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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엔딩은 죽음뿐-133화 (133/243)

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133화

* * *

누군가 목을 조르듯 가슴이 답답하고 기도가 막혔다.

살고 싶은데, 그런데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살려 줘……!’

그때, 누군가 내 얼굴과 코를 꽉 붙드는 손길이 느껴졌다.

곧이어 입술 위에 뜨겁고 말랑한 감각이 닿았다.

그로부터 강한 바람이 뿜어져 나와 꽉 막힌 기도를 뚫었다.

몇 번 더 그 기묘한 감각이 반복됐을까.

“켁, 콜록!”

어느 순간, 나는 거세게 기침을 토하며 가물가물 눈을 떴다.

짠 바닷물이 입을 타고 분수처럼 터져 나왔다.

천만 다행히도, 나는 아직 살아 있었다.

“허윽, 하아…….”

거칠게 숨을 몰아쉬고 있을 때였다.

“공녀!”

“……전하.”

어두운 시야 위로 반짝이는 금빛 머리칼이 흘러내렸다.

새빨간 눈이 커다랗게 확장됐다가, 이내 환희에 물들었다.

“살아서 다행이야. 공작가에 대체 뭐라고 공녀의 부고를 전해야 하는지 고민 중이었거든.”

지친 표정이 역력한데도 황태자는 장난스럽게 미소를 지었다.

나는 대답 없이 비척비척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분명 동굴이 무너지고 들이치는 바닷물에 속절없이 휩쓸렸었는데, 어느새 파도가 밀려오는 한적한 해변에 있었다.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났는지 알 수 없었다.

“우리…… 어떻게 된 거예요?”

“동굴에서 다 같이 그대로 뒈지는 건가 했는데, 다행히도 저 꼬맹이가 깨서 뭐라고 외치더군.”

황태자는 순순히 우리가 살게 된 경위를 답해 주었다.

“그리고 솔레일 주변에 있는 작은 무인도로 이동됐어.”

“아…… 라온.”

나는 깜빡 잊고 있던 라온 생각에 화들짝 주변을 돌아보았다.

멀리 떨어지지 않은 백사장에 대자로 뻗어 있는 사자 가면이 보였다. 눈이 커졌다.

“혹시 어디 다친 거……!”

“너무 걱정 마. 마력을 많이 소비하여 잠깐 탈진한 것 같으니까.”

이어지는 황태자의 말에 안도감이 들었다.

동시에 안타까움이 샘솟았다.

저 작은 체구로 하루 동안 너무 많은 마력과 체력을 소비한 것 같아 마음이 좋지 않았다.

걱정스러운 얼굴로 라온을 바라보던 나는, 불쑥 든 생각에 허둥지둥 황태자를 돌아보았다.

“레일라 신국 놈들은요? 놈들의 근거지는 어떻게…….”

“저기.”

칼리스토가 불쑥 손을 뻗어 바다 너머를 가리켰다.

그를 따라 시선을 돌렸지만, 시커먼 망망대해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얼떨떨한 얼굴로 계속해서 그가 가리킨 곳을 탐색하던 중.

“그대가 기어이 섬 하나를 부숴 먹었어. 축하해.”

놈이 놀리듯, 성의 없이 박수를 두어 번 치며 주절댔다.

“지하에 파 놓은 굴이 부서져서 그런지 여기로 이동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섬 전체가 가라앉았다.”

“……네?”

나는 이해가 가지 않아 어리둥절한 얼굴로 되물었다.

황태자가 어처구니없다는 투로 중얼거렸다.

“하, 나 참. 살다 살다 섬 하나가 통째로 수장되는 꼴은 또 처음 보는군.”

“그, 그럼…….”

“황궁으로 돌아가면 그대에게 상을 내려야겠어. 제국에 해악을 끼치던 잔당을 소탕하고 놈들의 근거지를 박살 낸 공로를 인정해서 말이야.”

그는 연신 헛웃음을 터뜨리며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지난번부터 신국 놈들을 소탕하는 데 도가 튼 듯한데. 내가 볼 땐 그대에게 아예 기사 작위를 내려주는 게 좋을 것 같아. 어떻게 생각하지?”

나는 인상을 와락 찌푸렸다.

“지금 저 놀리세요?”

“놀리다니? 진심이야.”

놈이 전혀 진심 같지 않은 얼굴로 히죽 웃었다.

‘미친 시스템…… 대체 밸런스 패치가 어떻게 된 거야?’

내가 쓴 마법으로 결국 섬이 무너져 가라앉기까지 해 버렸다는 말에 나는 한동안 할 말을 찾지 못했다.

내가 했지만 사실은 내가 한 게 아닌, 그럼에도 그 책임을 내가 뒤집어써야 하는 이 미묘한 기분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솔레일’이 사라져 버린 먼 바다 저편을 착잡하게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불현듯 눈앞이 환해지더니.

〈SYSTEM〉 ~메인 퀘스트 : 사라진 아이들의 행방~

[세 번째. 악의 세력으로부터 납치된 아이들 구하기] 퀘스트 완료!

〈SYSTEM〉 보상으로 [모든 남자 주인공들의 호감도 +5%], [명성 +50], [고대 마법 거울의 조각]을 얻었습니다.

(명성 total : 510)

‘하.’

나는 느닷없이 떠오른 시스템 창에 허탈하게 웃었다.

고개를 내려 손을 보니, 아까 전 마법을 썼을 때 주웠던 유물 조각이 고스란히 손에 꽉 쥐여 있었다.

탁한 거울 조각은 더 이상 반짝이지 않았다. 퀘스트 보상이라 눈에 띄었던 것이다.

‘메인 퀘스트.’

아이들을 구한 것은 천만다행이었지만, 결국 필연적으로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

너무 경황이 없어 나는 이것이 게임 스토리의 일부라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다.

그와 동시에 아까 전에 봤던 광경이 떠올랐다.

푸른빛과 함께 사라지던 흰색 로브.

‘여주랑 외양이 똑같았어.’

흩날리는 핑크빛 생머리와 나를 직시하던 새파란 안광.

그것을 다시 떠올리니 가슴이 꽉 막힌 듯 답답해졌다.

‘……아니야. 그냥 비슷한 사람이겠지. 그럴 리가 없어.’

나는 마구 도리질을 치며 본 것을 부정했다.

천사 같은 노멀 모드의 여주가 어떻게 레일라인지 뭔지, 악의 축이나 다름없는 그 일족이란 말인가.

그때였다.

“어디 아픈가?”

갑자기 심각한 얼굴로 도리질을 치는 내가 이상해 보였던지 황태자가 새빨간 눈으로 나를 흘깃거리며 물었다.

“뭘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에 잠겨 있어?”

그 소리에 정신을 차린 나는 잠시 그를 마주 보다가 힘겹게 내뱉었다.

“전하. 혹시…… 흰색 로브의 얼굴을 보셨어요?”

“아니. 동굴이 무너지게 생겼는데, 그놈 얼굴이나 보고 앉아 있을 시간이 어디 있어?”

지체 없이 들려오는 대답에 바싹 오그라들었던 심장이 천천히 원래대로 돌아왔다.

나도 내가 이토록 안심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제야 한숨처럼 하고자 하는 말이 터져 나왔다.

“……죄송해요.”

“뭐?”

맥락 없는 사과에 황태자가 황당하다는 듯 되물었다.

이 모든 일은 내가 한 것이 아니라 시스템이 시킨 것이었지만, 그렇다고 면죄부가 되는 건 아니었다.

섬이 무너져 내린 것을 들은 후 내내 혼잡했던 머릿속을 억지로 진정시키며, 나는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무결한 상태에서 즉위하셔야 하는데, 국토의 일부분을 없애 버려서 죄송해요.”

“허.”

나름 호감도 유지의 일환이었는데, 황태자는 기가 막힌다는 듯 웃었다.

“공녀야말로 지금 날 놀리나?”

“놀리다니요? 진심입니다.”

나는 정색을 하고 응수하다가, 이내 조금 힘없이 중얼거렸다.

“……제가 마법을 조절 못 해서 일이 이렇게까지 된 건 맞으니까요.”

“그대 덕분에 다 같이 마물의 위장 구경을 하지 않게 된 것도 맞지.”

칼리스토가 고저 없는 목소리로 답했다.

“그리고, 저 근거지를 그대로 뒀다가 또 아이들을 납치해서 개짓거리를 할지 어찌 아나? 뒤처리할 필요 없이 지금 사라진 게 차라리 잘된 일이야.”

나는 조금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나도 모르게 대뜸 말이 튀어 나갔다.

“의심은…… 안 하세요?”

“그놈의 의심 타령 좀 그만할 수 없나?”

칼리스토가 와작 눈살을 찌푸렸다.

“사람이 왜 이렇게 삐뚤어졌어?”

“저, 전하께서 저한테 그런 말을…….”

삐뚤어졌다는 놈의 말에, 나는 잠시 충격을 받고 말을 잃었다가, 가까스로 이성을 되찾았다.

“……그래도, 제가 어떻게 그렇게 강력한 마법을 쓰게 됐는지는…….”

“그대도 모르잖아.”

그가 시큰둥하게 쏘아붙였다.

“동굴에서 했던 말과 또 같은 말을 반복하게 하는군.”

“…….”

“알면 그렇게 당황한 표정으로 마물과 레일라 신국 놈들이 죽어 나가는 꼴을 구경하고 있지 않았겠지. 나도 눈이 있다고, 공녀.”

“…….”

“그냥 아무 말도 하지 마. 내가 직접 본 대로 알아서 판단할 테니까.”

나는 흔들리는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가슴이 지나치게 울렁거렸다.

안심해서 그런 걸까, 아니면 듣고 싶었던 말이어서 그런 걸까.

문득 까마득한 옛적부터 바싹 메말라 있던 눈시울이 화끈거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정 고마우면 입이라도 맞춰 주든지.”

그러나 이어지는 말에 그 이름 모를 감정들은 와장창 부서졌다.

“……뭐, 뭐라고요?”

말을 더듬는 나를 보며 황태자가 뻔뻔스럽게 되뇌었다.

“왜, 그런 거 있잖아. 위험에서 구해 준 영웅에게 보답으로 입 맞춰 주는 거 말이야.”

“정확히 말하자면 제가 위험에서 전하를 구해 드렸죠.”

“그럼 내가 그대에게 입 맞춰 주면 되겠군.”

“거절합니다.”

나는 단호하게 내뱉고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주 매정하기가 악녀가 따로 없어.”

황태자가 어이없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뭐라고 작게 꿍얼거렸다.

“뭐, 됐어. 이미 ……는 했으니까.”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아무것도.”

그를 돌아보며 물었지만, 그는 나를 따라 자리를 털고 일어나며 어깨를 으쓱거릴 뿐 답하지 않았다.

의아한 눈빛을 띠던 나는, 이내 그의 혼잣말에 관심을 껐다.

“그런데, 이제 우리 여기서 어떻게 빠져나가죠?”

“저 꼬맹이가 기절하기 전에 그 악령 씐 마법사에게 연락을 보냈다고 했어. 그러니 그놈이 곧 오겠지.”

나는 여전히 미동 없는 라온을 흘끔 곁눈질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이었다.

부우우우웅, 부우우우웅-.

어디선가 강한 진동음이 울렸다.

깜짝 놀라 두리번거릴 즈음, 황태자가 ‘아’ 하고 탄식을 내뱉더니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작은 수정구에서 번쩍번쩍 빛이 나고 있었다.

“잠시만, 공녀.”

그는 난처한 얼굴로 내게서 등을 돌린 후, 그것을 작동했다.

「전하! 대체 어디 계신 겁니까!」

그러자마자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응?’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디서 들어본 듯한 음성이었다.

「작전 회의하다가 갑자기 뛰쳐나가시면 어떡합니까! 마법사들은 대체 왜 협박을 하신……!」

달칵-.

이어지는 외침에 황태자가 서둘러 수정구의 작동을 멈췄다.

그는 당황한 얼굴로 내게 급하게 말했다.

“공녀, 미안한데. 난 먼저 가 봐야 할 것 같아.”

“돌아가실 수 있으세요?”

“황족들은 위급 시 황궁으로 소환할 수 있는 마법이 걸려 있거든.”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의 발 밑에 황금빛을 내는 마법진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이런. 연락이 닿았다고 세드릭 포터, 그 망할 놈이 벌써 발동시켰군.”

“세드릭이요?”

그는 황태자의 하나뿐인 보좌관이었다.

갑작스러운 이별에 당황하는 사이, 어느새 마법진이 거의 다 완성되어 가고 있었다.

“전하!”

나는 황급히 그에게 다가갔다.

“상처, 꼭 치료하세요.”

그의 팔에 매어진 내 드레스 자락이 붉게 물들어 있는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마물의 이빨에 독이 있을 수 있으니까 가자마자 확인부터 하시고…….”

“모처럼 예쁜 소리를 하는군.”

빠르게 쏟아내는 내 말에 황태자가 희미하게 웃었다.

그리고 불쑥 내게로 손을 뻗어, 덥석 내 얼굴을 붙잡았다.

그리고.

쪽-.

입술 위에 뜨듯하고 몰랑한 감각이 닿았다.

물기 젖은 촉촉한 것이 튀어나와 사악, 아랫입술을 핥았다.

상황을 인지하지 못해 멍하니 눈을 껌뻑이는 와중, 도장을 찍듯 입에 맞부딪힌 그것이 빠르게 떨어져 나갔다.

“이건 날 구해 준 영웅에게 바치는 키스야, 공녀.”

“지, 지금 무슨…….”

“조만간 또 보자고.”

황태자가 이를 드러내고 씨익 웃으며 당당하게 지껄였다.

그리고 아차 할 새도 없이 황금빛과 함께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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