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134화
“이…… 이게 무슨, 미친……!”
나는 한발 늦게 황태자가 내게 한 짓거리를 깨닫고 버럭 욕설을 내뱉었다.
이게 무슨 만행이냐며 정강이라도 대차게 까 주고 싶었지만, 이미 놈은 완전히 사라지고 없었다.
나는 손을 들어 입술을 손등으로 가렸다.
순간적으로 맞닿았던 부분이 촉촉했다.
‘망할 놈! 괜히 걱정해 줬어.’
너무 놀라서 그런 걸까. 가슴이 갈비뼈를 뚫고 뛰어나올 것처럼 쿵쾅거렸다.
터질 것처럼 얼굴에 열이 올랐다.
‘기분 나빠서 이런 거야.’
나는 놈의 도둑 키스를 그렇게 여기기로 했다.
사실 진짜로 기분 나쁜지 알 수 없었다. 이런 격렬한 감정들이 모두 생소하게 느껴졌다.
선선한 바람이 불어왔지만, 꽤 오랜 시간이 흘러도 바짝 오른 열은 쉬이 식지 않았다.
달음박질치는 가슴 위를 손으로 꾹 누르며 진정하려고 노력하던 나는, 마침내 놈이 사라진 백사장 위에서 힘겹게 눈을 뗐다.
그리고 막 고개를 돌리던 순간.
사자 가면 너머, 나를 빤히 응시하는 동그란 눈동자와 마주쳤다.
“……라, 라온.”
나는 무척 당황했다.
미동도 없던 애가 대체 언제 깨어난 건지 알 수 없었다.
한차례 썰렁한 바람이 우리 사이를 휩쓸고 지나갔을 무렵.
“뽀…….”
라온이 갑자기 내게 손가락을 쳐들고 외쳤다.
“뽀뽀했대요~ 뽀뽀했대요~!”
나는 튀어나온 해맑은 놀림에 경악하다가, 이내 미친 듯이 고개를 내저었다.
“아, 아니야! 그런 거 아니야!”
“그럼…… 키스했대요, 키스했대요~!”
“야! 아, 아니라니까!”
망언을 내뱉는 그 입을 틀어막기 위해 허겁지겁 달려가려던 찰나였다.
“……레이디.”
불현듯 등 뒤에서 나지막한 음성이 울려 퍼졌다.
나는 멈칫, 움직임을 멈추고 천천히 뒤를 돌았다.
토끼 가면을 쓴 맨발의 사내가 땅에서 솟아오른 것처럼 우뚝 서 있었다.
“빈…… 아니, 그대.”
나는 반사적으로 ‘빈수’를 외치려다가 가까스로 말을 바꿨다.
황태자가 없으니 더는 그렇게 부를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설마…… 황태자랑 그런 거 본 건 아니겠지?’
하필 절묘한 타이밍에 나타났다.
나는 조마조마한 눈으로 그를 살폈다. 그러나 가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어서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그때였다.
“스승니임!”
좀 떨어진 백사장에 주저앉아 있던 라온이 벌떡 일어나 달려왔다.
“죄송해요…… 사실 페넬로페가 절벽 아래로 가지 말라 했는데, 제가 애들한테 마법을 자랑하려다가…….”
라온은 시무룩한 목소리로 사건의 진상을 털어놓았다.
나는 그 말에 좀 놀랐다.
- 놈들이 오늘 나타나 다른 아이들까지 전부 납치할 줄은 저도 예상치 못했습니다.
- 변명처럼 들리시겠지만…… 저 또한 경황이 없었습니다, 레이디.
동굴에 막 들어설 때, 담담하게 털어놓던 뷘터의 말이 진실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반쯤은 믿지 않았다. 나로서는 놈에게 거하게 뒤통수를 맞은 상태였기 때문에.
뷘터는 울먹이는 사자 가면을 내려다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됐다. 어디 다친 데는 없느냐?”
“네…… 괜찮아요.”
라온이 우물쭈물 답하자, 군청색 동공이 이번에는 내 쪽으로 향했다.
“레이디께서는 어디 다친 데 없으십니까?”
“괜찮아.”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사실대로 답했다. 그리고 뒤늦게 떠오르는 것들을 물었다.
“아이들은 무사히 데려다준 건가?”
“예.”
“그대는…….”
괜찮으냐고 물으려던 나는 그냥 입을 다물었다.
뷘터의 몰골은 빈말로라도 괜찮다고 할 수 없었다.
마물의 꼬리에 후려 맞은 탓인지, 너덜너덜한 로브 자락 군데군데 붉은 물이 번져 있었다.
황태자보다 훨씬 더 상태가 안 좋아 보였다.
“시간이 너무 많이 늦었습니다. 이제 그만 데려다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더 말을 이을 생각이 없어 보이자, 그가 손을 내밀며 먼저 권유했다.
무척 지치고 피로하게 느껴지는 그 음성에 나는 거절할 수 없었다.
“그래. 얼른 돌아가지.”
서둘러 그의 손을 맞잡았다.
이윽고 환한 빛이 우리 셋을 감쌌다.
* * *
“전하!”
황태자의 하나뿐인 보좌관.
세드릭 포터는 마법진과 함께 황궁 포탈에 막 소환된 칼리스토를 기가 막힌 얼굴로 맞이했다.
“여어.”
황태자가 한 손을 들어 그런 제 보좌관에게 태평하게 인사했다.
‘여어?!’
세드릭은 부글부글 끓는 속을 내리누르기 위해 이를 사리물었다.
전장에서 동고동락하며 모셔 왔던 하나뿐인 주군이었다.
그러나 가끔 이렇게 상 미친놈처럼 굴 때마다 모시는 상관이고 뭐고, 목을 조르고 싶었다.
최근, 아르키나 제도에 숨어들어 제국에 피해를 주는 레일라 신국 잔당 놈들을 소탕하기 위해 연일 강도 높은 회의가 강행됐다.
놈들이 숨어든 아르키나 제도는 주변에 워낙 협곡과 암초가 많고, 파도가 거칠어 군함이 쉽사리 접근할 수 없었다.
게다가 놈들의 반항이 생각 외로 거세어 섣불리 소탕하려다 떼죽음 당하기 일쑤였다.
하여, 황태자가 일전의 사냥 대회 때 획득한 고대 지도를 최대한 활용하여 접근할 방법을 물색하던 중이었다.
한창 대책 회의가 무르익었을 때였다.
불현듯 펼쳐 놓은 지도에 붉은 반점이 생겨나더니 깜빡이기 시작했다.
아르키나 제도가 아닌, 그 근처의 지도에 표기되지 않은 섬이었다.
모두들 느닷없이 생겨난 붉은 점에 어리둥절하던 중, 갑자기 황태자가 자리를 박차고 미친놈처럼 달려 나갔다.
그리고 지금에야 돌아온 것이다.
“대체…… 솔레일에서 뭘 하다 오신 겁니까? 그 부상은 또 어찌 된 일이고요!”
다시 한번 상황을 되새긴 세드릭이 득달같이 물었다.
황태자가 대답 대신 눈썹을 꿈틀거렸다.
“벌써 마법사들을 협박했나?”
“협박은 전하께서 하셨겠지요. 저는 전하를 찾기 위해 확인차 물어본 것뿐입니다.”
세드릭의 심문에 마법사들은 갑자기 나타난 황태자가 ‘당장 솔레일로 이동시켜 주지 않으면 들고 있는 지팡이를 꼬리로 만들어 주겠다.’ 해서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하며 치를 떨었다.
세드릭은 냉철하게 덧붙였다.
“회의 도중 뛰쳐나가신 전하 덕분에 참모진들이 아직도 퇴궁을 하지 못해서 원성이 자자합니다. 부상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 변명이라도 해야 하니, 무슨 일을 하고 왔는지 귀띔이라도 주시죠.”
대충 똥은 네가 싸질렀지만, 다들 나한테 난리를 치고 있으니 변명을 위해 상황 설명이나 하라는 것이었다.
황태자는 시큰둥하게 답했다.
“뭘 하긴. 놈들을 소탕하고 왔다.”
“……예? 전하 혈혈단신으로요?”
“아니.”
황태자 궁을 향해 빠르게 걷던 칼리스토가 문득 걸음을 멈췄다.
그는 묘하게 당당한 얼굴로 턱을 치켜들고 뇌까렸다.
“예비 황태자비와 함께했다.”
“예비…… 뭐요?”
세드릭은 황태자 때문에 너무 스트레스를 받은 나머지 제 귀가 어떻게 된 모양이라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황태자가 다시 걸음을 옮기며 말을 이었다.
“우리의 예상이 맞았다. 놈들 또한 아르키나 제도에서 트라탄으로 쉽게 이동할 수 없었던 거지. 그래서 근처에 있는 해저에 은거지를 만들어 놨더군.”
“솔레일의 지하에 말씀입니까?”
“그래. 굴의 깊이와 넓이가 엄청난 규모였다. 어쩌면 아르키나 제도까지 이어져 있었을 수도 있겠지.”
“그럼 솔레일에 먼저 군대를 파견하는 게…….”
“아니. 그럴 필요 없어. 놈들은 당분간 잠잠할 테니까.”
빠르게 머리를 굴려 작전을 수정하려던 세드릭을 칼리스토가 막아섰다.
“예?”
세드릭이 의아하다는 듯 상관을 바라보았다.
무엇을 떠올리는지,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하던 칼리스토가 별안간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이 양반이 드디어 미쳤구나.’
세드릭은 생각했다.
물론 황태자가 미친 지는 한참이 됐지만, 드디어 미치다 못해 돌아갈 때가 된 것이다.
“공녀가 그 지하 굴을 다 때려 부쉈어. 덕분에 솔레일 전체가 아예 바다 밑으로 가라앉아 버렸지.”
픽픽 웃던 황태자가 꽤 즐거운 목소리로 읊조렸다.
갑작스러운 화제 전환에 당황하던 세드릭은, 이내 무언가를 알아채고 경악했다.
“그럼 그 붉은 점이…… 공녀님의 위치였던 겁니까?!”
고대 발타의 유물을 복제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고 무모한 일이었다.
때문에 황태자는 공녀 외의 다른 사람이 그것을 사용할 수 없도록 마법을 새겼다.
대체 어떻게 확보한 건지는 모르겠으나, 칼리스토가 잘린 그녀의 머리카락 한 줌을 소지하고 있던 덕에 수월하게 진행됐다.
그런데 마법을 새기는 과정에서 마법사가 문제가 생겼다고 하였다.
고대 지도가 페넬로페를 주인으로 인식하면서, 복제된 새로운 지도에도 그것을 공유한다는 것이었다.
그땐 그것이 정확히 뭘 가리키는 건지 알 수 없었는데…….
“……전하. 그거, 범죄 아닙니까?”
걷잡을 수 없이 뻗어 나가는 생각에 세드릭이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어허, 범죄라니.”
황태자가 정색했다.
“그건 어디까지나 실수였어.”
“공녀님도 아시는 실수입니까?”
“…….”
“제가 듣기로는, 지난번 사냥 대회 때 공녀님께 분명 이별을 통보받으신 것으로…….”
세드릭은 불현듯 오싹한 감각이 느껴져 흠칫했다.
시선을 돌리자, 피처럼 새빨간 눈동자가 부리부리하게 빛나고 있었다.
“요즘 자네 일이 좀 한가했지?”
황태자가 손을 뻗어 격려하듯 세드릭의 어깨를 두어 번 내리쳤다.
“시킨 대로 나랑 공녀 사이에 무슨 소문이 도는지 듣고 전달만 해. 맡은 소임만 다하라고. 남의 연애사에 왈가왈부 말 보탤 생각 말고. 알았어?”
“윽, 윽! 네. 알겠습니다…….”
부서질 것 같은 힘에 세드릭이 눈물을 머금고 힘겹게 대답했다.
만족스러웠는지 황태자가 격려를 가장한 폭력을 멈추고 다시 몸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그 뒤로 부하의 구시렁거림이 뒤따랐지만, 이상하게 오늘따라 하나도 거슬리지 않았다.
칼리스토는 자신도 모르게 피식, 피식 터져 나오는 실소를 멈출 수 없었다.
처음엔 놀리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빤히 보이는 거짓말로 자신을 속이고 그것을 만회하기 위해 진땀을 빼는 꼴이 퍽 우습고 재밌었다.
종종 그녀가 어떤 답변을 할지 떠올리며 다시 만날 날을 고대하다 보니, 빌어먹을 수도 생활도 꽤 괜찮았다.
그 미약한 흥미는, 사냥 대회 이후에도 꺼지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을 진저리 치는 공녀에 대한 호기심이 더욱 커졌다.
엘렌 후작 그 노망난 영감탱이에게 한 방 먹은 것도 모자라, 공녀를 스토킹한다는 터무니없는 소문이 돌았지만 별로 화가 나지 않았다.
자신도 그런 제가 신기했다.
누가 봐도 분장한 얼굴로 어설픈 연기를 할 때는, 그 모습이 하찮고 귀엽게 느껴지기도 했다.
소문대로 그저 멍청하고 오만하기 짝이 없는 평민 출신 나부랭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제 눈치를 보면서도 꼬박꼬박 말대꾸를 하던 그 조막만한 입술이 자꾸만 눈앞에 어른거렸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그런데, 전하.”
문득 세드릭의 부름에 칼리스토는 깊은 상념에서 깨어났다.
“뭐.”
“아까부터 왜 그렇게 입술을 만지작거리십니까? 입술도 다치신 겁니까?”
사실 하고 싶은 말은, 왜 그렇게 입술을 더듬거리며 실실 쪼개냐는 것이었다.
그러나 목숨이 아까웠으므로 세드릭은 간신히 말을 삼켰다.
제가 그러는지도 몰랐던 듯 황태자가 눈을 껌뻑였다.
그는 이성에 별로 감흥이 없었다.
수년을 피와 살이 터지는 전쟁터에서 구르면서 애욕도, 성욕도 모두 죽고 증오와 살심만 남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의 머릿속을 점령한 것은 페넬로페 에카르트의 얼굴이었다.
제가 입을 맞추자 토끼처럼 동그래진 청록색 눈동자, 당황하여 뻐끔거리는 붉은 입술.
달빛 아래 드러난 공녀의 얼굴은, 좀…….
“……예뻤지.”
“예?”
흘러나온 혼잣말에 세드릭이 되물었다.
황태자는 그런 부하를 흘끔 곁눈질하다가 가감 없이 조소했다.
“그런 게 있어. 평생 연애 한번 해 본 적 없는 자네는 어차피 모르는 일이다.”
“누, 누, 누가 해 본 적 없답니까!”
발끈하는 부하의 목소리를 뒤로한 채, 칼리스토는 유쾌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