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의 엔딩은 죽음뿐-131화 (131/243)

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131화

콰앙-!

황태자가 뷘터를 뒤따르는 즉시, 장내에 굉음이 울려 퍼졌다.

나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고개를 돌렸다.

주문을 외우며 뛰쳐나간 뷘터의 지팡이에서 빛이 일직선으로 뿜어져 나왔다.

그것은 곧장 여자가 맞추고 있던 조각들로 쏘아졌다.

어느 사이에 부서진 유물을 거의 다 완성한 건지, 허공에 푸른빛을 내는 커다랗고 판판한 형태가 되어 떠올라 있었다.

뷘터가 쏜 마법과 그것이 충돌했다.

우우우웅- 거센 돌풍이 몰아쳤다.

짧은 시간 치열한 대치가 진행됐다. 그러나 얼마 후.

파삭, 파사삭-. 파열음과 함께 유물에서 나오는 푸른빛이 서서히 줄어들었다.

얼마 안 가 빛은 완전히 꺼져, 본래의 탁한 회색으로 돌아갔다.

‘……거울?’

무척이나 지저분하고 더러웠지만, 빛이 꺼지면서 순간적으로 보인 그것은 거울의 단면이었다.

뷘터는 빛이 꺼진 것에 그치지 않고, 계속해서 마법 레이저를 쏘았다.

파편에서 형태를 갖춘 유물을 다시 파괴하려는 모양이었다.

“쿠웨에엑-!”

하지만 그 시도는 얼마 안 가 무산됐다.

그를 향해 돌진해 온 마물 때문이었다.

징그러울 만큼 쩍 벌어진 입이 뷘터의 하체를 삼키려 들기 직전, 뒤따라온 황태자가 가까스로 칼을 도마뱀의 미간에 내리꽂았다.

“이봐, 타국인. 상황 봐 가면서 하라고! 황태자씩이나 돼서 내가 네놈의 엄호까지 맡아야 하나?”

황태자가 인상을 팍 쓴 채 사납게 소리쳤다.

뷘터가 마법으로 몰려오는 마물 하나를 얼리며 다급하게 답했다.

“완전히 파괴해야 합니다. 저 유물은 마법사들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악영향을 미치는……!”

“그렇게 걱정되면 아이들부터 다른 곳으로 옮기고 하든지!”

황태자의 말이 일리가 있었는지, 뷘터는 더 고집하지 않고 빠르게 마물부터 처단해 나갔다.

확실히 남주 둘이 날뛰니, 악당들은 짤도 되지 않았다.

‘역시 남주는 남주야.’

확확 줄어드는 마물의 수를 보며 나는 내심 안도했다.

메인 퀘스트가 더는 나오지 않는 것을 보니, 이대로라면 금방 아이들을 구하고 에피소드가 끝이 날 것 같았다.

“쿠웨에엑-!”

마법으로 여러 마리를 한꺼번에 공격하는 뷘터 덕분에 황태자는 제단 근처까지 빠르게 도달했다.

촤아악-!

“커억!”

“아악!”

“으윽.”

그는 망설임 없이 주머니에서 마물을 꺼내는 놈들을 검으로 베었다.

조금 전 마법을 걸 때 그가 뷘터에게 물었듯, 무력으로 공격하는 탓에 황태자의 투명화는 풀리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그의 암살에 순식간에 여러 명이 죽었다.

“투, 투명화를 하고 숨어든 놈이 더 있다!”

갑작스럽게 피를 흩뿌리는 동료들의 모습이 퍽 이상했던 걸까.

놈들은 금방 숨어든 누군가가 있음을 알아차렸다.

“여신님을 보호하라! 마물을 더 풀어!”

황태자의 칼에 썰려 나가던 놈들이 상급자의 명령에 신속하게 제단 주변으로 뭉쳤다.

놈들 중 일부가 이전에 황궁에서 봤을 때처럼 빛나는 수정구를 꺼내 들었다.

나머지 일부는 검은색 주머니를 붙들고 알 수 없는 주문을 외쳤다.

쿠우웅-!

육중한 진동이 울려 퍼졌다.

“쿠워어어어-!”

엄청난 괴성에 나는 두 손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앞을 바라본 나는 눈을 의심했다.

“미친.”

이제껏 나왔던 것들과는 차원이 다른 크기의 마물 다섯 마리가 주머니에서 튀어나와 넓은 공간을 꽉 채웠다.

아까 전 내가 황태자의 도움으로 간신히 물리쳤던 것보다 훨씬 더 커다란 크기였다.

쿵, 쿵-!

괴물들이 움직일 때마다 바닥이 진동했다.

“쿠웨에에엑!”

거대한 그림자들이 머리맡에 내려앉았다.

“제기랄. 가지가지 하는군.”

황태자가 피 묻은 칼을 고쳐 잡으며 나지막이 욕설을 내뱉었다.

이제껏 상대하던 것들과는 차원이 다른 압도적인 크기에 주춤하는 것은 뷘터 또한 마찬가지였다.

‘왜 점점 하드해지는 거야. 이쯤에서 끝나야 하는 거 아니냐고!’

모퉁이에 선 채 이도 저도 못 하고 있던 나는, 스멀스멀 불안감이 엄습하는 것을 느꼈다.

그런 나와는 달리 뷘터와 황태자는 이내 빠르게 정신을 다잡고 묵묵히 마물들과 싸워 나가기 시작했다.

칼리스토가 마물의 다리를 베자 뷘터가 지팡이로 마법을 퍼부었다.

그러나 워낙 크기가 커 별다른 타격을 입히지 못했다.

공격당한 마물들이 오히려 흥분해서 날뛰었다.

조종하기도 힘든지, 엉뚱하게 신국 놈들을 짓밟으려 드는 개체도 있었다.

황태자는 기세를 몰아 마물들이 놈들을 공격하도록 유인했다.

“마물에게 밥을 던져라!”

여의치 않은지 우두머리가 거세게 소리쳤다.

“아, 안 돼!”

마물 밥이 뭔지 알고 있던 나는 눈을 부릅떴다.

나는 앞뒤 잴 것 없이 막무가내로 아이들이 있는 제단 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시스템의 힘을 빌리지 않은 상태에서 놈들을 막을 수 있을지 자신 없었다.

그러나 뷘터와 황태자가 마물로 고전하는 와중에 뭐든 해야 했다.

하지만 내가 제단 가까이 도달하기도 전에 검은색 로브 한 놈이 아이 두 명을 한꺼번에 둘러멨다.

“하지 마!”

나는 이를 악물었다.

“삐라띠오!”

그 순간 마물 한 마리를 힘겹게 상대하고 있던 뷘터가 빠르게 주문을 외쳤다.

그 순간 흰빛과 함께 바닥에 늘어져 있던 다섯 명의 아이들이 사라졌다.

나는 달리는 것을 멈추고 뷘터를 돌아보았다.

“으윽!”

그는 그 대가로 거대한 도마뱀 괴물이 휘두르는 꼬리에 후려 맞은 후 반대편 벽까지 날아가 처박혔다.

주르륵, 바닥으로 미끄러져 내린 그는 잠시 경련하다 이내 축 늘어졌다.

“흐으.”

나는 겁에 질려 숨도 못 쉬고 그것을 바라보았다.

‘……죽었나? 죽었으면 어떡하지?’

지금 일어나는 광경들이 너무 비현실적이면서도 현실적으로 다가왔다.

게임의 일부라고 생각했던 모든 것들이 실제 상황처럼 느껴질 때마다, 나는 두렵고 미칠 것 같은 심정을 느꼈다.

무섭고, 여기서 빨리 나가고 싶다.

“……녀! 공녀!”

딱딱하게 얼어붙은 채 패닉 상태에 빠져 있던 나를 일깨운 것은 다름아닌, 칼리스토였다.

“페넬로페 에카르트!”

나를 부르는 선명한 이름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그는 세 마리나 되는 마물들의 공격을 피해 바닥을 뒹굴며 소리쳤다.

“정신 차려! 내가 시간 끌고 있을 때 빨리 사자 가면 데리고 도망쳐!”

그 말에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수많은 검은색 로브들이 막고 서 있는 제단 위.

흰색 로브의 발치에는 아직도 사자 가면을 쓴 작은 몸이 정신을 잃은 채 누워 있었다.

나는 홀로 힘겹게 마물을 상대하는 황태자를 흔들리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아무도 그댈 못 봐. 그대는 해낼 수 있어!”

그가 날아오는 꼬리를 칼로 쳐 내며 다시 한번 외쳤다.

그 말에 거짓말처럼 두려움이 가셨다.

나는 그를 향해 고개를 미친 듯이 끄덕여 보이곤, 이내 다시 다리에 힘을 줬다.

제단 근처에 도달하기까진 삽시간이었다.

황태자의 말이 맞았다.

뷘터가 정신을 잃었어도 투명 마법은 유지가 되는지, 내가 제단을 오르는 것을 놈들 중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흰색 로브는 푸른빛을 잃은 유물을 소중하게 꼭 끌어안고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칼리스토가 있는 쪽이었다.

능히 마물을 상대하는 투명 인간에게 정신이 팔린 듯했다.

나는 몸을 수그려 살금살금 그 여자 아래로 기어갔다.

얼마간의 거리를 두고 멈춘 후, 손을 뻗어 라온의 후드 자락을 꽉 움켜잡았다.

이제부터는 여자가 눈치채지 못하게 라온을 제단 끝으로 끌어가는 것이 관건이었다.

스으윽-.

라온을 아주 조금, 내 쪽으로 끌어당겼다.

다행히 흰색 로브고, 검은색 로브들이고,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좋아. 이대로 조금씩…….’

그에 용기를 얻은 나는, 라온을 조심조심 끌고 제단의 끝으로 뒷걸음질 쳤다.

그러나 얼마 안 가 이런 속도로는 택도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황태자는 수세에 몰려 있었다.

이대로 가다간 그마저도 뷘터와 같은 꼴이 되고, 신국 놈들이 라온을 가지고 하려던 일을 완수할 것이다.

‘차라리 그냥 들쳐 안고 마구 뛸까?’

가면 쓴 여자의 눈치를 보며 그런 생각을 하던 중이었다.

그때였다.

팟-! 여자가 껴안고 있던 유물에 희미한 빛이 들어왔다.

그 푸른빛이 엎드려 있는 나를 향해 쏟아졌다.

‘뭐, 뭐야!’

당황해서 굳은 채로 그것을 바라보고 있을 즈음, 유물 안에 무언가가 떠오르는 것이 보였다.

그와 동시에, 흰색 로브가 이상 현상을 감지했다.

“거울이…….”

빛나는 거울을 내려다보던 여자가, 불현듯 정확히 나를 바라보았다.

가면 너머의 파란 눈과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다.

‘X 됐다.’

직감적으로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순간이었다.

〈SYSTEM〉 ~메인 퀘스트 : 사라진 아이들의 행방~

[세 번째. 악의 세력으로부터 납치된 아이들 구하기] 퀘스트를 진행하시겠습니까?

(보상 : 모든 남주들의 호감도 +5%, 명성 50 외 기타.)

[수락 / 거절]

‘수락! 수락!’

나는 두 번 볼 것 없이 [수락]을 연타했다.

곧바로 글씨가 바뀌었다.

〈SYSTEM〉 마법을 외치십시오. (마법 주문 : 데키나 레바티움)

눈앞에 뜬 마법 주문이 이번만큼 눈물 나게 반가운 적은 처음이었다.

공격을 하라는 등 주문의 종류를 알려 주던 다른 때와는 달리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았지만, 그런 것을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데키나…….”

허겁지겁 입을 뗐을 때, 알 수 없는 뜨거움이 목 아래에 들끓었다.

나는 이를 악물고 그것을 꾹 내리눌렀다.

그리고 사력을 다해 소리쳤다.

“데키나 레바티움-!”

쿠콰콰아앙-!

지금까지와는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진동과 굉음이 지하를 뒤흔들었다.

어디서부터 나오는 건지 알 수 없는 짐볼 같은 원형의 큼지막한 빛 덩어리가 사방에서 폭격처럼 쏟아져 나왔다.

그것들이 탱탱볼처럼 사방으로 튀어 나가며 모든 것을 때려 부수고, 짓밟았다.

쾅, 쾅, 쾅-!

무시무시한 진동, 귀를 찢을 듯한 커다란 소음, 앞을 볼 수도 없을 만큼 번쩍번쩍 빛나는 섬광들.

마침내 굉음이 줄어들고 빛 덩이들이 대부분 사라졌을 무렵.

나는 드러난 광경에 할 말을 잃었다.

다 부서지고 무너진 기둥의 잔해 사이로, 거대한 도마뱀 마물 다섯 마리가 새카만 연기를 뿜으며 모두 죽어 있었다.

그 아수라장 한가운데 서 있는 황태자가 아연한 얼굴로 나를 응시했다.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