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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엔딩은 죽음뿐-122화 (122/243)

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122화

“여기가 대체 어디야…….”

나는 흐린 눈으로 주변을 돌아봤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수도의 깔끔한 골목 구석에 있었는데, 이젠 주변에 등대와 범선들이 보였다.

환장할 노릇이었다.

“트라탄입니다. 항구 도시지요.”

혼잣말과도 같은 내 말에 뷘터가 상냥하게 대꾸해 주었다.

“항구 도시? 수도 근처가 아니라?”

“제국 동부의 최전방입니다.”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서 되물었다.

“왜 이렇게 먼 곳까지 와야 하는 건데?”

“전쟁으로 인한 피해가 가장 막심한 곳이라 중점적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봉사 활동을 여주 놔두고 왜 나랑 있을 때 하는 건데, 이 자식아!’

나는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말들을 힘겹게 넘겨 삼켰다.

“일단…… 가 보지.”

어차피 이건 뷘터 잘못이 아니었다. 시스템이 시킨 거였다.

그렇게 다독이며 그를 뒤따랐다.

우리는 둑을 올라 멀찍이 보이는 마을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점점 가까워지는 마을은 한눈에 봐도 황폐해 보였다.

반쯤 부서져 내린 건물과 도로.

어업으로 한창 바쁜 시간에 나돌아다니는 사람 하나 없이, 썰렁하기 그지없는 마을은 꼭 버려진 장소 같았다.

화려한 수도와는 퍽 다른 모습에 나는 조금 당황스러웠다.

전쟁이 끝난 제국의 이면에는 이토록이나 무섭고 참혹한 삶이 남아 있었다.

‘하긴. 아무리 부강국이라고 해도 멀쩡할 리가 없긴 하지…….’

그러나 내가 당황스러운 건, 이 모든 게 너무 현실적이란 사실이었다.

노멀 모드는 불우했던 여주의 꿈과 희망에 가득 찬 수도 라이프만 보여 줬었다.

이런 자세한 내막까진 서술되지 않았다.

왜 하드 모드에서는 진행되는 에피소드들의 배경마저 암울하기 그지없는 건가.

‘하……’

깊은 한숨을 삼키며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였다.

“그때 왔었던 귀족 아줌마 맞죠?”

조용히 내 곁에 서서 걷던 사자 가면이 문득 속삭였다.

나는 놀라 눈을 크게 떴다가, 앞서 걷는 뷘터 놈의 눈치를 보며 목소리를 죽였다.

“……어떻게 알았어?”

“말투랑 목소리요. 기억하고 있었어요.”

“제법인걸?”

“헤헤.”

내 칭찬에 아이가 똘망똘망 눈을 빛내며 웃었다.

나는 그때 지어 주지 못했던 미소를 활짝 지으며 말했다.

“그땐 고마웠어. 네 덕분에 아직 살아 있네.”

정말이었다.

사자 가면이 나서 주지 않았더라면, 뷘터가 쏜 레이저에 맞기 전에 먼저 호감도 폭락으로 죽었을 테니까.

내 감사 인사에 가면 틈새로 보이는 아이의 눈이 한껏 휘었다가, 이내 시무룩하게 쳐졌다.

“아줌마 가고 스승님께 크게 혼났어요.”

“아줌마라니. 내가 아줌마로 보여?”

아름답게 꾸민 모습에도 거침없는 칭호에 나는 정색했다.

“그럼 뭐라고 불러요?”

“페넬로페라고 불러. 내 이름이야.”

“전 라온이에요. 사자에서 따와서 제가 스스로 지었어요. 저는 동물 중에서 사자를 제일 좋아하거든요.”

“그래, 라온.”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만족스럽게 다시 원래 화제로 돌아갔다.

“왜 혼났는데? 날 데리고 들어갔다고?”

“네. 그래도 유물은 잘 발굴했다고 칭찬해 주셨어요. 아줌마, 아니, 페넬로페 덕분이에요!”

“다행이네.”

아직 어려서 그런지 대화가 두서없이 튀었다.

그래도 나는 차분히 아이의 말을 들어주다 빙긋 웃었다.

“……그런데 스승님이 그 이후로 많이 속상해하셨어요.”

“왜?”

“도와주신 분께 지팡이를 함부로 겨눠서 신뢰를 잃었다고요.”

나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먼저 걷던 뷘터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머리 위에 선명히 떠 있는 보라색 호감도 게이지 바가 보였다.

‘그럼 죄책감인가?’

고개를 갸웃거리던 중 라온이 다시 슬그머니 속삭였다.

“페넬로페가 다시 왔던 날에는 가고 나서 기뻐하셨어요.”

“그래?”

“어디부터 봉사 활동을 가면 좋을지 페넬로페가 가자마자 막 계획하셨어요!”

덧붙여지는 말에 눈살을 있는 대로 찌푸렸다.

결국 놈에게 데이트를 할 생각은 아예 없었던 것이다.

‘생각해 보니…… 노멀 모드 때도 거의 봉사만 했잖아.’

무도회에서 만나는 것을 제외하고는 봉사가 곧 여주와의 접선이었다.

심란한 눈으로 놈의 뒤통수를 멀거니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어느새 우리는 언덕길을 걸어올라 마을에 다다라 있었다.

입구 어귀에서 꾀죄죄한 행색의 어린애들이 놀이를 하다가 등장한 외부인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치켜떴다.

‘드레스 입은 귀족 여자 한 명이랑 가면 쓰고 있는 두 명이니, 볼만하겠네.’

나는 남들 눈에 비칠 우리의 모습에 비죽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뷘터는 사람들이 없는 한산한 곳으로 움직였다.

마을 한쪽 공터에 도달한 그는 이윽고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품에서 검은색 주머니 하나를 꺼내 들었다.

“라온. 주변에 사람들이 있는지 확인해라.”

나지막이 내린 명령에 사자 가면이 “뚜라따칸.” 하고 이상한 주문을 외웠다.

사람의 기척을 확인하는 마법 같았다.

“없어요.”

이윽고 확인이 모두 끝난 듯 라온이 대답하자 뷘터는 곧장 행동에 옮겼다.

그는 주머니의 매듭을 풀고 그 안에서 자그마한 무언가를 꺼내어 바닥에 던졌다.

쿠웅-.

그러자, 바닥으로 떨어지던 무언가가 갑자기 거대한 탁자로 변했다.

“무슨…….”

나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그것을 바라보았다.

이어서 그는 연달아 주머니 안에서 작달만한 무언가를 꺼냈다.

얼마 후 해를 가릴 거대한 차양막과 여러 개의 간이 의자와 테이블, 그리고 수프를 담은 커다란 양철통과, 많은 양의 빵을 담은 바구니, 샐러드를 담은 그릇이 차례대로 탁자 위에 나열되었다.

순식간에 공터에 간이식당 같은 모습이 조성되었다.

“마법으로 축소해 놓은 겁니다.”

뷘터가 경악한 나를 돌아보며 머쓱하게 대꾸해 주었다.

그때, 비릿한 향을 실은 바닷바람이 한차례 불어왔다.

딸랑, 딸랑-.

맑은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리자, 천막 끝에 달려 있던 종이 바람결에 흔들리고 있었다.

“이제 사람들이 올 거예요.”

라온이 내 곁에 다가서며 착하게 말해 주었다.

과연, 얼마쯤 지나자 종소리를 들은 사람들이 슬금슬금 몰려들었다. 하나같이 남루한 행색들이었다.

“제가 수프를 나눠 줄 테니, 레이디께서는 빵을 좀 나눠 주시겠습니까?”

뷘터가 내게 권유했다.

어려운 일도 아니었기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빵 바구니 뒤에 가서 섰다.

이윽고 배식이 시작되었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사람들은 식량을 받아 가며 연신 뷘터에게 고개를 조아렸다.

시간이 지나자 사람들이 점점 많이 모였다.

‘……응?’

그러다 문득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료 배식을 받으러 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어린아이들이었다.

어른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아이들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나는 잠시 사람들이 줄어든 틈을 타 뷘터에게 소리 죽여 물었다.

“왜 배식 받으러 오는 사람들이 대부분 어린아이들인 거지?”

이런 것을 물을 줄은 몰랐는지, 그는 약간 놀란 눈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이내 순순히 답을 내주었다.

“……전쟁고아들입니다. 폭격으로 하루아침에 부모를 잃었지요.”

“…….”

“멀쩡한 가정은 무료 배식을 받으러 오지 않습니다. 대잉카 제국인으로서 수치스러운 일로 여기더군요.”

왜 뷘터가 이렇게 먼 최전방까지 봉사를 다니는 건지 좀 이해가 갔다.

그는 어린아이들에게 유독 약했으니까.

왜 이렇게 먼 곳까지 왔냐며 불만스럽게 따져 묻던 아까의 일이 떠올라 마음이 좀 숙연해졌다.

“……그렇군.”

조용히 대꾸한 나는 그 후 묵묵히 빵을 나눠 주는 데에만 전념했다.

다행히 음식은 부족함 없이 넉넉했다.

소진될 정도가 되면 뷘터가 조용히 천막 뒤로 가서 새 음식을 꺼내 가지고 왔기 때문이다.

좀 황당한 일이 발생한 것은 분주했던 주변이 어느 정도 한산해졌을 때였다.

제 몫의 배식을 다 먹고도 가지 않고 얼쩡거리던 검은 머리의 아이 한 명이 또다시 줄을 서서 배식을 타 갔다.

‘배가 많이 고팠나?’

그런데 그 아이는 먹지 않고 어딘가로 후닥닥 사라지더니, 얼마 후 또다시 와서 아닌 척 줄을 섰다.

가면을 쓴 뷘터는 무서웠는지, 수프는 무시하고 곧장 내게서 빵을 받아 가는 것이다.

그 애뿐만이 아니었다. 계속해서 처음인 척 빵을 받아 가는 애들이 몇몇 보였다.

내가 아무 말 없이 빵을 내주자, 점점 더 대담해져서 줄을 서는 간격도 짧아졌다.

“……그렇게 주다간 끝도 없을 겁니다.”

다섯 번째로 검은 머리에게 빵을 주려고 하던 순간.

보다 못했는지 뷘터가 내 행동을 막아섰다.

“헉!”

제게 대놓고 뭐라 한 것도 아닌데, 아이가 지레 겁을 먹고 후다닥 도망갔다.

멀어지는 아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나는 이내 뷘터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넉넉하게 준비해 온 것 아니었나?”

“물론 음식은 남을 만큼 넉넉하게 준비해 왔습니다. 그러나 무조건 많이 준다고 능사가 아닙니다, 레이디.”

그가 가르쳐 주듯 조곤조곤 설명했다.

“몇 번이나 배식을 받는 아이들은 아마 집에 숨겨 두고 또 받으러 오는 것이겠지요. 아니면, 고아들을 통솔하는 패거리들에게 상납하는 중일 겁니다.”

“그 정도는 나도 알아.”

나는 새침하게 대꾸했다.

“알면서도…… 그러셨단 말입니까?”

군청색 동공이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꾀를 부리는 것을 알면서도 빵을 퍼 준 거냐는 뜻이 느껴졌다.

‘봉사 활동 처음 와 보는 철없는 아가씨처럼 느껴지려나.’

나를 바라보는 뷘터의 머릿속을 상상하며 나는 입을 열었다.

“그럼 좀 어때.”

“…….”

“오늘 그대가 여기 올 때까지 거리에 떨어진 빵조각 하나 없나 지켜보면서, 쫄쫄 굶었을 텐데.”

먼 과거 어느 때를 떠올리며, 나는 씁쓸하게 웃었다.

“몇 개 좀 쟁여 두게 놔두면 안 돼? 그래 봤자, 며칠 아껴 먹고 다시 쫄쫄 굶을 거야.”

군청색 동공이 천천히 커다랗게 확장되는 것이 보였다.

마냥 생각 없이 배식하던 내가 이런 소리를 할 줄 전혀 예상치 못한 사람 같았다.

“……제가 아는 누군가는.”

잠시 입술을 달싹이며 할 말을 찾던 그가, 이윽고 답했다.

“저런 아이들을 붙잡고 차라리 이 자리에서 실컷 먹고 가라고 그러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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