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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엔딩은 죽음뿐-135화 (135/243)

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135화

* * *

눈을 뜨니, 우리는 처음 출발했던 헤밀튼 스트릿의 인적 드문 골목 구석에 서 있었다.

시커먼 어둠으로 물든 거리를 보니 한숨이 새어 나왔다.

‘제발 아무도 눈치 못 챘기를…….’

뷘터와는 마무리 지을 이야기가 아직 남아 있었지만, 그럴 만한 상황이 되지 않았다.

그도, 나도 치료와 휴식이 필요했다.

나는 그들에게 짧게 일별했다.

“난 그만 가 보도록 할게.”

“페넬로페…… 가요?”

라온이 눈에 띄게 시무룩하게 물었다.

“다음에 기회 되면 또 보자꾸나.”

나는 가볍게 미소를 지어 준 후 뷘터를 향해 몸을 돌렸다.

“신발, 고마웠어.”

그가 신겨 주었던 신발을 벗어서 내밀었다.

마법 신발이라 그런지, 바닷물에 빠졌는데도 젖지도 더러워지지도 않았다.

때문에 세탁을 해서 돌려주는 것도 무의미했다.

‘신발을 돌려준다는 이유로 또 만나기도 싫고.’

어차피 여기서부터 저택까진 금방이라 맨발이어도 상관없었다.

그렇게 판단한 나는 그로부터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몇 걸음 옮기던 찰나였다.

“잠시만.”

다급한 목소리가 나를 붙들었다.

나는 멈칫하며 슬쩍 고개를 돌렸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레이디.”

“왜?”

뷘터는 내게 곧장 답하지 않고 라온을 향해 내뱉었다.

“라온, 너는 상단으로 먼저 돌아가 있거라.”

“네에.”

스승의 말은 하늘같이 떠받드는 건지, 사자 가면은 고분고분 답했다.

잠시 후 ‘삐라띠오’ 하고 주문을 외치는 소리와 함께 작은 신형이 사라졌다.

라온이 가자, 뷘터는 허리를 숙여 내가 벗어 놓은 신발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저벅저벅 걸어 와, 내 발치에 그것을 내밀었다.

“신발은 계속 신고 계십시오. 저택 안까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괜찮아.”

나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대의 치료가 더 시급할 것 같은데. 그냥 이대로 가도 상관 없…….”

“조금 전 청력 극대화 마법으로 주변 동태를 살폈는데, 몇몇 장성들이 저택 주변을 돌고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레이디를 찾고 있는 듯합니다.”

“뭐?!”

나는 이어지는 그의 말에 그야말로 대경실색했다.

‘설마 들킨 건가? 이런 미친!’

나는 지진 나듯 흔들리는 동공으로 토끼 가면에게 힘겹게 물었다.

“지금…… 시간이 몇 시지?”

“10시를 조금 넘었습니다.”

“하…….”

나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아침 10시에 출발했는데 빌어먹게도 밤 10시가 넘어서 돌아왔다.

‘그나마 하루를 넘기지 않아서 다행인 건가.’

나는 눈물을 머금고 긍정 회로를 돌렸다.

그런 나를 보고 뷘터가 손을 내밀며 재차 권했다.

“저로 인해 늦은 것이니, 제가 방까지 무사히 모셔다 드리도록 부디 허락해 주십시오.”

기사들이 저택 주변을 돌고 있다면, 어차피 개구멍으로 몰래 들어가긴 글렀다.

나는 뷘터가 내민 신발을 다시 주섬주섬 신고는 침울한 얼굴로 답했다.

“……부탁 좀 하지.”

잠시 후 하얀 빛이 눈앞을 점령했다.

다시 눈을 떴을 땐, 익숙한 공간이 펼쳐졌다. 바로 내 방이었다.

“에구머니나! 이게 무슨……!”

갑자기 방 한가운데에 ‘뿅’ 하고 나타난 나를 보고 에밀리가 기겁했다.

“페넬로페 아가씨!”

“에밀리.”

“대체, 왜 이제야 오신 거예요! 이, 이분은 누구세요?”

그녀가 토끼 가면을 쓴 거한을 보고 흠칫 놀라며 주춤주춤 나를 끌어당겼다.

나는 뷘터에 대한 설명 대신 황급히 물었다.

“별일은 없었니? 혹시, 나 몰래 나간 거 들킨 거야?”

에밀리가 우물쭈물하다 사실을 털어놨다.

“그게…… 저녁에 집사님이 찾아오셔서, 아가씨의 부재를 아셨어요.”

“뭐라고?! 집사가?”

“아프다고 말씀드렸는데, 급한 전언이 있다고 그러셔서……”

나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하필이면, 그 촉새 같은 공작 바라기가 알았다니 낭패였다.

오만상을 찌푸리는 나를 보며 그녀가 애써 위로했다.

“그, 그래도 제가 금방 오실 거라고 사정사정해서 공작님께 당장 알리시겠다는 것을 간신히 막았어요.”

하지만 집사는 이미 몰래 사람을 풀어 나를 찾는 중이었다.

만약 내가 오늘 안에 돌아오지 못했더라면, 공작저 전체에 알려지는 것은 시간문제였을 것이다.

“이봐.”

나는 별수 없이 극단적인 방법을 쓰기로 했다.

“의뢰를 좀 맡기고 싶은데.”

“예? 무슨…….”

“공작저에 속한 모든 인간들의 기억을 조작해 줘. 내가 나간 적 없는 것으로.”

“헉.”

내 말에 에밀리가 얕게 숨을 집어먹었다.

덤덤히 의뢰를 내뱉는 나를 바라보던 군청색 동공이 한차례 일렁거렸다.

“……저 하녀도 포함입니까?”

그는 어두운 목소리로 물었다.

“응.”

“아, 아가씨!”

망설임 없는 내 대답에 에밀리가 충격을 받은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나는 냉정하게 되뇌었다.

“미안, 에밀리. 완전 범죄를 위해서는 별수 없어.”

나는 여전히, 공작저 안의 그 누구도 믿지 않았다.

무표정한 나를 한동안 멀거니 응시하던 뷘터는 이윽고 품에서 천천히 지팡이를 꺼냈다.

“람 브라니카…….”

“아, 아가씨! 어떻게 저마저도……!”

“……아뎀토-!”

마법 주문을 외우던 뷘터의 단말마가 묵직하게 울려 퍼졌다.

배신감 어린 눈으로 내게 서운함을 토로하던 에밀리가 별안간 ‘풀썩-’ 하고 바닥에 쓰러졌다.

나는 그것을 보고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어디 큰일 나는 건 아니지?”

“일전에 말씀드렸다시피 기억에 관련된 마법은 깊은 잠에 빠지는 부작용이 있습니다.”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뷘터가 덧붙였다.

“마법이 성공했고, 저택의 모든 이들이 잠이 들었습니다. 깨어난 이후에 기억을 잃은 것 빼곤 이상 없을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다가 입을 열었다.

“의뢰 대금은 무엇으로 치르면 되지?”

뷘터는 내 말에 침묵했다. 그리고 한참 후 들려온 대답은-.

“……받지 않겠습니다.”

“왜?”

“레이디께서 오늘 늦게 귀가하게 된 것은…… 제 책임이 크기 때문입니다.”

“…….”

“이제 더는 저를 믿으실 수 없겠지요.”

그는 잠시 망설이는 듯하다가, 담담히 읊조렸다.

“계약 해지서는…… 빠른 시일 내에 서신으로 보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 말에 허탈한 실소가 새어 나왔다.

‘그래도 제 잘못을 알긴 아나 보네.’

레일라인지 아닌지, 의심당하고 시험에 들게 한 것은 충분히 불쾌하고 짜증 났다.

그러나 충격적인 일의 연속이어서 그런 걸까.

생각보다 그에게 엄청나게 분노가 일지는 않았다. 그조차도 피곤하게 여겨졌다.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면 뷘터의 의심은 정당했다.

그는 오래전부터 레일라와 대적하는 중이었고, 시스템에 의해 움직이는 내 행동이 영 수상쩍긴 했을 테니까.

‘……그런데, 봤을까?’

문득 마지막에 본 흰색 로브의 외양이 떠올랐다.

나는 내심 잘못 본 거라고, 그저 비슷한 외양일 뿐이라고 부정하면서도, 머리끝이 쭈뼛 섰다.

정황상, 뷘터는 이미 봉사 활동을 하면서 가난한 평민으로 살고 있는 ‘진짜 공녀’를 맞닥뜨린 듯했다.

‘만약에, 아주 만약에 여주가 정말로 아이들을 납치하고 마법사들을 없애려는 무리의 중축이라면.’

뷘터를 속이고 그를 이용해서 무슨 짓을 벌일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거기까지 미치자, 돌연 뒷골을 타고 소름이 쫙 돋았다.

“그대, 혹시…….”

나는 불쑥 입을 열었다가, 곧바로 꾹 다물었다.

그는 마법을 쓰는 것으로 내가 레일라 잔당인지 의심했다.

그 의심이 종결됐는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괜히 불을 지필 필요는 없었다.

설령 여주가 그렇다 하더라도, 그녀가 본격적으로는 등장하는 시기는 페넬로페의 성인식 이후였다.

고로…….

‘내가 탈출하고 난 뒤는 내 알 바가 아니야.’

갑자기 말을 멈춘 나를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는 토끼 가면을 향해 나는 찬찬히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보다…….”

“…….”

“계약은 그냥 유지하도록 해.”

내 말에 군청색 눈동자가 더없이 커다랗게 확장됐다.

그는 혼란스러운 기색을 내비쳤다.

“어째서…….”

“뭐, 이미 진행한 계약을 파기하는 것도 웃기고. 그대의 공적인 능력을 신뢰하지 않는 건 아니니까.”

탈출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

이제 와 뷘터만큼 유능하고 입이 무거운 상단을 새로 구하는 것도 귀찮았다.

그는 알 수 없는 감정이 울렁이는 시선으로 나를 응시했다.

그것에 희미한 기대감이 섞인 것을 알아차리기는 쉬웠다.

“하지만, 공적인 부분 말고 더 엮일 일이 없었으면 해.”

나는 그것을 칼같이 차단했다.

“그대가 내건 계약 조건에 더는 오늘처럼 어울려 줄 수 없을 것 같아.”

싱긋 웃는 내 모습에, 뷘터의 동공이 하릴없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레이디.”

“그대가 뭘 의심하고, 뭘 걱정하는지 알겠어. 그대의 어깨에 짊어진 대의 또한. 내 평판도 소문도 그간 별로 좋지 않았고, 마법을 쓰는 것도 퍽 수상했겠지.”

“…….”

“하지만 관심 같은 헛소리로 사람을 기만하지는 말았어야지.”

내 말에 그의 눈동자에 그 어떤 때보다도 선명한 감정이 서렸다.

그것은 고통과 후회였다.

그의 머리 위, 보라색 호감도 게이지 바가 느릿하게 깜빡였다.

나는 그것을 아무런 감흥 없이 바라보았다.

“기만하는 게 아니었습니다.”

그는 거의 쥐어짠 듯한 목소리로 황급히 내뱉었다.

“레이디께 관심이 있다는 말은, 오로지 의심과 확인을 위해서만은 아니었습니다.”

“…….”

“의심만 해서 그런 게…… 아니었습니다.”

뷘터는 아스라한 음성으로, 같은 말을 반복했다.

비틀거리는 그의 모습이 위태롭고, 한편으로는 안쓰러워 보였다.

남들은 모르는, 레일라에게 저주를 받고 사람들에게 배척받는 상태에서 힘겹게 싸움을 지속해야 한다는 설정을 지닌 그가 불쌍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해와 내 기분은 별개였다.

“뭐, 더 의심해도 상관없어. 의심도, 관심도, 모두 그대 혼자 알아서 해.”

“레이디.”

“그대의 대의에 더 이상 나를 이용하지 말란 소리야.”

“레이디, 한 번만. 한 번만 더 제게…….”

나는 애원하듯 절절 끓는 목소리로 나를 부르는 뷘터를 막고서, 싸늘하게 통고했다.

“이제 그만 돌아가. 그리고, 내가 먼저 찾을 때까지 연락하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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