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125화
다시 눈을 뜨자, 눈앞에는 격전이 벌어진 해변이 아닌 전혀 다른 공간이 펼쳐졌다.
나는 거짓말처럼 판자촌이 있는 절벽 위, 풍경을 구경하던 의자 위에 앉아 있었다.
방금까지 품에 안고 있던 아이도, 나를 향해 시시각각 가까워지던 칼날도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이게 대체…….”
혼란스러운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고 있을 때.
불현듯 납치범의 칼날에 맞기 직전, 라온이 작게 주문을 속삭인 것이 떠올랐다.
트라탄으로 올 때 골목길에서 외쳤던 주문과 같았다.
‘이동 마법 주문이야.’
나는 눈을 부릅떴다.
결정적인 순간 라온이 주문을 외워 나를 안전한 곳으로 이동시킨 것이다.
나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절벽 끝으로 달려갔다.
해변을 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거리가 멀고 시야가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그 순간, 저 멀리서 푸른빛이 터져 나오는 것이 보였다.
납치범들이 분명했다.
“라온-!”
내가 당장 할 수 있는 것이 시스템에서 제공해 준 주문 하나뿐이란 사실이 끔찍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허겁지겁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썬더……!”
“위험합니다, 레이디.”
그때였다. 절벽 끄트머리에서 거의 떨어질락 말락 서 있던 나를 누군가의 팔이 막아섰다.
나는 휙 고개를 돌렸다. 보라색 게이지 바가 가장 먼저 보였다.
그 뒤로 눈에 익은 토끼 가면이.
“대체……!”
대체 어디 갔다가 이제야 온 거냐고.
그를 보자 뜨거운 것들이 목구멍까지 단숨에 치올랐다.
그러나 이를 꽉 깨물고 내리눌렀다. 당장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었으니까.
“라온이, 라온이 납치됐어.”
나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닥친 현실을 알렸다.
조금 전 라온이 사라진 것을 알았을 땐 뷘터의 호감도가 폭락할까 봐 두려웠다.
그런데 막상 우려하던 일이 닥치자 그런 것 따위 걱정할 틈도 없었다.
나는 푸른빛이 터져 나온 까마득한 절벽 너머를 손가락질하며 다급히 말했다.
“빨리 막아야 해. 라온이, 납치범들이 저기……!”
“진정하십시오, 레이디.”
그런데 뷘터는 기이할 정도로 차분했다.
당장에 호감도 게이지 바가 반짝이며 분개할 줄 알았는데, 그는 오히려 나를 걱정했다.
“어디 다치신 데는 없습니까?”
“난 괜찮아. 그러니까 어서 라온부터……!”
“라온은 괜찮을 겁니다.”
“……뭐?”
“시간이 많이 늦었습니다. 그만 수도로 모셔다 드리도록 하지요.”
나는 도무지 놈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때였다. 뷘터의 뒤로 하얀빛이 터져 나오더니.
〈SYSTEM〉 [아이들]이 납치되었습니다.
[악의 세력 저지하기] 퀘스트 실패!
나는 돌아가는 상황이 믿기지 않아서 황망히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런 나를 뷘터가 재촉했다.
“그만 가시죠.”
“애가 납치됐는데, 어딜 가!”
“이런 때를 대비해서 수십 번 훈련해 온 아이입니다.”
그는 격양된 나를 단칼에 잘라 냈다.
“안전장치를 여러 개 준비해 두었으니, 걱정하실 만큼 위험한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즉, 네가 걱정하지 않아도 알아서 해결할 테니 신경 끄라는 소리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선을 긋는 놈의 말에 깨달음이 찾아왔다.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머리가 차가워졌다.
나는 냉정한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나? 아이를 미끼로 쓰고, 내가 어떻게 나오는지 시험해 보려고?”
“……그런 것이 아닙니다, 레이디.”
“그럼 내가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데? 그냥 이 모든 것을 우연이라 치부하고 돌아가서, 계약을 없었던 걸로 하면 될까? 그대가 원하는 게 그거야?”
“…….”
공격적인 내 말투에 뷘터는 답이 없었다.
꽤 오래 침묵하던 그는 이윽고 나지막한 한숨을 쉬며 물었다.
“저야말로 이 상황에 대해 레이디께 묻고 싶습니다.”
“…….”
“대체 마법은 어떻게 쓰신 겁니까?”
이번에 말문이 막힌 것은 나였다.
“번개 마법은 다루기 어렵고 파괴력이 강해서 마법사들도 잘 쓰지 않는 공격 마법입니다.”
“…….”
“그런데 당신은, 작은 실수도 없이 완벽하게 적들만 공격했지요.”
그는 이어서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켰다.
그를 따라 나는 고개를 내렸다. 쇄골 아래, 뷘터가 아까 걸어 준 마법 목걸이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 목걸이는 독성뿐만 아니라 마력으로 인한 성질 변화도 감지할 수 있습니다.”
놈이 목걸이에 숨겨져 있는 또 다른 기능을 털어놓았다.
화려한 별 모양의 장식 한가운데에 박혀 있는, 색이 변한다는 구슬.
내 눈에 비친 구슬은 여전히 처음과 같은 하얀색이었다.
“보십시오. 마법을 쓴 직후인데도, 색 변화가 없습니다. 당신에게 마력이 조금도 없다는 증거입니다.”
“…….”
“그런데 저는 방금 전에도, 사냥 대회 전야제 때도 당신에게서 엄청난 마기를 느꼈습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누가 뒤통수를 망치로 때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시스템에 의한 움직임을 이상하게 여기는 사람이 있는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게다가 마력이나 마기는 또 뭐란 말인가.
나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가면에 가려져 있어서 뷘터가 지금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확실한 건.
“……봉사 활동은 핑계였군.”
정말로 이 에피소드는 데이트가 전혀 아니었다는 것뿐.
“내가, 레일라 신국과 관련되었는지 시험해 보려 했던 거였어.”
“저는 확인을 해야 했습니다.”
뷘터가 다급하게 덧붙였다.
“마력을 가진 아이들이 매달 놈들에게 납치당하고 있습니다. 작은 의구심 하나 쉬이 넘길 수…….”
변명처럼 주절거리던 그는 문득 내 표정을 보고 말을 멈췄다.
“……불쾌하게 해 드렸다면 죄송합니다, 레이디.”
그는 더 변명하지 않고 내게 머리 숙여 사과했다.
나는 그저 기가 막혔다.
‘차라리 끝까지 뻔뻔하게 굴든가.’
이제 마음 놓고 화를 낼 수도 없었다.
내 이상 행동을 눈치챈 그로서는 합당한 의심이었으니까.
“내게 그토록 신뢰를 운운하면서 정작 그대는, 나를 전혀 신뢰하고 있지 않았네.”
허탈한 미소가 새어 나왔다.
천천히 고개를 들던 그와 눈이 마주쳤다. 찰나, 그의 동공이 얕게 흔들렸다.
“그래서 어떤데? 이제 내 누명은 벗겨졌나?”
“……여전히 당신이 어떻게 마법을 쓰는지 모르겠습니다.”
“나도 몰라.”
나는 메마른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냥 머릿속에서 주문이 맴돌았고, 입 밖으로 내뱉은 것뿐이야.”
“…….”
“믿지 않아도 상관없어.”
“믿습니다.”
적당히 거짓을 섞은 내 말에 뷘터는 곧장 답했다.
“적어도 아이들을 해치려 들 분이 아니라는 것은 알았으니까요.”
그것참 다행이란 빈정거림은 나오지 않았다.
말이 없는 나를 보며, 뷘터가 그만 상황을 종결시켰다.
“……이제 그만 모셔다 드려야 합니다. 더 지체됐다간 라온의 신호가 끊길 수도 있습니다.”
그 순간이었다.
〈SYSTEM〉 ~메인 퀘스트 : 사라진 아이들의 행방~
[두 번째, 마법사와 함께 라온의 행방 쫓기] 퀘스트를 진행하시겠습니까?
(보상 : 뷘터의 호감도 +5%, 명성 50
거절 패널티 : 뷘터의 호감도 -10%)
[수락 / 거절]
또다시 눈앞이 환해지더니, 환장할 시스템 창이 떴다.
나는 처음 보는 ‘패널티’에 눈을 부릅떴다.
‘제발 좀, 이런 미친 게임아……!’
아이들이 납치된 안타까운 사정과는 별개로, 나는 이 기분으로 더는 뷘터와 함께 있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10%가 너무 컸다.
‘……그냥 거절할까?’
〈SYSTEM〉 메인 퀘스트이므로 5초 후 자동 수락됩니다.
〈SYSTEM〉 5
〈SYSTEM〉 4.
하지만 빌어먹을 시스템은 고민할 새조차 주지 않았다.
나는 결국 눈물을 머금고 말했다.
“……나도 같이 가.”
뷘터가 못 들을 것을 들은 사람처럼 기이한 눈빛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지금 뭐라고…….”
“아이들을 찾으러, 같이 가자고.”
“……이건 마법사인 제 소명입니다.”
“그럼 내 소명이기도 하겠네. 나도 이제 마법을 쓰게 됐으니까.”
“레이디.”
내 대꾸에 그가 서늘해진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그러나 이미 메인 퀘스트는 시작됐고, 나는 더 물러설 곳이 없었다.
“이 기분으로 집에 가면 퍽도 두 발 뻗고 잘 수 있겠어.”
“…….”
“내게 책임을 지우기 싫었으면 처음부터 끌어들이지 말았어야지.”
그보다 더 싸늘하게 쏘아붙이자, 그는 말을 잃었다.
어쨌든 누명이 반쯤 벗겨진 지금의 내 입장으로선 억울하기 그지없는 일이 아닌가.
“그들의 주둔지로 가는 것입니다. 얼마나 많이 모여 있을지, 또 얼마나 위험할지 모릅니다.”
뷘터는 나를 데리고 가는 것이 그리도 탐탁지 않은지 계속해서 말렸다.
“괜찮아.”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사실 하나도 안 괜찮았다.
“긴급할 땐 마법 주문이 또 튀어나오겠지.”
긴급 상황이 오면 또 시스템 창이 발동될 것이다.
“그리고, 그대 혼자보단 둘이 낫잖아.”
“…….”
“시간 없다며?”
영 망설이는 그를 채근하자 그가 결국 마지못해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잡자, 눈앞에 다시 네모 창이 떠올랐다.
〈SYSTEM〉 메인 퀘스트 진행을 위해 [솔레일]로 이동합니다.
눈을 찌르는 하얀빛에 눈을 감았다. 다시 떴을 때, 우리는 파도 치는 해변가에 서 있었다.
“……여기가 어디야?”
나는 낯선 곳을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트라탄은 확실히 아니었다.
“아르키나 제도 근처에 있는 솔레일이라는 작은 섬입니다.”
“섬?”
“트라탄과는 거리가 제법 있어, 한 번에 여러 명이 이동할 수 없기 때문에 놈들이 중간 정류소로 이용하는 곳입니다.”
“그럼 우리도 다시 아르키나 제도로 가는 건가?”
“아니요. 라온의 신호가 저기서 느껴집니다.”
뷘터가 바다로부터 몸을 돌리고 손으로 어느 한 곳을 가리켰다.
그를 따라 덩달아 고개를 돌린 나는 곧바로 눈살을 와작 찌푸렸다.
해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커다란 절벽 아래.
딱 봐도 ‘들어가면 개고생할 것이오.’라 쓰여 있는 것 같은 음산한 동굴이 우리를 반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