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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엔딩은 죽음뿐-127화 (127/243)

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127화

“……시발.”

나는 선명하게 떠오른 네모 창에 쌍욕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미친 것 같은 게임 시스템을 탓할 틈도 없었다.

“레이디, 레이디! 괜찮으신 겁니까?”

뷘터가 대답 없는 나를 부르짖었다.

나는 힘없이 답했다.

“여기도 마물이 나타났어.”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제가 곧 그리로…….”

“됐어.”

네모 창 뒤로 동굴 벽을 타고 꾸물꾸물 기어 오는 검은색 덩어리들을 응시하며, 나는 음울하게 말했다.

“내가 알아서 할 수 있을 것 같아.”

긴급 상황이 오면 시스템 창이 뜰 거라는 ‘설마’가 기어이 사람을 잡았다.

[수락]을 누르자 글씨가 빠르게 바뀌었다.

〈SYSTEM〉 [마물]에게 마법을 쓰십시오! (마법 주문 : 파이어 피숀, 프리즈숀)

~START!~
‘(0/20)’

“크워어어억-!”

벽을 타고 꾸물꾸물 기어 오던 거대한 검은색 덩어리 하나가 확 뛰어올랐다.

날카로운 이가 달린 거대한 입이 쩍 벌어진 채 네모 창을 뚫고 내게로 다가왔다.

“파이어 피숀-!”

나는 앞뒤 잴 것 없이 외쳤다.

화르르륵-! 그러자 다가오던 덩어리가 갑자기 엄청난 불길에 휩싸였다.

“쿠어어어어억-!”

나는 그 열기에 흠칫 뒤로 물러섰다.

화마에 타오르는 마물이 괴성을 지르며 꿈틀대다 이내 축 늘어졌다.

불 때문에 시야가 밝아졌다.

동굴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정확히 마주하게 된 순간, 소름이 쫙 끼쳤다.

내 몸통만 한 미끈거리는 도마뱀같이 생긴 괴물 수십 마리가 꾸역꾸역 내게로 기어 오고 있었기에.

“크워어어어!”

그때, 또다시 한 마리가 나를 덮치기 위해 뛰어올랐다.

“프리즈숀!”

이번에는 마물이 허공에서 ‘쩍’ 하고 얼어붙었다.

얼음 덩어리가 된 마물은 그대로 동굴 바닥으로 하강하더니.

퍼억-! 사방으로 산산조각이 났다.

‘(2/20)’

허공에 떠 있는 숫자가 순식간에 올라갔다.

나는 생각 이상으로 강력한 마법의 세기에 당황했다.

“뭐야. 엄청나잖아.”

얼떨떨한 얼굴로 까맣게 타고, 산산조각이 난 마물들의 시체를 응시하는 중이었다.

“크워어어어-!”

동료의 연달은 죽음에 화가 났는지, 놈들이 포효했다.

나는 그 소리에 놈들을 노려보며 비장하게 읊조렸다.

“다 뒈졌어.”

그때부터 나는 무아지경으로 주문을 외쳤다.

지난번 불곰에 비하면 난이도가 퍽 쉽게 느껴졌다.

도마뱀 마물들의 속도가 빠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파이어 피숀!”

“프리즈숀!”

조금 짜증 나는 건 괴상한 주문을 끊임없이 외쳐야 한다는 것이었다.

‘뷘터와 찢어진 것은 차라리 다행인 건가.’

이 멋대가리 없는 주문을 그 앞에서 외워야 했다면, 나는 수치에 절어 죽었을 것이다.

‘(15/20)’

어느새 마물들을 거의 다 해치운 상태였다.

“파이어 피숀.”

“파이어 피숀.”

나는 다소 성의 없이 기어 오던 두 마리를 한꺼번에 불태웠다.

‘(17/20)’

“쿠웨에에에-!”

타닥, 타다닥-

불에 타서 꿈틀거리는 것들이 역겹기 그지없었다. 동굴 통로 속에 탄내가 진동을 했다.

나는 코를 막으며 오만상을 찌푸렸다.

얼려서 죽이는 게 더 강하고 깔끔했지만, 그러면 동굴이 금방 어둠에 잠겼다.

때문에 주기적으로 불을 피워 내부를 밝혀야 했다.

“파이어 피숀.”

“프리즈숀.”

‘(19/20)’

“케에에에엑-!”

나는 이어서 동굴 천장에 붙어 있던 두 마리를 마저 제거했다.

이제 남은 것은 단 한 마리.

마물을 상대하는 동안 바짝 긴장하고 있던 몸에 그제야 힘이 좀 풀렸다.

아직 라온의 머리털은 구경도 못 했는데, 벌써 지치는 기분이었다.

다가올 마지막 마물을 기다리고 있던 도중. 문득 이상함이 느껴졌다.

“……뭐야. 어디 있지?”

마지막 놈이 나타나지 않았다.

이 마물 새끼들은 혐오스럽게도 천장에도 달라붙어서 기어 오기 때문에 나는 통로를 샅샅이 훑었다.

그런데, 아무리 살펴도 이미 마법으로 죽인 시체뿐이었다.

“도망간 건가?”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한번 허공을 확인했다.

‘(19/20)’

카운트된 숫자는 여전했다.

마지막 한 마리를 죽이지 않으면 퀘스트가 영영 끝나지 않기 때문에, 마음이 초조해졌다.

‘안 되겠다. 내가 먼저 찾아야겠어.’

나는 마지못해 동굴 안쪽으로 천천히 움직였다.

역겨운 괴물들과 조금도 닿기 싫어서 뷘터와 접선했던 벽에 딱 달라붙은 채로 주문만 내뱉던 상태였기 때문이다.

바닥에 난자된 마물 시체를 피해 조심스럽게 몇 발짝 옮겼을 때였다.

쿵-.

불현듯 동굴이 진동했다.

‘……뭐지?’

나는 멈칫했다. 진동은 곧 사라졌다.

잘못 느낀 건가 싶어, 다시 한 발짝 옮겼을 때였다.

쿠쿵-.

이번엔 방금 전보다 더 확실한 진동이 느껴졌다.

“뭐, 뭐야.”

나는 걸음을 완전히 멈췄다.

마물들을 장작 삼아 타오르던 불길도 거의 꺼져 가는 중인지라 먼 곳까지 빛이 닿지 않았다.

나는 숨을 죽인 채 통로 저편을 응시했다.

그 순간이었다.

쿵. 쿵. 쿵-.

이제까지와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커다란 진동이 연속적으로 느껴졌다.

그리고.

“크워어어어어-!”

어둠 속에서 엄청난 굉음이 울려 퍼졌다.

“악!”

나는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귀를 틀어막았다.

쿵, 쿵, 쿵. 진동의 세기는 점점 커지고, 점점 가까워졌다.

“파이어 피숀!”

나는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하고 반사적으로 주문을 외쳤다.

화르륵-! 먼 동굴 저편에 불길이 솟아났다.

곧바로 드러난 광경에 천천히 입이 벌어졌다.

“크워어어어어-!”

통로를 가득 메울 만큼 거대한 도마뱀 마물이 한쪽 머리에 불덩이를 매단 채 내게로 돌진하고 있었다.

“……미친.”

쿵, 쿠웅-!

놈이 버둥거릴 때마다 동굴이 무너질 듯 흔들렸다. 머리 위로 돌가루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그 덕에 정신을 차린 나는 허겁지겁 주문들을 외쳤다.

“파이어 피숀! 프리즈숀!”

“크워어어어억-!”

그러나 놈은 잠시 주춤거릴 뿐, 죽지 않았다.

너무 거대해서 타격이 크지 않은 것이다.

불곰을 사냥하던 때의 상황과 겹쳐졌다.

“파이어 피숀! 프리즈숀!”

나는 뒷걸음질 치며 계속해서 주문을 외쳤다.

하지만 괴물은 죽기는커녕, 오히려 더 흥분해서 날뛰었다.

점점 거리가 좁혀지자, 스멀스멀 두려움이 엄습했다.

문득 뒷걸음질 치던 나는 딱딱한 무언가에 가로막혀 더 움직일 수 없었다.

어느새 통로의 가장 끝에 도달한 것이다.

뒤는 동굴 벽이고, 앞에는 마법이 먹히지 않은 거대한 괴물이 내게 돌진하고 있는 상황.

“크워어어억-!”

한 치 앞까지 다가온 마물이 나를 집어삼키기 위해 주둥이를 쩍 벌렸다.

‘잡아먹힌다.’

몸이 굳었다.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던 그 순간.

“피해, 공녀!”

푸욱- 살을 헤치는 끔찍한 소리와 함께 누군가 거칠게 나를 일깨웠다.

익숙한 목소리에, 나는 번쩍 눈을 떴다.

끼기기긱-. 섬뜩한 쇳소리가 울려 퍼졌다.

누군가, 괴물의 주둥이 안에 칼을 끼워 넣은 채 내 앞을 막아서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찬란한 황금빛 머리가 반짝였다.

“……전하?”

나는 믿기지 않아, 멍하니 그를 불렀다.

내 목소리에 괴물의 주둥이를 막고 서 있던 황태자가 사납게 외쳤다.

“멍청하게 가만히 서서 뭐 해! 죽고 싶나? 빨리 주둥이 안에 마법 써!”

“아.”

그의 말에 퍼뜩 정신을 차리고 재빠르게 입을 열었다.

“파이어 피숀! 프리즈숀!”

쩍 벌어진 마물의 주둥이 안에 마법들이 퍼부어졌다.

“크웨에에엑-!”

확실히 내면에 직접적인 공격을 받자 타격이 있는 건지, 마물이 미친 듯이 요동쳤다.

“으윽.”

버티기 버거운지 칼리스토가 내 쪽으로 주르륵 밀렸다.

그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쉴 새 없이 주문을 외우는 것뿐이었다.

“파이어 피숀, 프리즈숀, 파이어 피숀, 프리즈숀, 파이어 피숀, 프리즈 숀.”

나는 숨도 쉬지 않고 계속해서 마법 주문을 외쳤다.

“크워, 크워어어억-!”

‘(20/20)’

그리고 마침내, 마지막 마물이 주둥이에서 엄청난 연기를 내뿜으며 축 늘어졌다.

동시에 시스템 창과 함께 ‘[???]’의 정체가 드러났다.

〈SYSTEM〉 [마물 때 처치하기] 퀘스트 완료!

보상으로 [칼리스토]의 [호감도 +5%]를 얻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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