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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엔딩은 죽음뿐-136화 (136/243)

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136화

뷘터는 내가 건네준 신발을 가지고 쫓겨나듯 황망하게 돌아갔다.

나는 그것으로 그와의 접점이 모두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씻기 위해 옷을 벗는 순간,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쇄골에 느껴졌다.

“망할.”

고개를 숙인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짧게 욕설을 내뱉었다.

여주에게 줘야 할 뷘터의 목걸이가 고스란히 남았다.

‘아오, 신발이랑 같이 줬어야 했는데…….’

지금 이 기분으로는 뷘터와 모든 일을 서면으로만 처리하고 싶었다.

하지만 고대 유물을 함부로 내돌릴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결국 한 번쯤은 다시 만나야 한다는 소리다.

나는 짜증 섞인 한숨을 내쉬며, 목걸이를 벗어 책상 서랍 안에 넣었다.

드레스 안쪽에 달린 작은 주머니에 넣어 놨던 깨진 거울 조각도 꺼내 그 옆에 대충 내려두었다.

무심결에 서랍을 내려다보니, 어느새 게임 보상으로 얻은 것들이 꽤 많이 쌓여 있었다.

뭔가 쓰지도 않는 잡동사니들만 주렁주렁 많아지는 것 같아서 기분이 이상했다.

묘한 얼굴로 그것을 내려다보던 나는 이내 ‘탁-’ 하고 서랍을 닫았다.

* * *

다음 날.

급한 전언으로 나를 계속 찾았다던 집사가 이른 아침부터 내 방을 방문했다.

“아가씨.”

집사가 짧게 묵례한 후, 조금 굳은 얼굴로 내뱉었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무슨 일이야?”

“스펜 경께 검술을 배우러 나간 이클리스가 여태껏 돌아오지 않고 있습니다.”

“……뭐?”

화장대에 앉아 있던 나는 멈칫하고 집사를 돌아보았다.

“그게 무슨 소리야? 돌아오지 않았다니?”

“훈련이 고된지, 평소에도 저녁 시간을 훌쩍 넘긴 후에 저택으로 돌아오긴 했습니다만…… 간밤에는 그가 이동할 때 쓰는 마차만 돌아왔습니다.”

“…….”

“어젯밤 급히 아가씨께 말씀드리려 했는데, 이 늙은이가 노망이 들었는지 그만 잠이 들고 말았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아가씨.”

말을 마친 집사가 내 앞에 허리를 깊이 숙여 사죄했다.

뷘터의 마법이 정말로 성공했는지, 그는 내가 몰래 외출한 것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허를 찔린 기분이었다.

에밀리를 통해 나를 급히 찾던 이유가 생각보다 중대한 사안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황급히 되물었다.

“마부는? 같이 갔으니 뭔가 알 거 아니야.”

“마부에게 물어보니 돌아갈 시간이 지나도 그가 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스펜 경 또한 평소와 다름없이 훈련을 끝냈다고 하였고요.”

“그럼…….”

머릿속에 번뜩 최악의 가정이 스쳤다.

‘도망.’

이클리스는 눈치도, 직감도, 두뇌도 매우 뛰어난 편이었다.

공작저 내에서 정식으로 검을 배우는 게 무리라는 것을 그 또한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알면서도 내게, 스승을 구해 달라고 요청했다.

‘설마, 처음부터 이러려고…….’

아직 제대로 확인하지 않았지만, 그의 호감도는 지금쯤 90%를 넘겼을 것이다.

그런데 만약, 놈이 나를 이용해서 탈출을 한 거라면.

‘나는 죽는다.’

화장대 위에 올려 둔 손이 아득 주먹을 움켜쥐었다.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살아남았는데. 고작 10% 남짓 남기고 죽어야 한다고?’

어금니가 저절로 사리물어졌다.

순식간에 최악을 가정하며, 끝도 없는 어둠 속으로 가라앉을 무렵이었다.

문득 집사와 눈이 마주쳤다.

“……아가씨, 송구스러운 말씀이지만.”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그는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노예가 차고 있는 모든 구속구에는 필수적으로 추적 마법이 새겨집니다.”

“……위치 추적?”

“예. 하여, 가문의 마법사를 부르는 게 어떠신지…….”

집사가 흘긋 화장대 위에 올려진 내 왼손에 시선을 던지며 말끝을 흐렸다.

덩달아 시선이 돌아갔다.

왼손 검지에 아직도 끼워져 있는 커다란 루비 반지가 보였다.

나도 모르게 힘을 너무 주었던지, 주먹 위에 얹어진 붉은 루비 알이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아직 속단하기는 일러.’

나는 천천히 힘을 주고 주먹을 풀었다.

여러 번 초크를 풀어 준대도 제 입으로 직접 거절하던 이클리스였다.

그는 목줄을 달고 도망칠 만큼 무모하고 멍청하지 않았다.

차차 이성이 돌아왔다.

그제야 죽음에 대한 공포와 배신감으로 보이지 않았던 점들이 눈에 들어왔다.

“일단…… 조금 더 기다려 보도록 해.”

내 지시에 집사가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망설이듯 되물었다.

“수도 근경은 치안이 썩 좋지 않습니다, 아가씨. 혹시 봉변이라도 당했을 수 있으니 마을 주변에 사람을 풀어 두는 것은 어떤지…….”

“됐어.”

나는 단호하게 답했다.

남주가 봉변을 당했을지도 모른다는 가정만큼 우스운 일도 없을 것이다.

“그냥 제 발로 돌아오길 기다려.”

“……네. 알겠습니다, 아가씨.”

집사는 내 반응이 이해가 가지 않는 듯해 보였지만, 잠자코 수긍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본질적인 문제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소공작님께는 어떻게…….”

데릭까지 알면 이클리스가 내쫓기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첫째 오라버니껜 아직 비밀로 해 줘.”

“아가씨.”

“부탁할게, 집사. 괜히 일 크게 만드는 거 싫어. 그 애는 곧 돌아올 거야.”

내 당부에 집사는 껄끄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나가 봐도 좋아.”

탁-. 얼마 후 집사가 방문을 닫고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치오르는 불안감을 애써 부정했다.

‘무슨 사정이 있는 거야.’

설령 그게 아니더라도, 당장은 믿는 수밖에 없었다.

이클리스의 호감도는 곧 내 목숨이었다.

무턱대고 하는 의심은 호감도에 악영향을 끼칠 위험이 컸다.

‘이제 고작 10%야.’

나는 그때부터 끊이지 않는 의심과 싸우기 시작했다.

* * *

하루가 어떻게 지나갔는지 알 수 없었다.

에밀리가 가져다준 저녁을 먹는 둥 마는 둥 물리고, 읽던 책을 몇 번 들추고 덮길 반복하자 밤이 깊었다.

자정이 가까워졌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이클리스가 돌아왔다는 소식은 들리지 않았다.

초조함이 극에 달했다.

루비 알을 매만지던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에밀리, 가서 집사를 불러와.”

“네, 아가씨.”

온종일 내 눈치를 보던 에밀리는 잽싸게 방을 나갔다.

“아가씨, 부르셨습니까.”

얼마 후 집사가 당도했다.

나는 돌려 말할 것 없이 곧장 명령했다.

데릭이 알게 되더라도, 이젠 이 방법밖에 없었다.

“스펜 경이 사는 마을에 사람과 개들을 풀어.”

“예? 아, 알겠습니다.”

“그리고 가문의 마법사들 다 불러들…….”

그때였다.

“아, 아가씨! 집사님!”

이야기를 나누도록 자리를 피했던 에밀리가 열린 문틈으로 헐레벌떡 뛰어 들어왔다.

“아가씨의 호위분이 돌아왔어요!”

그 외침에 나와 집사가 동시에 눈을 마주쳤다.

“당장 내 방으로 데리고 와.”

얼마 후, 집사가 내 방으로 이클리스를 데리고 왔다.

사나운 내 기세에 집사는 이클리스만 놓아둔 채 서둘러 방을 나갔다.

둘만 남은 방 안에는 서릿발 같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주인님.”

먼저 그 무거운 침묵을 깨고 이클리스가 천천히 걸어왔다.

내가 앉아 있는 테이블 근처까지 다가온 그는 자연스럽게 내 발치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을 들어 나를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하루 사이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그의 얼굴은 병자처럼 창백하고 희멀겠다.

어디 다친 곳이라도 있냐고 묻기에는, 내 인내심이 너무 한계까지 치달은 상태였다.

“어디 갔다 왔니?”

튀어 나가는 목소리가 날카롭기 그지없었다.

언제나 그의 앞에서 억지로나마 웃음을 짓고, 부드러운 음성을 자아내던 나였다.

처음으로 맞닥뜨린 내 본모습에 회갈색 동공이 일순 흔들렸다.

“……주인님.”

“대답해.”

나는 그에게 틈을 두지 않고 다그쳤다.

“왜 말도 없이 사라졌어?”

“걱정…… 하셨어요?”

“걱정?”

차가운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진짜 공녀’가 돌아오기까지 이제 3주 남짓이었다.

탈출까지 3주가 남은 상황에 몰빵 남주가 튀었을지도 모른다는 그 두려움과 초조함, 숨 막힘.

그것들을 고작 ‘걱정’ 하나로 뭉뚱 그릴 수 있을까?

“내가, 우습니?”

그 순간엔 놈의 머리 위에 빛나고 있는 검붉은 색조차 보이지 않았다.

“말 안 해도 사다 바치니까, 해 달라는 대로 다 해 주니까, 머리 꼭대기에 앉아도 휘둘려 줄 것 같은 병신으로 보여?”

“…….”

“너 하나를 위해, 나는 그동안.”

목숨을 걸고 움직였다. 몇 번이고 공작저 놈들에게 비굴하게 머리 숙여 빌었다.

그럼에도 언제 호감도가 폭락할지 몰라 벌벌 떨며, 그의 앞에서는 말 한마디조차 함부로 내뱉지 않았다.

목 끝까지 차오른 그 말들을 가까스로 씹어 삼키며, 나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내가 어디까지 네 방자한 태도를 참아 줘야 하는지 모르겠구나.”

“죄송해요, 주인님.”

이클리스는 내 눈을 피해 고개를 아래로 떨궜다.

그 모습이 버림받은 강아지처럼 퍽 처연해 보였다.

“잠깐…… 사고가 있었어요.”

그는 눈을 내리깐 채, 고분고분 답했다. 나는 냉정하게 물었다.

“무슨 사고.”

“동향인들을 만났어요.”

그가 다시 고개를 들어 나를 마주 보았다.

그리고, 정제되지 않은 내 분노는 마주친 애달픈 눈빛에 길을 잃어버렸다.

“저처럼 노예로 팔려간 이들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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