 [뷘터]의 호감도를 확인하시겠습니까?

[200만 골드 / 명성 200]

눈앞이 환해지더니, 호감도를 확인할 기회가 찾아왔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200만 골드]를 선택했다.

〈SYSTEM〉 [200만 골드]를 차감하여 [뷘터]의 호감도를 확인합니다.

(남은 보유 자금 : 68,000,000 골드)

아직 본격적인 보석 사업이 개시되진 않아 내 보유 자금은 여전히 사냥 대회의 우승 상금뿐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신경 쓸 새가 없었다.

[호감도 52%]

뷘터의 호감도가 부쩍 상승해 있었기에.

‘마지막으로 봤을 때, 44%였던가?’

이제는 부쩍 절반을 넘긴 상태라 새삼스러운 기분이 듦과 동시에 허탈함이 몰려왔다.

노멀 모드의 여주가 등장하기까지 한 달조차 남지 않은 시기.

이클리스를 제외한 남주들의 호감

도가 이제야 한두 명씩 절반에 가까워진 것이 아닌가.

한 번의 에피소드로 10~15%씩 팍팍 오르던 노멀 모드에 비하면, 그야말로 치가 떨리는 난이도였다.

‘진짜 휴대폰으로 플레이하는 중이었으면, 하다가 빡쳐서 게임 종료하고 삭제 각이야.’

나는 맞잡은 손에 움찔움찔 들어가는 힘을 간신히 참았다.

이것은 내게 현실이었으므로 게임을 종료할 수도, 멈출 수도 없었다.

‘아니야. 죽지 않고 이 정도까지 온 게 어디야.’

애써 나를 다독일 즈음 뷘터의 정수리 위 흰 글씨가 다시 [호감도 확인하기]로 변했다.

나는 그때까지도 그가 내 손을 꽉 붙잡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제 그만 놔줬으면 좋겠는데.”

애매한 얼굴로 아래쪽을 흘깃거리자, 그가 퍼뜩 손을 놓았다.

“……계약서는 제 쪽에서 작성하여 서신을 통해 은밀하게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고마워. 이만 가 봐야겠군.”

대충 대꾸한 뒤 돌아갈 채비를 했다.

뷘터가 덩달아 일어나 나를 배웅했다.

나가는 입구 앞에 도달했을 때, 불현듯 그가 잊고 있었던 것이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그런데, 오늘은 타고 돌아가실 마차를 가지고 오셨습니까?”

“타고 돌아갈 마차……?”

나는 바보 같은 얼굴로 되물었다. 뷘터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아까 보니 혼자 오신 듯하여…….”

“…….”

정적이 흘렀다.

망할 순간 이동. 이곳에 온 지 너무 오래돼서 또 까먹어 버렸다.

“의뢰를 하나 더 추가하지.”

나는 결국, 시뻘게진 얼굴로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원래 그러려고 했던 척 말할 수밖에 없었다.

“나를 헤밀튼 스트릿으로 데려다 줘.”

이번에는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명백히 울려 퍼졌다.

나는 연신 벌게진 얼굴에 손부채질을 해야 했다.

* * *

뷘터가 말한 계약서와 서신은 다음 날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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