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132화
“너, 너는……!”
흰색 로브 옆에 서 있던 우두머리 놈이 나를 보고 삿대질을 했다.
놈뿐만 아니라 제단 앞에 서 있던 모든 검은색 로브들의 시선이 내게로 꽂혔다.
마법을 써서 빼도 박도 못하고 투명화가 풀린 것이다.
“대체 어떻게 사장된 고대 마법을……!”
믿기지 않는다는 듯 퍼들퍼들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던 놈이 불현듯 바락 외쳤다.
“저 계집을 죽……!”
“……데키나.”
나는 조용히 주문의 앞부분을 읊조렸다.
“흐읍!”
명령을 받고 내게로 다가오려던 놈들이 날카롭게 숨을 들이켜며 흠칫하고 움직임을 멈췄다.
방금 전 내가 쓴 마법의 위력이 얼마나 큰지 모두가 제 눈으로 직접 본 상태였다.
“움직이지 않는 게 좋을걸? 저 도마뱀들 꼴 나고 싶지 않으면.”
나는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비열하게 웃었다.
그리고 라온을 품에 안고 당당하게 엎드려 있던 몸을 일으켰다.
내 경고가 확실하게 먹힌 듯, 놈들은 내 행동에 움찔거릴 뿐 다가올 생각을 하지 못했다.
나는 여전히 유물을 든 채 고요하게 나를 응시하는 흰색 로브를 흘끔거렸다.
‘정신을 파괴하는 것이라 그랬지. 보면 안 돼.’
최대한 의식적으로 여자의 품을 보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천천히 거리를 벌렸다.
내게로 뿜어지던 희미한 빛줄기를 벗어나 제단 위에서 막 내려왔을 때였다.
그때까지도 미동 없이 나를 바라보던 흰색 로브가, 갑자기 품에 안고 있던 거울을 번쩍 쳐들었다.
“디 아쑴.”
나지막이 주문을 외는 목소리와 함께, 거울 안에서 푸른빛이 터져 나왔다.
그 빛은 곧장 내게로 내리쬐었다.
아차 할 틈이 없었다. 나는 라온의 머리를 내 쪽으로 끌어안고 질끈 눈을 감았다.
그러나 눈을 꽉 감고 유물을 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빛이 동공을 파고들었다.
순식간에 시야가 푸른색으로 점멸했다.
그 사이로 수많은 장면들이 스쳐 지나갔다.
너무 빠르게 변화해서 그것들이 정확히 무엇을 가리키는지 알 수 없었다.
“으으!”
라온을 껴안고 있는 탓에 손으로 눈을 가릴 수도 없었다.
나는 보일 듯 말 듯 휙휙 비치다 사라지길 반복하는 환영에 도리질을 치며 뒷걸음질 쳤다.
“지, 지금이다!”
그때 기회를 잡았다는 듯 우두머리가 회심에 차 외쳤다.
“공녀-!”
멀찍이서 나를 애타게 부르는 황태자의 음성 또한 간발의 차로 들렸다.
‘정신 차려, 이러다 죽어!’
나는 어지러운 환각 속에서도 이성을 되찾으려 노력했다.
가까스로 마법 주문이 떠올랐다. 나는 입을 벌렸다.
“데, 데…….”
뜨거운 것들이 다시 목 밑에 드글 드글 들끓었다.
왜인지 모르겠으나, 두 번째로 마법 주문을 내뱉기가 무척이나 힘겹게 느껴졌다.
“저 계집을 죽이고 애를 뺏어와!”
놈들이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나는 치오르는 열기와 필사적으로 싸웠다.
그리고 마침내, 무언가 울컥 입을 타고 쏟아져 나오는 느낌과 더불어 마법 주문이 튀어 나갔다.
“데키나 레바티움-!”
처절한 외침이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그리고.
쿠웅, 쿠콰아아앙-!
온몸이 휘청거릴 만큼의 진동을 수반한 굉음이 다시 한번 일어났다.
시각을 점령했던 푸른빛이 사라졌다.
나는 그제야 힘겹게 눈을 뜰 수 있었다.
푸르게 이지러지는 시야를 되찾기 위해 몇 번이나 눈을 깜빡였다.
간신히 눈앞이 또렷해졌을 때, 내 앞에는 또 한 번 어마어마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뭐, 뭐야.’
방금 전까지만 해도 제단 주변에 뭉쳐 있던 수많은 검은색 로브들이, 폭탄이라도 떨어진 것처럼 사방에 널브러져 있었다.
대부분이 피를 흘린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죽은 듯했다.
쾅, 콰아앙-!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눈앞에 거대한 무언가가 휙 스쳐 지나갔다.
“아아악!”
아직 남아 있는 검은색 로브 몇 명이 비명을 지르며 혼비백산 흩어졌다.
하지만 그도 잠시였다. 뒤이어 날아온 빛 덩이에 처맞고 놈들은 종잇장처럼 날아갔다.
엄청난 파괴력이었다.
‘헐.’
나는 입을 떡 벌렸다.
마물을 죽였을 때보다 족히 두 배는 커 보이는 크기의 수많은 탱탱볼들이 장내에 미친 듯이 튀어 다니고 있었다.
고작 마물을 죽이고 기둥이나 좀 부숴 먹던 조금 전은 약과였다.
내가 주문을 외워 만든 빛 덩어리들은, 마치 이 공간에 있는 모든 것을 소멸시킬 듯한 기세였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내게 공격이 미치는 것은 아니었다.
휘익-!
그때, 날아온 빛 덩어리 하나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처박혔다.
흰색 로브가 서 있는 제단 위였다.
콰앙-! 귀청을 찢는 굉음과 함께 거센 바람이 불어닥쳤다.
강한 기운이 폭발하듯 뻗어져 나왔다.
“윽.”
라온을 안고 있던 나는 손 쓸 틈도 없이 제단 근처에서 주르륵 밀려 났다.
그나마 주변에 위험을 초래할 만한 기둥의 잔해가 없어서 다행이었다.
가까스로 다리에 힘을 줘서 밀려나는 것을 멈췄을 무렵.
“여, 여신님!”
누군가 악을 쓰듯 소리를 내질렀다.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던 나는 문득 눈을 크게 떴다.
흰색 로브가 제단 위에 쓰러져 있었다.
“여신님! 저, 정신 차리십시오!”
검은색 로브가 그런 그녀에게 헐레벌떡 다가갔다.
티 하나 없이 하얗기만 하던 로브 위로 붉은 물이 점점이 번지는 것이 보였다.
날아온 빛 덩어리에 정면으로 맞은 것인지, 여자가 들고 있던 유물이 그 주변으로 산산조각 나 있었다.
‘본의 아니게 뷘터가 하려던 일을 대신해 줬네.’
얼떨떨한 심정으로 그것을 응시하고 있을 때였다.
불현듯 내 발치에도 반짝이는 것이 눈길을 끌었다.
“이건…….”
부서진 거울 조각 중 하나였다.
빛 덩어리 마법으로 인해 부서지면서 여기까지 튕겨져 나온 것 같았다.
그것은 마치 내가 집어 주길 바란다는 듯 반짝거렸다.
기시감이 느껴졌다.
나는 허리를 숙여 한 손으로 그것을 집어 들었다.
그와 동시에, 콰앙-!
또 한 번의 굉음이 울려 퍼졌다.
아직도 사라지지 않고 날뛰는 빛 덩어리 중 하나가 제단 뒤에 있는 석상에 처박힌 것이다.
쿠쿵, 쿠르르릉-! 석상과 천장이 한 번에 무너졌다.
그리고. 쏴아아아아- 그 틈새로 느닷없이 물줄기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짜고 비릿한 냄새가 퍼졌다.
동굴이 부서져 바닷물이 침범하는 중이었다.
“가셔야 합니다, 여신님!”
난장판 속에서 아직도 죽지 않고 살아 있는지, 검은색 로브가 도통 몸을 가누지 못하는 여자를 마구 일으켜 세웠다.
놈이 한 손으로 수정구를 꺼내 들고 무어라 중얼댔다.
그러자 수정구에서 푸른빛이 뿜어져 나오더니 놈들의 주변을 에워쌌다.
본능적으로 놈들이 도망치려는 것임을 알아차렸다.
‘여기서 다 죽여야 돼!’
다시 한번 주문을 외치기 위해 입을 벌리던 찰나였다.
“데키나……!”
간신히 정신을 차린 여자와 또다시 눈이 마주쳤다.
가면이 부서지면서 다친 건지 여자는 피가 흘러내리는 한쪽 얼굴을 손으로 감싸고 있었다.
하지만 깊게 쓰고 있던 후드가 너덜너덜하게 찢어져, 가리고 있던 머리통이 다 드러난 상태였다.
나는 주문을 외치려던 것도 잊고 눈을 부릅떴다.
그 순간, 벽이 무너져 내리는 소리도 바닷물이 쏟아져 들어오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숨이 멎었다.
거센 바람결에 휘날리는 사랑스러운 분홍빛 머리카락.
나를 응시하는 푸른색 눈동자.
“……여주?”
나는 내뱉으면서도 내가 보고 있는 것을 의심했다.
‘말도 안 돼. 잘못 보고 있는 거야.’
하지만 아무리 얼굴 반쪽을 가렸다 한들, 게임을 이미 해 본 나는, 노멀 모드를 모두 깬 나만은 모를 수 가 없었다.
게임 일러스트와 완벽하게 일치하는 여자의 외양을.
그들을 감싸는 푸른빛이 점점 더 거세졌다.
그때였다.
“공녀!”
누군가 내 어깨를 거칠게 잡아 돌렸다.
황금빛 머리칼이 눈앞에 흩날렸다.
“허윽.”
그제야 멈췄던 호흡이 터져 나왔다.
“저, 전하.”
나는 거칠게 헐떡이며 황태자를 불렀다.
칼리스토가 내 품에서 라온을 빼내어 안으며 다급하게 말했다.
“뭘 그렇게 멍하니 서 있어? 우리도 빨리 빠져나가야 해!”
“하, 하지만 저기…….”
나는 혼비백산하며 제단 위를 돌아보았다.
쏴아아아-. 그곳은 엄청난 양의 바닷물이 쏟아져 내릴 뿐 텅 비어 있었다.
“그대가 미친 여자처럼 마법을 퍼부은 덕분에 동굴이 무너지고 있어. 지금 안 나가면 꼼짝없이 수장당할 거야.”
그 말에 나갔던 혼이 조금씩 돌아오는 것 같았다.
“뷔…… 아니 빈수는요?”
나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뷘터를 찾았다.
황태자가 빠르게 걸음을 옮기며 답했다.
“두 번째로 마법 공격을 할 때쯤 정신을 차리더군. 그대가 동굴을 모조리 부숴 먹기 전에 아이들을 데리고 먼저 빠져나가라 명했다.”
썩 듣기 좋은 소린 아니었지만, 나는 크게 안도했다. 다행이었다.
찰박, 찰박. 어느새 발목까지 바닷물이 차오른 상태였다.
우리는 허겁지겁 빠져나온 통로로 뛰어가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쿠우우우웅-!
그러나 얼마 가지 않은 상태에서 불현듯 동굴이 무너질 듯 흔들렸다.
“아악!”
나는 짧게 소리 지르며 몸을 움츠렸다.
“빌어먹을! 이 염병할 마법은 쏜 후에 조절하지 못하는 건가?”
황태자가 거칠게 욕설을 내뱉었다.
나는 무척 억울했다.
‘누군들 시스템이 주는 마법이 이렇게 강력한 줄 알았겠냐고!’
그러나 동굴을 부숴 먹은 것이 다름 아닌 나였으므로 아무런 대꾸도 할 수가 없었다.
황태자와 나는 더욱 속력을 내어 동굴을 내달렸다.
몇 번의 굉음이 더 울리고 얼마간 정신없이 뛰었을까.
쿠구구구구궁-.
지금까지와는 느낌이 조금 다른 진동이 시시각각 다가오기 시작했다.
나와 황태자는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콰아아아악-!
동굴 저편 너머, 넘실거리는 시커먼 것이 무서운 속도로 우릴 뒤쫓고 있었다.
다름 아닌, 거대한 파도였다.
“아아아아악-!”
황태자와 나는 동시에 비명을 지르며 죽기 살기로 달렸다.
그러나 인간의 다리로는 몰아닥치는 파도의 속력을 이길 수 없었다.
‘X발, 이젠 하다못해 익사 루트냐고요, 이 미친 게임아-!’
시커먼 바닷물이 몸을 덮치기 직전, 마지막 든 생각은 당연히 게임 제작자에 대한 저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