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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엔딩은 죽음뿐-123화 (123/243)

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123화

‘여주를 만났구나.’

그것을 알아보기 위해 그를 만난 것이지만, 나는 새삼 충격을 받았다.

그는 이미 여주와 봉사 활동을 한 것이다.

‘그럼 나는 이제 어떡하지?’

예상했던 일이었다. 게임 스토리대로 진행된 게 맞는데.

막상 진짜로 뷘터가 여주를 만나 곧 데리고 올지도 모른다고 확신하게 되자 덜컥 겁이 났다.

제 말 한 마디에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나와는 달리, 그는 알 수 없는 감정이 담긴 눈으로 나를 응시하며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가져가 봤자 힘이 더 센 아이들에게 빼앗길 바엔, 먹어 둘 수 있을 만큼 배부르게 먹어 두라고요.”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건 집에 최소한의 먹을거리가 존재하는 가난에 해당됐다.

“오늘 많이 먹는다고 내일 배가 안 고픈 건 아니잖아.”

상념에서 깨어난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게다가 며칠 굶은 상태에서 과식하면 탈 나. 안 겪어 봤나?”

가면 틈새로 드러난 뷘터의 동공에 찰나, 선명한 감정이 비쳤다 사라졌다.

“……레이디께선 꼭 겪어 보신 것처럼 말씀하시는군요.”

“글쎄. 어떨 것 같아?”

나는 나오지 않는 웃음을 쥐어 짜내어 빙긋 웃었다.

그리고 지금 뷘터가 할 만한 생각들을 예측해 보았다.

평민에서 하루아침에 제국의 하나뿐인 공녀가 된 여자가 감히 가난을 운운하는 걸 괘씸하게 여기고 있을까.

아니면, 불우한 환경에서도 천사처럼 베푸는 ‘진짜 공녀’를 가엾이 여기고 있을까.

“오늘 날 부려먹으면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 실컷 알아보도록 해.”

“…….”

“내가 일일이 다 알려 주면 재미없잖아.”

그가 무슨 이유로 날 봉사 활동에 끌고 왔는지는 이제 상관없었다.

이미 게임은 원 궤도에 올랐으니까.

마음속에서 ‘뷘터 베르단디’란 이름 위로 빨간 엑스가 그어졌다.

배식이 얼추 끝나자 우리는 자리를 이동했다.

아직 나눠 줄 곳이 한 군데 더 남았기 때문이다.

“괜찮겠습니까?”

하늘하늘한 옷차림새 때문인지, 뷘터는 연신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괜찮아.”

홀로 착각한 내 잘못도 있기에 나는 괜찮다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

게다가 가만히 서서 아무 생각 없이 빵만 나눠 주는 일이라 정말 괜찮았다.

우리는 구불구불한 골목길을 가로질러 마을의 가장 끄트머리로 이동했다.

외곽으로 갈수록 건물도, 길을 오가는 사람들도 점점 더 줄어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도달한 마을의 끝, 바다와 맞닿은 절벽 위의 넓은 평야.

건물도 아닌, 허름한 판자로 이루어진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판자촌이 나왔다.

나는 지나오면서 본, 전쟁으로 황폐해진 마을보다 더 열악한 환경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여긴 대체 어디야?”

“마을 사람들에게 쫓겨난 마력을 보유한 사람들이 사는 곳입니다.”

“마력을 보유한 사람들? 그럼, 마법사들이란 말이야?”

“아니요. 마법사라 하기에는 자질과 배움이 부족한…… 말 그대로 보유만 한 사람들입니다. 폭격 이후 마력을 확인하는 수정구를 들여와 대대적으로 검증을 했지요.”

그 말에 나는 더더욱 미궁 속으로 빠지는 것 같았다.

제국인들이 알게 모르게 마법사들을 배척한다는 사실은 이미 들어 알고 있었다.

그러나 다 같이 어려운 처지에 일부 사람들을 더 궁지로 모는 것은 너무 심하지 않은가.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거야? 같은 잉카 제국인이잖아.”

나는 눈살을 찌푸린 채 물었다.

“전쟁의 영향도 있지만, 트라탄의 복구가 쉽지 않은 것은 레일라 신국의 주기적인 공격 때문입니다.”

“레일라 신국?”

“네. 그들의 지향점은 마법사들을 이 세상에서 모두 없애는 것이니까요. 그러니 트라탄 지역민들은 이들을 문제의 원흉으로 여기는 겁니다.”

꽤 해묵은 갈등인지, 뷘터의 목소리엔 별다른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납득이 가지 않았다.

“왜 병사를 보내지 않는 거지? 여긴 영주 없어? 공격이 잦다면 숨어 있다가 소탕하면 되잖아.”

“전쟁에서 패해 주둔지를 잃은 신국의 잔당이 아르키나 제도에 숨어든 후 마법으로 공격을 하는 겁니다.”

“아.”

“그런데 그 주변은 파도가 무척 가파르고 협곡도 많아 접근하기가 어려운 편입니다. 진퇴양난이지요.”

그는 말을 마치고 품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내게로 한 걸음 바짝 다가와 허리를 숙였다.

“무, 무슨…….”

물러설 새도 없이 토끼 가면이 훅 다가오더니, 불현듯 목덜미가 묵직해졌다.

“이걸 꼭 목에 걸고 계십시오, 레이디.”

그가 내게 걸어 준 것을 내려다보았다.

별 모양의 화려한 장식 가운데에 커다란 하얀색 구슬이 박혀 있었다.

“이건…….”

나는 이것이 무엇인지 잘 알았다.

노멀 모드에서 여주가 페넬로페의 독에 당한 것을 증명할 때 요긴하게 쓰인 것이었다.

“고대 유물입니다.”

그의 대답과 동시에, 눈앞이 환해졌다.

〈SYSTEM〉 히든 퀘스트 [고대 마법사의 유물] 획득 완료!

〈SYSTEM〉 [마법사]의 신뢰를 확인했습니다. 보상으로 [뷘터의 호감도 +3%]를 얻었습니다.

호감도가 오르는 중인지 뷘터의 머리 위 보라색이 깜빡거렸다.

나는 갑자기 뜬 시스템 창을 보고 눈을 의심했다.

“근처에 독성을 가진 물질이 있을 시에 색이 변합니다. 특히, 원색을 띨수록 위험한 것이니 즉시 자리를 피하십시오.”

뷘터가 제가 준 것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나는 얼이 빠진 목소리로 물었다.

“이걸…… 왜 나한테 줘?”

왜 여주가 아니라 내게?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는 겁니다.”

그가 내 물음에 곧바로 답했다. 내가 원하는 방향은 아니었다.

“아까 배식했던 곳과는 달리 이곳은 외부인에겐 좀 위험합니다. 레일라 신국의 잔당들이 숨어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

“혹시 모르니 목이 마르더라도, 누군가 주는 물 한 모금 마시지 마십시오.”

뷘터는 진중한 어투로 주의사항을 일러주었다.

“……고마워. 주의하도록 하지.”

나는 여전히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가까운 토끼 가면, 그 틈새로 보이는 그의 눈이 예쁘게 접혔다.

“이곳은 인구가 적으니 금방 나눠 주고 수도로 돌아갈 수 있을 겁니다.”

모처럼 반가운 말을 하며 그가 내게로 숙였던 허리를 폈다.

그리고 우리는 곧장 이동했다.

판자촌을 가로질러 걷는 도중, 그를 알아본 건지 음울한 표정의 사람들이 하나둘 오두막에서 나왔다.

신이 나서 달려오던 마을 안쪽의 아이들과는 달리 여기는 그런 아이들조차 있지 않았다.

멀거니 우리가 하는 양을 바라보기만 할 뿐.

짙은 절망의 냄새에 숨이 턱 막혔다.

절벽의 가장 끄트머리에 선 뷘터는 이내 아까 전 마을에서 했던 것들을 반복했다.

주머니를 꺼내고 그 안에서 축소된 것들을 모조리 꺼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마력을 보유한 자들의 앞이라 그런지 마법을 대놓고 쓰는 것에 거침없다는 점이었다.

좌절한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려고 일부러 그러는 거란 것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사람들은 모든 것이 다 갖춰지고도 한참이 지난 후에야 주춤주춤 초라한 통을 들고 다가왔다.

그 이후로는 아까와 별다를 바 없는 배식의 반복이었다.

수가 적어서 그런지, 뷘터의 말처럼 줄도 금방 끝이 나 버렸다.

“끝이 난 것 같으니 잠깐 앉아서 쉬고 계십시오, 레이디.”

돌연 뷘터가 의자 하나를 끌고 와 내게 권했다.

의아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자 그가 용건을 말했다.

“잠깐 이곳의 촌장님 좀 뵙고 오겠습니다.”

“촌장님?”

“그는 마법사입니다.”

판자촌의 우두머리를 맡는 마법사가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나는 내색하지 않고 순순히 그러라 했다.

“편히 일 보고 오도록 해.”

“감사합니다.”

뷘터는 내게 짧게 묵례하고 서둘러 등을 돌려 경사 아래쪽으로 내려갔다.

마침 나도 다리가 뻐근하게 아파오던 참인지라 잘됐다.

“아이고, 다리야.”

나는 그가 끌고 온 의자 위에 앉는 소리를 내며 철퍽 주저앉았다.

때마침 선선한 바닷바람이 불어와 노동으로 발생한 열기를 식혀 주었다.

나는 앉은 채로 의자를 좀 더 절벽 끝으로 끌어당겨 앉았다.

데이트가 아니라 난데없이 일을 한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어이없었지만, 그래도 확 뚫린 바다를 보니 기분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뭐. 가끔 착한 짓 하는 것도 나쁘지 않네.”

끝도 없이 펼쳐진 푸른 바다, 어느새 뉘엿뉘엿 노을이 지려는 붉은 하늘.

바로 뒤에 펼쳐진 판자촌과는 영 어울리지 않는 그림 같은 풍경이었다.

아름다운 바다와 절벽 아래를 쭉 구경하던 중이었다.

먼 지평선 너머로 흐릿하게 점 하나가 보였다.

‘저기가 혹시…… 아르키나 제도인가?’

맞는다면 생각보다 가까운 거리였다.

뷘터가 오면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하던 때였다.

‘까르륵!’ 하는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함께.

“페넬로페!”

뒤쪽에서 누군가 나를 큰 소리로 불렀다.

돌아보니 라온이 아이들에게 둘러싸인 채 내게 한 손을 흔들었다.

그 애의 다른 쪽 손에 들린 지팡이에서 비눗방울들이 ‘뽕뽕’ 뿜어져 나왔다.

‘같은 처지의 친구들이랑 있어서 그러는 건가?’

아까는 철저하게 마법을 쓰지 않던 라온이 지팡이를 꺼내 들고 있는 모습이 썩 편안해 보였다.

라온은 밝은 표정으로 내게 외쳤다.

“저 잠깐 친구들 따라서 절벽 아래 해변에 갔다 와도 돼요?”

“안 돼.”

나는 칼같이 잘랐다. 라온은 실망하는 기색도 없이 해맑게 되물었다.

“왜요?”

“네 스승님한테 물어봐.”

“스승님 없어서 페넬로페한테 허락받는 건데…….”

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다.

허락해 줘야 하나 고민이 들었지만, 곧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뷘터가 오면 곧 수도로 돌아갈 것이기에.

“……아무튼, 위험하니까 안 돼. 이 주변에만 있어.”

“히잉…….”

우는 소리를 내는 라온을 뒤로한 채 다시 고개를 돌리던 찰나였다.

불현듯 붉은 노을을 배경으로 눈앞이 환해졌다.

〈SYSTEM〉 ~메인 퀘스트 : 사라진 아이들의 행방~

[첫 번째. 마법사와 함께 빈민가 봉사 활동하기] 퀘스트 완료!

〈SYSTEM〉 보상으로 [뷘터] 의 [호감도 +5%] 와 [명성 50]을 얻었습니다.

(명성 total : 460)

‘이제 끝난 건가? 참 보람찬 하루였어.’

시스템 창을 바라보며 억지웃음을 짓고 있을 때였다.

문득 주변이 이상하리만치 고요하다는 자각이 들었다.

더럭 느껴지는 위화감에 휙 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라온?”

분명, 좀 전까지 맑은 웃음소리를 내며 아이들이 몰려 있던 자리가 텅 비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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