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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엔딩은 죽음뿐-126화 (126/243)

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126화

정말 들어가기 싫었지만, 별수 없었다. 나는 앞서 걸음을 옮겼다.

“빨리 들어가지.”

“잠시만.”

뷘터가 그런 나를 잠시 저지했다.

나는 의아한 얼굴로 그를 돌아보았다.

“이걸 신으십시오.”

그가 갑작스럽게 내 앞에 제 신발을 벗어 내밀었다.

상황이 너무 급박하게 돌아가서, 내가 맨발이라는 사실도 잊고 있었다.

나는 뷘터의 커다란 신발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이내 거절했다.

“됐어. 이미 더러워질 대로 더러워졌는걸.”

“동굴 바닥에 날카로운 돌들이 있을지 모릅니다.”

“어차피 나한텐 너무 커서 걷다 보면 벗겨질 거야. 그리고 내가 이걸 신으면 그대는?”

“착용자의 발 크기에 맞게 조절되는 마법이 걸려 있습니다. 저는 발에 강화 마법을 걸었으니 괜찮습니다.”

그는 재차 거절하려는 내게 강경한 어투로 말했다.

“저와 함께 동굴로 진입하고 싶으시다면, 신으십시오.”

신지 않으면 못 들어가게 하겠다는 소리로 들렸다.

오늘 참, 그의 여러 면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알았어.”

나는 마지못해 그가 내어준 신발을 신었다.

발이 헐렁하게 빠질 만큼 커다랬던 신발이 신기하게도 차차 내 발 크기에 맞춰 줄어들었다.

토끼 가면에 로브 차림에 맨발.

누가 보면 미친놈이라고 손가락질할 만큼 괴상한 모습으로 뷘터는 만족스럽게 말했다.

“가시죠.”

우리는 곧장 동굴 앞으로 다가갔다.

과연, 겉모습부터 불길하고 수상해 보이더니 동굴은 일반 동굴이 아닌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마련되어 있었다.

그때 뷘터가 품에서 지팡이를 꺼내 들었다.

‘칙-’ 하는 소리와 함께 그 끝에서 조그마한 빛 덩어리가 피어올랐다.

“미끄러울 수도 있으니 조심하십시오.”

그가 먼저 계단에 올라섰다. 그 뒤를 따라 나 또한 조심조심 계단을 밟고 내려갔다.

똑, 똑-.

바다 아래로 이어진 건지 모르겠으나, 동굴 천장에서 끊임없이 차갑고 짠 물방울이 떨어졌다.

물을 맞고 오만상을 찌푸리던 나는, 묵묵히 가는 길을 밝히는 뷘터를 흘끔 올려다보며 물었다.

“시간이 없으니까 작전 간단하게 설명해 줘.”

뷘터가 휙 나를 돌아보았다. 그의 눈동자가 잠시 난처함으로 물들었다.

“……따로 세운 작전은 없습니다.”

나는 황당해서 되물었다.

“뭐?”

“신국 잔당들의 근거지를 쫓기 위해 라온의 납치는 예전부터 계획했던 것이 맞습니다만…….”

“…….”

“놈들이 오늘 나타나 다른 아이들까지 전부 납치할 줄은 저도 예상치 못했습니다.”

“그대는 정말…… 나를 시험해 보려고 여기까지 온 거였군.”

새삼스럽게 다시 깨달음이 찾아왔다.

그러다 문득 드는 생각에 미간을 좁혔다.

“그 와중에 나를 수도로 데려다줄 생각이나 하다니, 진짜 제정신이야?”

“변명처럼 들리시겠지만.”

뷘터가 답지 않게 주저하며 입을 열었다.

“……저 또한 경황이 없었습니다, 레이디.”

“그게 무슨…….”

“그들이 갑작스럽게 나타났고, 레이디께서는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 바로 마법을 사용하셨지요.”

“…….”

“목적대로 당신이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을 확인했지만, 당신을 섣불리 데려온 것을 후회했습니다.”

나는 눈을 크게 뜨고 뷘터를 올려다보았다.

아까의 그는 마치 모든 것을 예상했던 사람처럼 침착해 보였다.

“그 순간에는, 당신을 먼저 원래 있는 곳으로 돌려놓아야 한다는 생각밖에 안 들더군요.”

그러나 그 이면을 털어놓는 그는 전혀 침착해 보이지 않았다.

그가 고개를 돌려 나와 눈을 마주쳤다.

“이런 저를 이해할 수 없으시겠지요.”

“…….”

“이해해 달라고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레이디. 저 또한 저 자신을 이해할 수 없으니까요.”

언제나 명료했던 그의 눈자위가 잔뜩 충혈되어 있었다.

강박적으로 모든 것을 의심하고, 사방을 경계했던 그는 조금 지치고, 미친 것 같았다.

나는 그의 말에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를 레일라 신국의 잔당이라 의심하고 시험한 것은 이가 갈릴 만큼 화가 났다.

그러나 난데없이 닥친 놈들의 급습에 당황하고 아이들이 걱정되는 것은 매한가지이리라.

“……레일라 신국 잔당들이 왜 아이들을 납치하는 거지?”

사사로운 감정들은 일단 미뤄 둔 채 나는 당장에 닥친 문제에 집중하기로 했다.

바뀐 화제에 뷘터가 잠시 침묵하다가 답했다.

“마법을 쓰기 위해 아이들의 마력을 이용하는 겁니다.”

“마법이 없어야만 진정한 황제가 나온다면서. 그런데 놈들은 왜 마법을 사용하는 거야?”

“지금의 잔당들은 그저 레일라의 추종자들일 뿐, 실질적인 레일라의 힘을 가진 자는 없습니다. 마법사들을 제거해 나가기 위해서 마력을 훔쳐 쓰는 것이지요.”

“마력을 훔쳐?”

“그것으로 마물을 개조하고 조종하는 것입니다. 사냥대회 전야제 때처럼요.”

나는 놈들의 저열함에 눈살을 찡그렸다.

“놈들의 궁극적인 목표가 대체 뭔데? 마법사들을 이 세상에서 모두 없애는 거?”

“그리고, 마법사들이 없는 세상에 레일라를 부활시키려는 겁니다.”

“……부활? 상상 속의 신을 대체 어떻게 부활시키는데?”

무신론자인 나는 그들의 논지가 터무니없게만 느껴졌다.

그런데 뷘터가 무거운 음성으로 부정했다.

“레일라는 신이 아닙니다.”

“그럼 뭔데?”

“마법과 비슷한 힘을 지닌 고대 소수민족입니다.”

“소수민족……?”

“마법사들이 마력과 자연을 매개로 마법을 사용한다면, 그들은 생명을 소진하여 비슷한 힘을 내었다고 합니다.”

“…….”

“그런데 자신들의 생명을 소진시키기 싫으니, 타인의 생명을 갈취해 힘을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이 힘을 축적하고 세상을 점령하기 위해 세운 것이 고대 발타이지요.”

“발타는 마법사들이 세운 나라라고 들었는데…….”

나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황태자 또한 마법사들의 탄압이 발타로부터 시작되었다고 알고 있었다.

그런데 뷘터가 하는 말은 전혀 다른 사실이지 않은가.

감을 잡지 못하는 나를 보고, 그가 무겁게 덧붙였다.

“레일라들이 고대 마법사들에 의해 봉인되던 순간, 그들이 내린 저주로 인해 역사가 변질됐습니다.”

“저주……?”

“세상을 점령하려던 그들을 막고 발타에 봉인한 마법사들은 모두 잊혀졌지요. 저주로 인해 그 마법사들의 후손들은 사람들에게 배척받고 있고요.”

나는 새로 알게 된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이게 사실이라면 뷘터를 포함한 마법사들은 정말로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드 모드에 원래 이렇게 정교한 설정들이 있는 건가?’

알 듯 말 듯 이어지는 스토리에 이유를 알 수 없는 오싹함이 느껴졌다.

그때였다. 뷘터가 불쑥 걸음을 멈췄다.

어느새 계단이 끊겨 있었다.

계단 아래, 깊고 음침한 동굴 길이 이어졌다.

거의 다 도착했는지, 통로 드문드문 등불이 걸려 있는 게 보였다.

그쪽에서 서늘하고 비릿한 바람이 불었다.

완전히 어둠에 잠겨 있던 계단보단 훨씬 밝았지만, 훨씬 더 위험하고 불길하게 느껴졌다.

먼저 움직인 것은 뷘터였다. 나는 마음의 준비를 할 새도 없이 그를 뒤따라 통로 안에 진입했다.

조급한 걸음으로 이동하며 뷘터가 대뜸 내뱉었다.

“저는 이들이 행할 모든 것을 저지해야만 합니다, 레이디.”

애원이라도 하듯 간절하고 필사적인 목소리였다.

나는 노멀 모드에서 나오지 않은 뷘터의 사명에 연신 위화감을 느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레일라가 부활하면 어떻게 되는데?”

“맞서 싸울 마법사들조차 모조리 제거한 세상에 봉인되었던 레일라들이 풀려나면…….”

“…….”

“세상의 종말이 찾아오겠지요.”

그때였다.

훅- 갑자기 동굴 안에 걸려 있던 모든 등불이 꺼졌다.

새카만 암전이 찾아왔다.

“뭐야, 왜 이래? 부, 불 좀…….”

나는 당황해서 뷘터를 찾았다.

그런데 이상했다. 돌발 상황에 곧바로 지팡이를 꺼내 들고 불을 켰을 그가, 감감무소식이었다.

“……이봐.”

나는 방금 전까지 뷘터가 있던 자리로 휙 몸을 돌렸다.

그러나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더듬더듬 어둠 속을 향해 손을 뻗었다.

손끝에 닿은 것은, 뷘터의 팔이 아닌 차갑고 울퉁불퉁한 벽이었다.

“이, 이게…….”

덜컥 겁이 났다.

“뷘터……?”

나는 날카로운 숨을 들이마시며, 뷘터를 찾았다.

패닉에 빠져 그의 원래 정체를 입에 담은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뷘터!”

휙휙 어둠 속을 두리번거리던 그 순간.

아래쪽이 환해졌다. 나는 갑자기 생긴 빛에 허겁지겁 고개를 내렸다.

그리고 눈을 부릅떴다.

“목걸이가…….”

뷘터가 걸어 줬던 목걸이에서 샛노란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 그 목걸이는 독성뿐만 아니라 마력으로 인한 성질 변화도 감지할 수 있습니다.

- 원색을 띨수록 위험한 것이니 즉시 자리를 피하십시오.

목걸이에 대해 설명하던 그의 목소리가 뇌리를 스쳤다.

“그럼 지금 위험하단 소리…….”

“레이디-!”

그 순간이었다. 암벽 저편에서 희미하게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뷘터? 뷘터!”

“괜찮으십니까?”

“어디 있는 거야!”

“함정에 빠진 것 같습니다. 놈들이 동굴 구조를 이중으로…….”

뷘터의 목소리는 엄청나게 멀리서 들려오는 것처럼 작게 웅웅거렸다.

그 때문에 나는 벽에 바짝 달라붙은 채 있는 힘껏 귀를 기울였다.

“그, 그럼 어떡해? 그냥 앞으로 직진해?”

“제가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 그때까지만 잠시…….”

문득 이어지던 뷘터의 목소리가 뚝 끊겼다.

“이봐. 이봐!”

나는 겁에 질려 그를 마구 불렀다.

얼마 후 그의 음성이 다시 들렸다.

좋지 않은 소식을 담고서.

“……레이디, 여긴 지금 마물들이 몰려오고 있습니다. 그쪽 상황은 어떻습니까?”

“여긴 아직 괜찮…….”

“크르르르-.”

문득 귀를 파고드는 이질적인 소리에 나는 퍼뜩 고개를 돌렸다.

어둠 저편에서 기괴한 울음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 자리에 딱딱하게 얼어붙었다.

“레이디?”

“크르르르-.”

뷘터가 다급하게 나를 불렀다.

그와 동시에 이전보다 더 가까운 곳에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여, 여기도 마물이……!”

벌벌 떨리는 목소리로 그에게 이곳에도 마물이 나타난 것 같다고 알리라던 찰나였다.

불현듯 눈앞이 밝아지더니.

〈SYSTEM〉 돌발 퀘스트 발생!

흥분한 마물 떼가 나타났다!

마법 주문을 외워 [마물] 처치하고 [라온]을 찾으러 가시겠습니까?

(보상 : [???]의 호감도 +5%, 라온의 행방)

[수락 / 거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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