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121화
오랜만에 볕이 좋았다. 나는 책을 들고 바깥으로 나왔다.
항상 자리 잡고 독서하는 나무 밑에 철퍼덕 주저앉아 막 몇 페이지를 읽는 찰나였다.
어디서부턴가 흰 나비들이 하나, 둘 주변을 맴돌며 바닥에 사뿐 내려앉았다.
원래 정원 주변에는 나비들이 많이 날아다녀서, 처음에는 눈치채지 못했다.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은, 한 무리의 나비들이 모조리 한 군데에 모였을 때였다.
마치 봐 달라는 것 같은 속도로 날개를 펼쳤다 접기를 반복하는 모습에 시선이 저절로 돌아갔다.
“뭐, 뭐야.”
책에서 눈을 뗀 나는 직사각형 모양으로 네모나게 정렬된 나비들을 보고 당황했다.
내 시선이 닿을 때까지 계속해서 날개를 퍼덕이던 그것들은 마침내 원하는 목적을 이루자, 하얗게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뭐야, 나비가 왜 이래?’
나는 영문을 몰라 휘둥그레 눈을 뜬 채 그 과정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얼마 후.
네모난 나비들이 흰빛과 함께 사라지고, 그 자리에 흰 봉투 하나가 덩그러니 나타났다.
내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는 광경이었다.
멍하니 봉투를 바라보던 중, 이내 그 위에 새겨진 것을 발견했다.
흰 토끼 문양이었다.
“뷘터……?”
- ……계약서는 제 쪽에서 작성하여 서신을 통해 은밀하게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어제 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서신을 통해서 연락해 달라는 내 말을 들어준 것이다.
“의외네. 이런 방법도 쓰고.”
걸걸한 남자 목소리를 내는 토끼보다 훨씬 나았다.
나는 곧바로 바닥에 놓여 있는 봉투를 주워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둘러 방으로 돌아온 후, 책상 앞에 앉아 페이퍼 나이프로 봉투 겉면을 뜯었다.
안에는 다이아몬드 원석 가공 및 유통 계약서와 자산 관리 대리 계약서, 그리고 짤막한 메모 하나가 들어 있었다.
[계약서를 읽어 보시고 서명란에 피 한 방울을 떨어뜨려 주십시오.
그리고 계약 이행을 위해 내일 아침 10시에 해밀튼 스트릿으로 데리러 가겠습니다.
계약서는 그때 가지고 나와 주십시오.]
“……계약 이행?”
고개를 갸웃거리던 나는, 이내 계약서를 읽으며 그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놈이 나를 파악하고 싶다며 내건 조건인, ‘만남’이었다.
계약을 하자마자 그것을 이행하라고 난리니, 참 철두철미한 놈이었다.
나는 잠시 짜게 식은 눈으로 메모를 바라보다가, 이내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그래. 이왕 할 거, 남주와의 데이트라고 생각하자.”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인데 지금까지 데이트 한번 못하고 살아남기 급급했지 않은가.
이제 좀 연애다운 에피소드가 나온 것일 테다.
슬금슬금 드는 불안함을 나는 애써 내리눌렀다.
* * *
다음 날 이른 아침.
나는 조용히 에밀리를 방 안으로 불러들여 치장을 부탁했다.
“아가씨, 외출하시게요? 저 말고 더 솜씨 좋은 애들을 불러 모으시는 게…….”
“몰래 나갔다 올 거야.”
“모, 몰래요?”
그녀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몰래 나가겠다고 마음먹은 이유는 별거 없었다.
집사에게 말하면 분명히 공작이나 데릭의 귀에 들어갈 테고, 외간 남자를 만나러 간다는 사실까지 알려지면 귀찮아지지 않겠는가.
“응. 그러니까 내가 돌아올 때까지 내 방에 사람들 얼씬거리지 못하게 네가 잘 막아 줘.”
“하지만…….”
그녀는 내 말에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정 뭣하면, 내가 오늘 몸이 안 좋다는 핑계라도 대.”
“그, 금방 돌아오시는 거죠?”
“오늘 안에는 돌아오겠지, 뭐.”
나는 화장을 해 주는 그녀의 부드러운 손길을 받으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대충 화장과 머리 손질이 끝난 후, 나는 무릎길이의 하늘하늘한 하늘색의 드레스로 갈아입었다.
보색 효과가 있어서 그런지, 진분홍색 머리칼과 퍽 잘 어울렸다.
중간중간 짙은 청색으로 포인트를 준 드레스의 자수들이 섬세했다. 나름 뷘터 놈의 눈 색깔을 고려해서 고른 것이었다.
‘남주와의 데이트를 위해서 이 정도 준비는 해 줘야지.’
나는 거울을 바라보며 흡족한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어때? 예뻐?”
살랑 몸을 돌려 에밀리에게 묻자, 그녀가 두 손으로 입을 막으며 탄성처럼 쏟아냈다.
“너무너무 아름다우세요. 신전에 새겨진 벽화에서 막 튀어나온 여신 같으셔요.”
“칫, 아부는.”
닭살 돋는 에밀리의 호들갑에 눈을 흘겼지만, 내심 기분이 좋았다.
“자, 이제 나가서 복도에 사람 나다니나 망 좀 보고 와.”
치장이 모두 끝났으니, 본격적인 탈출 시간이었다.
다행히 이른 아침의 공작저는 다들 하루를 시작하며 제 일을 하기 바빠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나는 수월하게 저택의 뒷문을 빠져나와 연무장으로 가는 길에 올랐다.
개구멍을 이용할 생각이었다.
근처에서 훈련 나온 기사들을 마주칠까 우려스러웠기에, 별수 없이 에밀리까지 끌고 나왔다.
들키면 산책하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서였다.
다행히 전부 훈련 중인지, 개구멍 근처는 아무도 없었다.
익숙하게 수풀을 옆으로 밀어 치우는 나를 보며 에밀리가 경악했다.
“세상에, 아가씨! 대체 이런 곳은 언제 또 찾아내신 거예요?”
“나 나가면 원상태로 돌려놔. 알았지?”
“구, 굳이 이렇게 나가셔야겠어요?”
나는 대답 없이 드레스를 걷어 올리고 바닥에 맨 무릎을 댔다.
치장을 하고 망을 보는 데 시간을 꽤 잡아먹어서 벌써 10시에 가까워졌기에 마음이 조급했다.
바닥에 납죽 엎드려 개구멍을 기어 나가는 사이, 에밀리는 연신 ‘세상에, 세상에’ 하며 탄식했다.
금방 바깥쪽으로 나온 나는 흙에 쓸린 무릎을 탁탁 털어내며 구멍 안에 손을 휘휘 흔들었다.
“나 갔다 올게.”
“어, 언제 돌아오실지는 정말 안 알려 주실 거예요?”
“해 지기 전엔 돌아오겠지.”
아무렴, 제 호기심 채우자고 밤늦도록 나를 붙들어 놓지는 않을 것 아닌가.
걱정하는 하녀를 뒤로한 채 다급하게 걸음을 옮겼다.
얼마 후 메인 스트릿으로 나온 나는, 뷘터가 나를 데려다주던 인적 드문 골목 구석으로 곧장 이동했다.
역시 좀 늦었는지, 골목 안에 이미 도착해 있는 커다란 장신이 보였다.
“많이 기다렸…….”
아는 체를 하려던 나는 문득 멈칫했다.
골목 안에는 뷘터 혼자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엊그제 본, 사자 가면이 그의 뒤에서 빼쭉 튀어나와 나를 바라보았다.
‘데이트에 왜 애를……?’
내 눈치를 보는 듯한 아이의 말똥말똥한 눈에 한순간 기분이 이상해졌다.
꼭, 애 딸린 남자와 교제하는 것 같지 않은가.
멍하니 둘을 번갈아 가며 바라보는 중, 뷘터와 눈이 마주쳤다.
군청색 동공이 서서히 커다래지는 것이 보였다.
“오늘은 왜…… 변장을 하고 오지 않으셨습니까?”
놈이 당황한 기색으로 물었다. 나야말로 당황해서 되물었다.
“……변장을 하고 왔어야 했나?”
“저번에 그랬기에 이번에도 당연히 그러실 줄 알았습니다.”
“데이트하자는 거 아니었어?”
“…….”
골목 안에 잠시간 썰렁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그것을 깬 것은 어린아이의 키득거림이었다.
“키킥, 데이트 아닌데~! 데이트 아닌데~!”
사자 가면이 놀리듯이 외쳤다. 나는 여전히 어안이 벙벙한 상태로 버벅였다.
“그, 그럼 어디 가려 했는데?”
“우리 빵 나눠 주러 가는 거예요!”
“빵……?”
아이가 해맑게 외쳤다.
그 순간이었다. 불현듯 눈앞에 흰 네모 창이 떠올랐다.
〈SYSTEM〉 ~메인 퀘스트 : 사라진 아이들의 행방~
[첫 번째. 마법사와 함께 빈민가 봉사 활동하기] 퀘스트를 진행하시겠습니까?
(보상 : 뷘터의 호감도 +5%, 명성 50)
[수락 / 거절]
“봉사…… 활동……?”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눈을 부릅뜬 채 시스템 창의 글씨를 한 번 더 되뇌고 있는데, 제게 한 말인 줄 잘못 받아들였는지 뷘터가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미리 말씀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당연히 바지를 입고 오실 줄 알고…….”
혼자 데이트라고 착각한 것이 민망할 틈도 없었다.
그와 동시에 시스템 창 안의 글씨가 변했기 때문이다.
〈SYSTEM〉 메인 퀘스트이므로 5초 후 자동 수락됩니다.
〈SYSTEM〉 5
〈SYSTEM〉 4
‘이 미친 게임…….’
나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수락]을 눌렀다.
그러자 새로운 네모 창이 떴다.
〈SYSTEM〉 [마법사의 도움]을 받아 퀘스트 장소인 [트라탄]으로 이동하시겠습니까?
[예. / 아니오.]
[예.]를 선택하자, 뷘터가 내게 한 손을 내밀었다.
“우리는 트라탄으로 갈 겁니다. 마법으로 이동할 것이니 불편하시지는 않을 겁니다.”
일전에 한 번 겪어 본 방식이었다. 하지만 그의 손을 별로 잡고 싶지 않았다.
나는 ‘트라탄’이 어딘지도 몰랐다.
이 게임에 빙의된 지 꽤 오래됐지만, 처음 들어보는 지명이었다.
‘조짐이 좋지 않아.’
“……레이디?”
망설이는 나를 뷘터가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봉사 활동’이라는 글자를 봤을 때부터 마음이 삐뚤어져서 그런지, 어서 계약을 이행하라는 무언의 압박처럼 느껴졌다.
‘……그래. 설마 봉사 활동하러 산간 오지까지 가겠어. 수도 근처에도 빈민가가 얼마나 많은데.’
슬쩍 드는 섬뜩함을 내리누르며 나는 울며 겨자 먹기로 그의 손을 맞잡았다.
작은 소망을 되뇌는 사이, 사자가 훌쩍 다가와 비어 있는 내 손을 잡았다.
“삐라띠오, 트라탄!”
기괴한 발음의 주문과 함께, 눈앞이 하얗게 점멸했다.
끼룩끼룩-.
쏴아아- 철썩. 쏴아아- 철썩.
다시 눈을 떴을 때, 우리는 갈매기 떼가 날아다니는 바닷가에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