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124화
나는 스르륵 일어나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어디에도 라온은 없었다.
“라온! 장난치지 마.”
나는 주춤주춤 절벽을 내려오며 아이를 불렀다.
하지만 라온은 물론이고, 그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아이들의 자취조차 보이지 않았다.
“라온?”
어스름이 내려앉은 판자촌은 기이할 정도로 고요하게 느껴졌다.
원래도 사람 수가 적은 곳이었지만, 갑자기 한순간에 모든 이들이 증발한 것처럼.
섬뜩함이 등골을 타고 흘렀다.
몇 초. 잠깐 시스템 창을 확인한 그 몇 초 짧은 사이에.
타닥타닥- 절벽을 내려가는 발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라온, 장난하지 말고 어서 나와!”
나는 정신없이 판자촌 사이를 뛰어다니며 라온을 불렀다.
‘분명 아이들이랑 숨바꼭질을 하고 있는 거야.’
수십 개의 오두막 뒤편까지 일일이 확인하며 나는 애써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어디에도 라온은 없었다. 어디에도.
나는 별수 없이 남의 세간살이까지 마구 들춰 확인하기에 이르렀다.
“라온!”
나무판자와 천을 얼기설기 엮어 만든 판잣집 안은 대부분 비어 있었다.
그나마 누군가 있어도 라온은 아니었다.
“이봐! 뭐 하는 거야!”
“죄, 죄송합니다. 혹시 아까 저와 같이 배식하던 사자 가면 쓴 아이 못 보셨나요?”
“몰라! 당장 나가!”
분명 아이를 애타게 찾는 내 목소리를 들었음에도 판자촌 사람들은 매정하게 나를 쫓아냈다.
외부인에 대한 경계와 두려움이 강하게 느껴졌다.
판잣집들을 샅샅이 뒤졌지만 결국 라온을 찾지 못했다.
촌장을 만나러 간다던 뷘터 또한 돌아오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하아, 하아…….”
나는 어느새 절벽의 초입, 경사로에 선 채 하염없이 흔들리는 판자촌을 바라보았다.
“얘가 대체 어디 간 거야.”
어느새 노을 진 하늘은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기 직전이었다.
‘혹시, 그 레일라 신국인지 뭔지 하는 놈들에게 잡혀간 거 아닐까?’
앞서 뷘터로부터 외부인에게는 위험한 곳이라는 경고를 들어서일까.
별별 안 좋은 예감들이 다 들기 시작했다.
‘만약 그래서 또 호감도가 폭락하면 어떡하지?’
라온이 사라진 이 순간, 아이에 대한 걱정에 앞서 든 것은 ‘호감도 폭락’이란 두려움이었다.
이런 내가 이기적이고 못됐다는 걸 잘 알았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종종, 흰 토끼 가면을 쓴 뷘터를 처음 만났을 때의 악몽을 꿨다.
나를 향해 겨눠진 빛을 뿜는 지팡이, 손 쓸 틈도 없이 와르르 떨어져 내리던 호감도.
비밀 공간에 들어선 것만으로도 분노할 만큼 구해 온 아이들을 끔찍이 여기는 그였다.
그런데 그 잠깐 새 아이 하나 제대로 보지 못한 나를 알면.
설상가상으로 최악의 상황까지 치달았다면, 간신히 절반을 넘긴 호감도가 다 무슨 소용인가.
거기까지 생각이 이르자, 순식간에 눈에 열이 몰리고 호흡이 거칠어졌다.
“생각해. 어떻게 해야 할지.”
나는 치밀어 오르는 감정들을 필사적으로 내리누르며 냉정하게 생각하려고 노력했다.
이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서는 이성적으로 머리를 굴려야 했다.
그 순간이었다.
- 페넬로페! 저 잠깐 친구들 따라서 절벽 아래 해변에 갔다 와도 돼요?
라온의 맑은 목소리가 귓가를 스쳐 지나갔다.
“아.”
너무 당황해서 방금 전에 라온과 했던 대화도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 애는 마법을 쓸 수 있으니, 몰래 순간 이동했을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었다.
나는 곧장 방향을 틀어 비탈길을 빠르게 달려 내려갔다.
절벽 아래, 인위적으로 조성된 것이 아닌 자연 그대로 층층이 쌓여 있는 커다란 암석들을 밟고 내려가기란 여간 쉽지 않았다.
단화로는 더더욱.
나는 결국 암석 위에 신발을 벗어 놓은 채 드레스를 들쳐 올리고 힘겹게 암석에서 뛰어내렸다.
발바닥에 고운 모래 입자가 닿을 적엔, 해가 완전히 저문 상태였다.
“라온!”
나는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다시 라온을 찾았다.
그러나 백사장은 너무 넓고 어두컴컴해서 어린아이의 작은 몸을 바로 알아보기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는 무작정 드넓은 해변을 맨발로 내달렸다.
그렇게 얼마쯤 뛰다, 걷다, 주변을 둘러보길 반복했을까.
드디어 저 멀찍이서 움직이는 그림자들이 보였다.
“라온-!”
나는 목청껏 아이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그쪽으로 마구 뛰어갔다.
그런데 뭔가 좀 이상했다.
나를 알아본 건지 인영들이 주춤하는 듯하더니, 이내 서둘러서 바다 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이를 악물고 달렸다.
얼추 그림자들의 형체가 보일 만큼 거리가 좁혀졌을 때였다.
화악- 문득 그쪽에서 푸른빛이 터져 나왔다.
그 탓에 어둑해서 잘 보이지 않았던 인영들이 선명히 드러났다.
검은색 로브를 입은 사람 여섯 명이 원형으로 서 있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 포박된 아이들이 서로의 등에 기대어 늘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무슨 짓이라도 한 건지, 모두 정신을 잃은 듯했다.
‘레일라 신국의 일당들!’
나는 눈을 부릅떴다. 우려가 현실이 되었다.
“멈춰!”
나는 이를 악물고 달렸다.
바보가 아닌 이상, 놈들이 마법을 써서 이동하려는 것을 모를 리 없었다.
놈들의 주변으로 푸른빛이 점점 번져 나오더니, 그들의 발밑에 알 수 없는 문양이 빠르게 새겨졌다.
죽기 살기로 달리고 있지만, 과연 놈들이 텔레포트 하기 전에 도달할 수 있을지.
도달하더라도, 과연 나 혼자서 놈들을 저지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그 순간이었다.
놈들에게서 터져 나오는 푸른빛보다 더 환한 네모 창이 눈앞에 떠올랐다.
〈SYSTEM〉 돌발 퀘스트 발생!
마법 주문을 외워 [아이들]을 납치하려는 [악의 세력]을 저지하시겠습니까?
(보상 : 뷘터의 호감도 +3%, 명성 +50% 외 기타.)
[수락 / 거절]
‘수락! 수락!’
뭔가 전개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낄 새도 없었다.
나는 미친 듯이 [수락]을 연타했고, 곧바로 네모 창 안의 글씨가 변했다.
〈SYSTEM〉 [악의 세력]을 향해 마법을 쓰십시오! (마법 주문 : 썬더피룸)
“썬더피룸-!”
마지막 주문만 빠르게 외운 나는 숨 돌릴 새 없이 외쳤다.
그 순간이었다.
하늘에서 번쩍, 하는 섬광이 일었다.
그리고 엄청난 굉음과 함께 여러 줄기의 빛이 놈들의 머리 위로 정확히 내리꽂혔다.
콰앙-!
“으아악-!”
원형으로 모여 있던 놈들이 팝콘처럼 사방으로 튕겨 나갔다.
“으, 으으윽…….”
빠르게 번져 나가던 푸른빛이 꺼지고, 놈들이 신음하며 바닥을 기었다.
‘뭐야, 왜 이렇게 강력해.’
나는 잠깐 달리는 것을 멈춘 채 그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런 식이라면 충분히 6명을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때, 바닥에 쓰러져 있던 놈들 중 한 명이 꿈틀거리며 나를 손가락질했다.
“으, 으…… 저, 저 계집을…… 저 계집부터 제거하고……!”
“썬더피룸!”
나는 헐레벌떡 다시 주문을 외웠다.
콰앙-! 다시 번쩍, 하는 섬광과 함께 놈의 위로 빛줄기가 내리쳤다.
놈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다시 모래사장에 얼굴을 박았다.
그 위로 푸시시, 거뭇한 연기가 솟아났다.
“으으.”
나는 끔찍한 그 광경에 몸서리를 쳤다.
‘완전 아프겠다.’
그러나 공격을 받고도 아직 정신이 있는 놈들을 가만히 놔둘 수는 없었다.
“썬더피룸!”
“썬더피룸!”
“썬더피룸!”
쾅! 쾅, 콰앙-!
꿈틀거리던 세 명의 놈들 위로 추가적인 징벌을 내렸다.
순식간에 놈들은 첫 번째 놈과 같이 연기를 뿜어내며 잠잠해졌다.
사방이 고요해지자, 나는 허겁지겁 아이들이 있는 쪽으로 달려갔다.
정신을 잃은 아이들 틈엔 당연히 사자 가면도 껴 있었다.
“라온!”
나는 조그만 몸을 들쳐 안았다.
살살 흔들어 봤지만, 라온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가면을 벗기고 아이의 상태를 살펴야 하는지, 아니면 다른 애들은 차치하고 얘라도 데리고 빨리 자리를 떠야 하는지 잠시 고민하던 때.
“으으…….”
품에 안겨 있는 몸이 움찔거렸다. 이어서 라온이 미약한 신음을 내며 눈을 떴다.
“라, 라온! 정신이 들어?”
“페넬로페…….”
“안 되겠어.”
다른 아이들한테는 정말 미안한 말이지만, 우선 라온만이라도 데리고 자리를 떠야겠다.
그래서 어디로 갔는지 모를, 빌어먹을 뷘터 놈을 만나서 전해 주고 나머지를 데리고 오든 어쩌든…….
고민을 마친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바로 걸음을 옮기려던 찰나, 작은 손이 덥석 내 옷자락을 잡았다.
“뒤, 뒤에…….”
불현듯 섬뜩한 감각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죽어라!”
지척에서 느껴지는 살기에, 퍼뜩 등을 돌렸을 때는 이미 늦은 후였다.
어느새, 소리 소문 없이 검은색 로브 하나가 내 뒤로 바짝 다가와 있었다.
날카로운 빛을 내는 무언가가 시시각각 내 위로 다가오는 것이 영원처럼 흘러갔다.
나는 입을 벌렸다.
주문을 외쳐도 피하기엔 이미 늦었다는 것을 알았지만, 라온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삐라띠오.”
그런 나보다 한발 앞서 작은 속삭임이 품 안에서 전해졌다.
눈앞이 하얗게 점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