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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엔딩은 죽음뿐-130화 (130/243)

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130화

* * *

마지막 남은 통로답게, 구불구불한 길이 끊길 듯 말듯 끝도 없이 이어졌다.

자꾸만 지체되는 시간에 뷘터가 중간에 텔레포트 마법을 시도했지만, 길이 너무 복잡하고 정확한 위치를 몰라 실패했다.

우리는 계속해서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이러다 아르키나 제도까지 도달하겠군. 대단한 놈들이야.”

황태자가 중간에 얼굴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동감이었다.

이렇게 깊고 복잡한 굴을 섬 아래 만들어 놓은 놈들의 치밀함에 소름이 돋았다.

‘그냥 지나가는 엑스트라 악역인 줄 알았는데.’

사냥 대회의 전야제 때까지만 해도 나는 놈들을 우습게 봤었다.

‘레일라 신국’이라는 이름도 허접해 보였고, 시스템 덕분에 놈들을 수월하게 제압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곰곰이 되새겨 보면 절대로 허접하다고 여길 수 없었다.

철통같은 검열과 방어를 뚫고 황궁의 깊숙한 곳까지 마물을 가지고 침투한 놈들이었다.

‘……고위 귀족 중 조력자가 있다는 소리네.’

놈들의 마수가 어디까지 뻗어져 있는지 알 수 없어, 새삼 무섭게 느껴졌다.

그와 동시에 자꾸만 스토리가 놈들과 엮이는 것 같다는 위화감을 떨칠 수 없었다.

라온에게 가까워질수록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몸을 잠식했다.

‘무슨 일이 터지기 전에 빨리 이 미친 게임에서 빠져 나가야 돼.’

나는 내 앞에서 걸어가는 빨간색과 보라색 놈들을 바라보며 다시금 되뇌었다.

내 목표는 탈출, 그뿐이라고.

한 번 더 굴곡을 따라 방향이 바뀌었을 때였다.

“아아악-!”

불현듯 멀리서 누군가의 처절한 비명이 텅텅 메아리쳤다.

“헉.”

화들짝 놀라 멈칫 걸음을 멈춘 우리 셋은, 이내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입을 다물고 빨리 걸었다.

얼마 안 가 저 멀리서 희미한 빛이 보였다.

마침내 구불구불한 통로가 끝이 난 것이다.

출구를 앞두고 돌연 가장 앞서가던 뷘터가 뒤를 돌았다.

“여기서부터 투명 마법을 쓸 겁니다.”

그가 신속하게 품 안에서 지팡이를 꺼내 들고 우리 쪽으로 휙 휘둘렀다.

축복이라도 받는 것처럼 터져 나온 하얀 빛 가루가 나와 칼리스토의 머리 위에 쏟아졌다.

별다른 느낌은 없었다.

마법을 거는 것을 마쳤는지 뷘터가 주의사항을 말했다.

“크게 소리치지 않는 이상, 소음은 어느 정도 차단이 됩니다. 하지만 마법이나 마력을 드러내시지 마십시오. 중첩되면 투명화가 풀립니다.”

“그럼 몰래 다가가서 무력으로 죽여 버리는 건 되나?”

황태자가 저 같은 질문을 했다. 뷘터는 침착하게 답했다.

“안에 얼마나 있는지 알 수 없으니, 아이들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하기 전까지 최대한 자제해 주십시오.”

알아들었다는 듯 황태자가 성의 없이 고개를 까딱였다.

그 순간이었다.

“다가오지 마! 다, 다가오지…… 우으으-!”

아까보다 훨씬 더 가까운 곳에서 섬뜩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우리는 눈을 한번 마주쳤다가 곧장 출구로 달려갔다.

어둡고 답답한 굴을 빠져나오자, 놀랍게도 거대한 공간이 나타났다.

하얀 석고와 대리석으로 이루어진 정교한 벽과 기둥.

그간 지나쳐 온 컴컴한 동굴과는 전혀 다른 광경이었다.

“호오. 놈들의 근거지를 잿더미로 만들어 놨더니 여기에 이런 곳을 만들어 놨군.”

황태자가 주변을 휘휘 둘러보며 살벌한 얼굴로 웃었다.

“여신이시여!”

그 순간, 여러 명이 외치는 목소리에 그쪽으로 휙 시선이 돌아갔다.

공간의 가장 끝에는 꼭 신전을 방불케 하는 커다란 조각상과 제단이 있었다.

흰 로브를 입고, 흰색 가면을 쓴 가느다란 체구의 사람이 그 위에 서 있었다.

아래에는 검은색 로브를 얼굴까지 뒤집어쓴 수십 명의 인간들이 바짝 몸을 엎드린 상태였다.

“부디 남은 먹이 또한 섭취하시옵소서!”

엎드려 있는 놈들 중 가장 앞에 있던 놈이 제단 앞까지 바짝 기어가 성토했다.

“아직 기억을 완벽히 되찾지 않아 낯서신 것을 압니다. 하지만 대의를 위해서, 힘을 축적하셔야만 합니다.”

‘먹이……?’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단 위에는 딱히 음식이랄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놈들이 칭하는 ‘먹이’가 음식이 아님을 알게 된 건 바로 직후였다.

엎드려 있던 검은색 로브 두 명이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제단 옆의 뒤편에서 무언가를 마구 끌고 오는 것이 아닌가.

“놔, 놔! 이거 놔!”

쩔그럭-! 거친 쇠사슬 소리와 함께 끌려 나온 것은 젊고 건장한 남자였다.

숨어 있었던 듯 남자의 얼굴이 공포심에 절어 있었다.

놈들은 남자를 단숨에 제단 아래로 끌고 가 우악스럽게 무릎 꿇렸다.

“이거 놔-!”

남자가 거칠게 반항했지만 소용없었다.

온통 검은 로브 사이에서 유일하게 두드러지는 흰 로브를 입은 인간이 제단에서 천천히 내려왔다.

나는 흰색 로브가 하는 행동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놈은 두려움에 질려 반항하는 남자 앞에서 잠시 망설이는 듯하더니, 곧 손을 뻗었다.

“하, 하지 마! 다가오지……!”

이곳에 도착하기 직전에 들었던 것과 비슷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그런데 놀랍게도, 흰색 로브가 얼굴을 쓰다듬자 남자가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내 쪽에서 보이는 것은 뒷모습뿐이라 무슨 짓을 한 건지는 알 수 없었다.

남자가 잠잠해지자, 이윽고 흰색 로브가 그 위로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정면으로 본 놈은 코 아래가 드러난 가면을 쓰고 있었다.

망설이는 듯한 좀 전의 몸짓과는 달리, 붉은 입술이 매혹적으로 호선을 그리고 있는 게 보였다.

‘……여자?’

그것을 알아차렸을 무렵, 고개를 숙인 여자가 남자에게 천천히 입을 맞췄다.

‘대체…… 뭐 하는 거야? 왜 갑자기 키스를 해?’

나는 도무지 무슨 짓을 하는 건지 알 수 없어 황태자와 뷘터를 흘깃 곁눈질했다.

그들 또한 나와 같이 도통 무슨 상황이 벌어지는 건지 몰라 어리둥절한 눈치였다.

상황이 반전된 것은 몇 초 후였다.

“우우웁-!”

흰색 로브를 입은 여자의 키스를 얌전히 받아들이던 남자가 돌연 괴로운 신음을 흘리며 몸을 펄떡였다.

움직임은 점차 격렬해졌다. 하지만 그를 잡은 놈들도, 입을 맞추는 여자도 꿈쩍하지 않았다.

나는 너무 놀라서 숨도 멈춘 채 그 장면을 지켜보았다.

그런데 그 순간, 믿기지 않는 일이 벌어졌다.

벌벌 경련하던 젊은 남자의 건장한 몸이 차츰차츰 부피를 줄여 가더니…….

바람 빠진 풍선처럼 순식간에 바짝 쪼그라들었다.

“푸하-!”

여자가 마침내 입을 떼고 숨을 들이켤 때, 그녀의 앞에는 뼈만 남은 시체에 걸쳐진 헐렁한 옷가지만이 펄럭였다.

계속해서 잡고 있던 검은색 로브 둘이 내던지듯 남자, 아니, 시체를 놓았다.

털썩, 촤아악-! 딱딱한 바닥에 닿자마자 바짝 메마른 시체는 가루가 되어 사방으로 흩어졌다.

‘흐읍.’

막을 새도 없이 일어난 일에 나는 날카롭게 숨을 들이켰다.

“제기랄, 대체 저게 뭐야.”

황태자가 거칠게 욕설을 내뱉었다.

끔찍한 장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것은 뷘터와 칼리스토 또한 마찬가지인 듯했다.

“거울을 가져와라!”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제대로 인지하기도 전에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갔다.

앞장서서 ‘먹이’를 먹으라고 종용하던 검은색 로브 놈이 몸을 일으키며 버럭 명령을 내렸다.

지위가 좀 더 높은 놈인 듯했다.

그러자 엎드려 있던 다른 놈들이 우르르 일어나 조각상 뒤편으로 사라졌다.

얼마 후 그들이 데리고 나온 것은 기절한 여섯 명의 아이들과 정체 모를 크고 화려한 상자였다.

놈들이 한 명을 제외한 나머지 아이들을 제단 아래 대충 내려놓았다.

‘라온!’

사자 가면을 알아본 나는 눈을 부릅떴다.

“이것이 가장 많은 마력을 가지고 있어 제법 쓸모가 있는 듯해 보입니다.”

“…….”

“나머지는 적당히 마력을 뽑아 낸 후 마물들의 밥으로 던져 줄까 합니다.”

명령을 내렸던 놈이 흰색 로브에게 고개를 조아리며 끔찍한 소리를 지껄였다.

그 순간, 눈앞에 흰 네모 창이 떠올랐다.

〈SYSTEM〉 ~메인 퀘스트 : 사라진 아이들의 행방~

[두 번째. 마법사와 함께 라온의 행방 쫓기] 퀘스트 완료!

〈SYSTEM〉 보상으로 [뷘터]의 [호감도 +5%]와 [명성 50]을 얻었습니다.

(명성 total : 460)

나는 완료된 퀘스트를 확인하고 뷘터와 칼리스토에게 다급하게 물었다.

“이, 이제 어떡해요?”

“수가 너무 많아. 게다가 저 흰색 놈, 섣불리 건들면 안 되겠어. 반항할 수 없게 무슨 수작을 부리는 것 같군.”

황태자가 눈살을 있는 대로 찌푸린 채 흰색 로브를 노려보았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그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이봐, 타국인.”

“예?”

“기회를 봐서 내가 저놈의 시선을 끌 테니 넌 밑에 있는 아이들을 안전한 곳으로 이동시켜라.”

빠르게 말을 쏟아낸 황태자가 이번에는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공녀, 그대는 몰래 접근해서 저 사자 가면을 챙겨. 그리고 덩달아 이동 마법으로 탈출한다. 알아들었나?”

그 짧은 시간에 계획을 짠 건지 황태자의 목소리는 거침없었다.

그의 전략은 완벽했다. 문제는 나였다.

“저, 저 이동 마법 못 쓰는데요?”

“……뭐?”

황태자가 내 말에 황당하다는 듯 나를 돌아보았다.

“마법 쓸 줄 알잖아? 그런데 이동 마법은 못 쓴다고?”

“그, 그게…….”

‘X발. 시스템이 알려 주는 대로만 마법을 쓴다는 것을 어찌 말하리오.’

대꾸할 변명이 생각나지 않아 우물쭈물거릴 때였다.

“저건……! 안 돼.”

문득 뷘터가 어딘가를 바라보며 침음을 내뱉었다.

가면 틈으로 보이는 그의 눈이 딱딱하게 경직되어 있었다.

나와 황태자도 덩달아 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제단 뒤로 돌아간 흰색 로브가 화려한 상자의 뚜껑을 손짓으로 열었다.

상자 안에서 무언가가 허공으로 떠올랐다.

무언가가 부서져 생긴 파편처럼 모서리마다 날카로운, 주먹만 한 크기의 조각들이었다.

흰색 로브는 가벼운 손짓으로 그것들을 허공에 배열했다.

파편이 제자리를 찾아갈수록 완성되어 가는 부분에서 푸른빛이 새어 나왔다.

“저걸 발동시키면 안 됩니다.”

뷘터가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황태자가 물었다.

“저게 뭔데?”

“고대 레일라 일족이 사용하던 유물입니다. 상대를 가장 절망스러운 상황 속으로 끌어들여서 정신을 파괴하는 겁니다.”

뷘터가 혼란스럽다는 듯 중얼거렸다.

“아무리 나이가 어리다지만, 마법사들의 견고한 정신을 대체 무슨 수로 건드려서 세뇌하는 건가 싶었는데…….”

“라, 라온에게 사용하려는 거지?”

나는 그의 말뜻을 알아듣고 다급히 물었다.

그때였다.

화악-!

불현듯 제단 쪽에서 푸른빛이 폭발적으로 터져 나왔다.

“라투리카!”

아차 할 새 없이, 뷘터가 지팡이를 휘두르며 앞으로 달려 나갔다.

“뷘! 아니, 빈수야! 어디 가!”

나는 당황해서 그를 불렀다. 그런 그의 뒷모습에서 무형의 막이 스르륵 흘러내리는 게 보였다.

마법이 중첩돼서 투명화가 풀린 것이다.

“침입자다!”

뜬금없이 나타난 뷘터를 보고 검은색 로브 놈들이 우왕좌왕했다.

“아직도 안 뒈졌나 보군! 여신님을 보호하라! 마물들을 풀어! 어서!”

흰색 로브 옆에서 조언하던 놈이 명령을 내리자, 놈들이 각자 품 안에서 검은색 주머니를 꺼냈다.

“바툼!”

입구를 열고 놈들이 무어라 짧게 외치자 주머니 안에서 수십 마리의 도마뱀 마물들이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쿠웨에엑-!”

“빌어먹을. 마법 쓰지 말랬으면서 본인이 쓰고 앉았군.”

무용지물이 된 계획에 황태자가 불만스럽게 외치며 거칠게 칼을 뽑아 들었다.

“여기 잠깐 있어 봐, 공녀!”

그리고 서둘러 뷘터를 뒤따랐다.

“저, 전하! 빈수야!”

나는 뭐라 답할 틈도 없이 홀로 덩그러니 남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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