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129화
나는 당황해서 입을 뻐끔거리다 되물었다.
“쓸데없는 짓…… 이요?”
“그래.”
황태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심드렁하게 이유를 말했다.
“세상 무서울 것 하나 없는 에카르트의 하나뿐인 공녀가, 그런 미친 집단과 한 패거리일 이유가 뭐 있겠나?”
조금의 의심도 담겨 있지 않은 어투에 오히려 당황한 것은 나였다.
나는 눈을 굴리다가 더듬더듬 이유를 지어냈다.
“어…… 실은 레일라 신을 믿는 절실한 신도라서……?”
“하, 그대가?”
황태자가 거침없이 나를 비웃었다. 나는 입을 삐쭉거렸다.
“저는 뭐, 절실히 믿으면 안 됩니까?”
“사냥 대회 전야제에서 레일라 신도들 못 봤나?”
“물론 봤어요.”
뜬금없는 말에 시큰둥하게 대꾸하자, 그가 내 쪽으로 상체를 틀었다.
“그렇게 뭐가 옳고 그른지도 모른 채 무조건 자신의 신념만 믿는 미친놈들은 말이야, 눈이 번들번들하게 뒤집혀 있는 게 보인다고.”
그는 나를 바라보며 제 눈가를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렸다.
그리고 이어서 그 손으로 내 얼굴을 가리켰다.
“그대처럼 그렇게 썩은 생선 눈깔 같은 눈으로 뚱하게 쳐다보는 게 아니라.”
“썩은 생선 눈깔이라니요.”
나는 질색하며 그에게서 한 발짝 떨어져 걸었다.
황태자가 얄밉게 비죽 웃었다.
“게다가 그대가 레일라 신도였다면, 동굴에서 먼저 알아봤겠지.”
“동굴…… 이요?”
“황궁에 포탈을 새기려다 뒈진 그놈, 고대 레일라 일족 중 한 명이더군.”
나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칼리스토를 돌아보았다.
동굴에서 만난 그 유골이 고대 레일라 일족이라는 것은 놀라웠다.
하지만 더 놀라운 점은, 뷘터가 얘기해 주었던 레일라 일족에 관한 이야기를 황태자 또한 알고 있다는 것이다.
“알고…… 계셨어요?”
그 모든 것을 담아 포괄적으로 물었다.
황태자는 내게서 고개를 돌려 앞을 보고 걸으며 무심하게 답했다.
“그대는 전혀 몰랐지.”
“…….”
“알면, 그렇게 태평하게 유물이나 발굴하겠다는 소리는 안 했을 거야. 레일라의 추종자였다면 그 순간 어떻게든 그 포탈을 완성시키려 했을 테니까.”
나는 조금 아연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운 건지, 아니면 그로 인해 나를 전혀 의심하지 않는 것이 안도가 되는 건지…….
이제 나조차도 내 감정을 알 수 없었다.
“게다가, 그 미친놈들이 개조한 마물들을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는데?”
복잡한 마음으로 그를 따라 걷고 있을 때, 불쑥 황태자가 냉소적인 표정을 지으며 덧붙였다.
“토벌하러 갔을 때, 놈들이 자신들은 죽여도 되지만 제발 지하 실험실만은 건들지 말아 달라고 빌었었지.”
“…….”
“실험실로 곧장 쳐들어가니 막 태어난 마물들에게 마력이 모두 소진된 아이들을 먹이로 던져 주고 있더군.”
“아, 아이들을요? 무슨 그런 미친 인간들이…….”
나는 상상 이상으로 잔혹한 레일라 신도들의 악행에 경악했다.
이미 그 참혹한 잔상들을 보고 와 무감해진 건지, 황태자는 여상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아까 죽인 거대한 개체를 만들기까지 얼마나 많은 인간들을 납치하고, 또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겠나?”
“…….”
“그러니 그대가 신국의 잔당이라면 그토록 끔찍하게 여기는 마물들을 그렇게 무식하게 다 죽이지 않았겠지.”
“무식……?”
놈의 무식하다는 발언에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왜. 전야제 때도 망설임 하나 없이 마물들을 향해 무식하게 석궁을 쏴댔잖아.”
놈이 충격으로 버벅대는 나를 보며 조소했다.
울컥해서 무어라 반박하려 했지만, 나는 도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한참 후 다시 한번 조심스럽게 물었다.
“제가…… 의심을 피하기 위해 일부러 아군을 죽인 거라면요?”
내 행동을 이상하게 여기는 사람이 있다는 것에 겁이 났었던 걸까.
나는 자꾸만 황태자를 떠보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그러니까, 제가 진짜 레일라의 추종자인데…… 고도의 연기를 하는 것이라면요?”
모서리를 돌자, 새로운 갈래 길이 나왔다. 여러 통로로 이어지는 분기점이었다.
“그러면 어떡하실 거예요?”
황태자가 천천히 걸음을 멈추고 나를 돌아보았다.
“그럼 어쩔 수 없지.”
하얀색 화살표가 한 곳을 가리켰지만 나는 멈칫 걸음을 멈추고, 그를 마주 보았다.
“그대가 마법으로 이 빌어먹을 잉카 제국을 멸망시켜 줘 봐.”
그가 장난치는 것처럼 씨익 웃으며 말했다.
진지한 물음에 산통 깨는 듯한 놈의 행동에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저 농담하는 거 아닙니다.”
“나도 농담하는 거 아닌데? 진심이야, 공녀. 그대가 진짜 레일라 일족이라서 잉카 제국을 멸망시키려 드는 거면 내가 물심양면으로 돕지.”
“그게…… 황태자가 돼서 하실 말씀이세요?”
나는 기가 막혀서 연신 헛바람을 터뜨렸다.
“왜 못해? 이 나라는 썩을 대로 썩었어. 이제 멸망할 때도 됐지.”
그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내가 황제가 되면 가장 먼저 황족이랑 귀족 놈들 목부터 베어서 마물 밥으로 던져 줄 거야.”
“전하.”
“그 후엔 놈들의 재산을 모두 굶주린 백성들에게 뿌리는 거지. 국고고 뭐고 탈탈 털어서 나눠 준 다음, 물자라곤 아무것도 남지 않은 상태에서 전쟁을 일으킬 거다.”
“…….”
“이 빌어먹을 나라가 폭삭 망해서 재가 돼 버릴 때까지 말이야.”
그가 진담을 하는지 농담을 하는지 도통 알 수 없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러면 우리 황제 폐하께서 무덤에서 피눈물을 흘리면서 뛰쳐나오시려나?”
자신이 황제가 되면, 지금의 황제는 무조건 죽어 있을 것이라는 걸 암시하며 그가 사납게 웃었다.
그 모습이 조금 섬뜩했다. 농담이라 치부하기엔 생각보다 구체적인 계획이었다.
아무 말도 못 한 채 마냥 그를 바라보고 있자, 그가 내 어깨를 가볍게 두어 번 두드렸다.
“그러니까 내가 수고스럽게 전쟁을 일으키기 전에 공녀가 먼저 황궁을 점령하도록 해. 난 상관 말고. 진짜 괜찮으니까.”
나는 떨어지지 않는 입을 열어 무겁게 대꾸했다.
“……아쉽게도, 저는 레일라가 아닙니다.”
“그거참 애석한 일이군.”
내 의심으로 시작된 대화는 황태자의 미친놈 같은 면모를 되새기는 것으로 끝이 났다.
“자. 이제 어디로 가야 하지?”
칼리스토가 사방으로 나 있는 굴들을 휘휘 둘러보며 물었다.
나는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리고 화살표가 있는 쪽을 가리켰다.
“이쪽으로 가면…….”
“레이디.”
그때, 누군가 왼쪽 굴에서 튀어 나왔다.
익숙한 토끼 가면의 모습에 나는 깜짝 놀라 소리쳤다.
“뷘……!”
뷘터를 부르려던 나는 불현듯 옆에 황태자가 있음을 깨닫고, 가까스로 바꿔 불렀다.
“비, 빈수야!”
급한 마음에 무척이나 한국적인 이름이 튀어나왔다.
“빈수……?”
황태자가 내 말을 따라 하다가, 이내 불쾌한 표정으로 뷘터를 턱짓했다.
“누구지?”
갑자기 등장한 황태자의 모습에 가면 틈으로 보이는 군청색 동공이 커다래졌다.
“저는…….”
난감한 기색을 보이는 뷘터를 대신하여, 외쳤다.
“저, 저와 함께 온 봉사 활동 정보 상단 관계자예요! 저처럼 마법을 쓸 줄 알고요.”
“뒤집어쓴 괴상한 가면은 뭐야? 감히 황족을 앞에 두고 바로 벗지 않다니, 불경하군.”
황태자가 불편한 심기를 목소리에 고스란히 드러내며 허리춤에 찬 검을 더듬었다.
놈이 미친놈처럼 칼을 빼 들기 전에 나는 허겁지겁 뷘터의 앞을 막아 섰다.
“먼 동방에 있는 나라에서 온 사람이라 저게 풍습이랍니다. 저걸 벗으면 악령에 쓰인다고 굳게 믿고 있대요.”
황태자는 못마땅한 듯 눈살을 찌푸렸다.
“공녀는 뭐 저런 자까지 알고 지내나?”
“트라탄처럼 정말로 지원이 필요한 곳에 봉사 활동을 알선해 주는 업체가 생각보다 많지 않더라고요.”
“……그렇군. 돌아가면 지원을 늘려야겠어.”
칼리스토가 내 변명에 마침내 떨떠름한 목소리로 수긍했다.
나는 미안한 얼굴로 뷘터를 돌아보았다.
비밀을 지키기 위해 그렇게 하자는 의미로 눈짓하자, 뷘터의 동공이 지진 나듯 흔들렸다.
이윽고 그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한 번 끄덕이며 말했다.
“저 통로만 지나가면 바로 라온이 있는 곳입니다.”
“타국인이라더니 제법 말을 잘하잖아?”
황태자가 의외라는 눈으로 뷘터를 응시하다가 오만하게 명령했다.
“마법사라며? 네가 앞장서라.”
뷘터는 고분고분 명령을 따랐다.
‘일이 왜 이렇게 돌아가는 거야, 진짜.’
그 뒤를 따라가며 나는 불안함에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설마 황태자가 눈치채는 건 아니겠지……?’
뷘터가 후작이자 마법사임을 들키는 건 내 알 바 아니었다.
하지만 그와 여기까지 온 것을 황태자에게 들키면 왠지 썩 좋지 않은 일이 벌어질 것 같았다.
나는 문득 황태자가 여전히 멈춰 서 있는 것을 깨닫고 그를 불렀다.
“전하, 안 오세요?”
석연치 않은 눈으로 먼저 통로 안으로 들어가는 뷘터를 빤히 응시하던 황태자가 내 부름에 그제야 걸음을 옮겼다.
“공녀. 저것 좀 봐.”
내 쪽으로 다가온 그가 불현듯 목소리를 죽여 속삭였다.
‘들킨 건가?’
가슴이 철렁했다. 나는 당황스러운 기색을 숨기기 위해 노력하며 덩달아 소리 죽여 물었다.
“뭐…… 뭘요?”
“맨발이야.”
황태자가 뷘터의 발을 슬쩍 가리켰다.
“……이미 악령에 씐 게 아닌가? 어느 나라 인간인지 모르겠지만, 보통 미친놈이 아니군.”
앞서가던 뷘터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황태자가 소리를 줄였다고 한들, 들리지 않을 리가 없었다.
‘미안하다.’
졸지에 악령에 씐 미친놈이 된 뷘터를 속으로 애도하며 나는 모르는 척 외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