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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엔딩은 죽음뿐-128화 (128/243)

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128화

돌발 퀘스트가 끝났다.

사라지는 네모 창의 자취에 일순 모든 긴장이 확 풀렸다.

나는 휘청거리며 벽에 몸을 기댔다.

“공녀!”

그 모습에 황태자가 눈을 크게 뜨며 한달음에 내게로 다가왔다.

“왜 그러지? 어디 다친 건가?”

황태자는 사납게 얼굴을 찌푸린 채 내가 다친 곳이 있는지 샅샅이 훑었다.

느릿하게 깜빡이는 시뻘건 색의 호감도 게이지 바.

그리고 그의 대검에 꽂혀 죽은 거대 도마뱀을 번갈아 바라보자니, 기분이 이상했다.

‘까딱했다간 죽을 뻔했어…….’

마법이 먹히지 않아 가슴이 덜컥 내려앉던 절체절명의 순간.

갑자기 나타난 황금색 머리칼을 봤을 때부터 느껴지던 이 기분을, 대체 어떻게 형용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토록 끔찍했던 놈이었는데.’

나를 걱정이라도 하는 듯한 시뻘건 눈빛이 퍽 낯설었다.

“왜 말이 없어. 어디 다쳤냐니까? 입이라도 후려 맞았나?”

말없이 그를 응시하고 있자, 그가 고갤 숙여 제 얼굴을 불쑥 들이밀었다.

“뭐, 뭐 하시는 겁니까?”

나는 화들짝 놀라 허겁지겁 그를 밀어냈다.

그리고 요동치는 가슴을 꾹 부여잡으며 벽에 바짝 붙었다.

“전 괜찮습니다, 전하. 다친 곳 없어요.”

그 순간, 문득 비릿한 향이 코끝을 스쳤다.

시선을 들어 황태자를 바라보자, 그의 한쪽 소매가 너덜너덜해져 있는 것이 보였다.

그곳에서 검붉은 액체가 스멀스멀 새어 나왔다.

“전하께서야말로 다치셨잖아요!”

나는 경악한 채 소리쳤다.

내가 어디를 바라보는지 알아차린 황태자가 다친 곳을 흘끔 들어 보이더니 센 척을 했다.

“별거 아니야, 좀 긁힌 것뿐이다.”

“별거 아니긴요! 여기 가만 앉아 있어 보세요.”

나는 그를 지나쳐 죽은 마물이 있는 쪽으로 휙휙 걸어갔다.

내게로 바로 달려온 탓에, 황태자의 검이 아직도 마물에 꽂혀 있었기 때문이다.

주둥이를 있는 대로 벌린 채 축 늘어져 있는 마물의 시체는 혐오스럽기 그지없었다.

나는 내가 쓴 공격 마법으로 인해 시커멓게 탄 마물의 주둥이 안에서 황태자의 검을 뽑아냈다.

그리고 그것으로 치마 끝자락을 잘라 내어 ‘쫘아악-’ 길게 찢었다.

검과 잘라 낸 천 자락을 들고 다시 뒤돌자 황태자가 묘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여기 받으세요. 그리고 팔 좀 내 밀어 주시고요.”

그에게 검을 내밀었다.

내 요구에 그는 순순히 검을 받아 검집에 집어넣은 후 다친 팔을 내밀었다.

나는 다친 곳 위에 찢은 치맛자락을 대고 둘둘 말았다.

지혈을 위해 얼추 책에서 봤던 기억대로 따라 했지만, 생각만큼 예쁘게 묶이진 않았다.

“마법 잘 쓰던데. 힐링 마법은 못 쓰나?”

그런 내 행동을 빤히 응시하고 있던 황태자가 대뜸 물었다.

숨길 것도 없어서 나는 즉답했다.

“네.”

“엉성하군.”

“다시 풀까요?”

“농담도 못 하나? 사람이 왜 이렇게 매정해?”

놈이 또 헛소리를 지껄이는 것을 한 귀로 흘려들으며 나는 엉성한 매듭을 마무리 지었다.

금세 붉게 피가 배어 나오는 하늘색의 천 자락을 심각한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을 때였다.

“그런 표정 지을 거 없어. 이런 건 침 바르면 나아.”

머리맡에서 들려오는 태평한 목소리에 내리누르고 있던 감정의 일부가 울컥, 새어 나왔다.

“전하 침은 무슨 포션이세요?”

“이제 아예 대놓고 황족 모독하기로 했나 보군.”

황태자가 오만상을 찌푸리는 나를 보며 재미있다는 듯 픽 웃었다.

그러다 곧바로 표정을 지우고 물었다.

“그보다, 대체 그 꼴로 여기서 혼자 뭐 하고 있던 거지?”

재고 떠보는 것조차 없이 바로 들어오는 직구에 나는 잠시 말을 잃었다.

“요즘 아르키나 제도 주변은 매우 위험해. 게다가 호위도 없이 마물들을 혼자 처치하려 한 건가? 이게 끝이 아니면 어쩌려고?”

“…….”

“저번 곰 사냥 때도 생각했지만, 역시 공녀는 보통 미친개가 아니군.”

나는 매우 억울해졌다.

‘나라고, 이러고 싶어서 이런 줄 아냐!’

답답해 죽을 것 같았지만, 시스템이 시킨 것이라고 얘기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답이 없는 나를 보며 황태자가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설마…… 저번에 준 고고학 자료로도 만족이 안 돼서 이 먼 곳까지 직접 온 건가? 공녀가 그렇게 탐구열 넘치는 사람인지 미처 몰랐군 그래.”

“아니요! 그런 거 아닙니다.”

“그럼?”

“……봉사 활동을 하러 왔다가 같이 온 아이가 레일라 신국 잔당들에게 납치되었어요.”

어디까지 그에게 설명해야 할지 고민하던 나는 별수 없이 적당히 사실을 간추려 말했다.

“그 애를 구하러 여기까지 오게 된 거고요.”

“봉사…… 활동?”

황태자가 내 말에 처음 듣는 단어라도 들은 사람처럼 나를 돌아보았다.

“그대가…… 봉사 활동을?”

“네.”

미묘한 어투에 왜인지 모르게 기분이 좀 나빴다.

황태자가 떨떠름하게 중얼거렸다.

“정말이지…… 그대에게서 들은 말 중 가장 놀라운 말이군.”

“귀족의 기본 소양 아니겠어요.”

놈의 앞담에 이를 악물고 맞받아친 나는, 한발 늦게 반문했다.

“그러는 전하야말로 대체 어떻게 여기 계신 거예요?”

마물로 인해 정신이 없어서 깜빡 잊고 있었지만, 칼리스토의 등장은 확실히 느닷없었다.

새삼스럽게 그를 바라보자, 그가 왜인지 모르게 시선을 피했다.

“……레일라 신국 놈들이 활개를 치고 다닌다는 소식에 황궁에서도 아르키나 제도와 트라탄을 주의 깊게 지켜보는 중이었다.”

“황궁에서요? 그럼 전하께서도 트라탄에 계셨던 거예요?”

“……뭐, 그렇지.”

칼리스토는 한발 늦게 덧붙였다.

“뜬금없이 그대가 이곳에 있는 걸 보고 얼마나 황당했는지 아나?”

“…….”

“덕분에 이런 곳을 다 발견했군. 아르키나 제도 주변에 해군을 깔아 놨는데, 대체 무슨 수로 제국을 오가는지 도통 알 수 없었거든.”

황태자가 동굴 안을 휘휘 둘러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가만히 그의 말을 듣던 나는 불현듯 눈살을 찌푸렸다.

“혹시…… 저를 미행하셨습니까?”

“뭐? 미행은 무슨!”

의심 가득한 내 눈초리에 황태자가 펄쩍 뛰었다.

그게 더 의심스러웠다.

“그럼 어떻게 저랑 같은 곳에 갇히신 겁니까? 제가 마물들을 다 죽이는 동안 어디 계셨고요? 함정 때문에 저와 같이 온 일행도 떨어졌는걸요.”

“크흠. 그건…….”

속사포처럼 의구심 가득한 질문을 던지자 황태자가 크게 헛기침을 했다.

그는 잠시 변명거리를 찾는 듯 새빨간 동공을 굴리더니 툭 내뱉었다.

“황족 비밀이다.”

나는 황당해서 버벅였다.

“……네?”

“알려 들지 마. 다쳐.”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그보다, 공녀. 납치당한 아이를 구하러 가야 한다고 그러지 않았나?”

문득 칼리스토가 내 뒤쪽을 가리켰다.

“그러려면 저 뒤져 버린 마물 새끼를 타고 넘어가야 한다. 시간이 없다고.”

그러더니 쏜살같이 나를 스쳐 지나갔다.

“어, 어…….”

나는 얼이 빠진 채로 그런 황태자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빨리 오라니까 뭐 하나?”

마물의 시체 옆에 도착한 그가 내게 급하게 손짓했다.

‘수상한데…….’

나는 여전히 의심을 거두지 않은 눈으로 칼리스토를 응시하다가, 이내 그를 쫓아 걸음을 옮겼다.

그의 말이 옳았다.

나를 미행했든 어쨌든, 당장 중요한 건 아이들을 구하는 것이니까.

육중하고 펑퍼짐한 마물의 시체가 통로를 틈 하나 없이 메우고 있었다.

그의 말처럼 마물을 타고 넘어야 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과연 칼리스토는 남주답게 다친 손으로도 쉽게 마물을 타고 올랐다.

저걸 어떻게 따라 올라야 할지 막막하게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자, 손잡아.”

순식간에 마물의 머리 꼭대기를 밟고 선 그가, 불현듯 몸을 숙이더니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가만히 그 손을 바라보다가, 곧바로 그것을 맞잡았다.

그 순간, 더는 ‘나를 두고 매정하게 가 버릴 줄 알았는데 의외다.’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때, 칼리스토가 엄청난 악력으로 나를 휙 끌어올렸다.

“으악!”

생각에 잠겨 있던 나는 종잇장처럼 위로 끌어 올려졌다.

질끈 감았던 눈을 떴을 땐, 어느새 마물의 머리 위에 안착한 상태였다.

“어, 어!”

“조심.”

휘청거리는 나를 보고 그가 서둘러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이마에 와 닿는 단단한 타인의 가슴에 나는 튀어나올 듯 눈을 크게 떴다가,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

“……가, 감사해요, 전하.”

놀라서 그런지 심장이 터질 것처럼 벌렁거렸다.

“이, 이제 혼자 갈 수 있어요.”

당황해서 허겁지겁 그의 품에서 빠져나오자, 황태자는 별말 없이 나를 놓아주었다.

그에게 잡혔던 손이 뜨거웠다.

우리는 빠르게 마물을 타고 넘어 일직선으로 이루어진 통로를 걸었다.

얼마쯤 걸었을까.

문득 어두웠던 시야가 밝아지고, 4개나 되는 갈래 길이 나왔다.

“제기랄, 곤란하게 됐군.”

황태자가 욕설을 중얼거렸다.

나 또한 난감한 눈으로 통로들을 바라볼 때쯤이었다.

〈SYSTEM〉 보상으로 [라온의 행방]을 획득했습니다.

눈앞에 네모 창이 떠오르더니, 이내 화살표가 생겨났다.

4개의 갈래 길 중 한 곳을 가리키는 모양새에 반짝 화색이 돌았다.

“전하. 제가 길을 알 것 같아요.”

“그대가?”

“네. 아이의 마법 신호가 느껴져요.”

사실 나는 그런 거 전혀 못 느끼지만, 뷘터가 했던 말을 변명 삼았다.

놀란 눈으로 나를 돌아보던 황태자가 고개를 까딱였다.

“따라오세요.”

우리는 나만 보이는 화살표가 가리키는 대로 황급히 왼쪽 가장 끝에 있는 통로로 들어섰다.

이어진 길은 미로처럼 무척 복잡하고 이리저리 꼬였다.

침입자를 막으려고 일부러 그렇게 만들어 놓은 듯했다.

끊임없이 새로운 갈래 길이 나타났다. 그때마다 시스템이 가리켜 주는 ‘화살표’가 없었더라면, 꼼짝없이 길을 잃고 헤매었을 것이다.

황태자는 적진 한가운데에서 별 의심도 없이 고분고분 나를 따라왔다.

나는 연신 복잡한 심경에 휩싸였다.

한참을 침묵 속에 걷던 중.

세 번째로 화살표가 가리키는 쪽으로 움직이던 나는, 결국 참을 수 없어 먼저 입을 열었다.

“……안 물어보세요?”

“뭘?”

“마법에 대해서요.”

내 물음에 황태자가 잊고 있었던 것을 떠올린 사람처럼 ‘아.’ 하고 침음을 내더니.

“그러고 보니 마법도 꽤 잘 쓰더군. 석궁에 고고학에 마법에. 갈수록 놀라운데.”

“…….”

“걱정할 거 없어, 공녀. 난 마법사에 편견 같은 거 없으니까.”

그는 나를 흘끔 내려다보며 대수롭지 않게 읊조렸다.

나는 멍하니 눈을 껌뻑이며 그를 올려다보다가, 진짜 마음에 걸리던 것을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의심은…… 안 드세요?”

“무슨 의심?”

“제가, 레일라 신국과 한패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요.”

“허.”

그가 기가 막힌다는 듯 헛바람을 터뜨렸다.

“그런 쓸데없는 짓을 왜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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