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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엔딩은 죽음뿐-137화 (137/243)

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137화

“동향인……?”

그의 말에 나는 할 말을 잃고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제가 살던 집에서 일해 주던 안면 있는 하인이었어요.”

“…….”

“그를 따라 마을 근경의 농장에서 노예로 부려지는 델만인들을 보았어요.”

“……이클리스.”

“그런데 갑자기, 농장에 대형 마물이 나타나서 사람들을 공격했어요.”

“뭐? 마물?”

나는 이어지는 이클리스의 말에 눈을 부릅떴다.

그가 검술을 배우러 다니는 마을은 수도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아르키나 제도와 가까운 트라탄도 아닌, 제국 한가운데에 마물이 나타난 걸까.

‘이것도, 하드 모드의 스토리 중 하나인 건가?’

바로 전날 마물들을 떼로 만나고 온 나는 기분이 이상해졌다.

심각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긴 사이, 이클리스가 묵묵히 읊조렸다.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동안 아무도 나서지 않았어요.”

“…….”

“거기서 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저밖에 없었어요, 주인님.”

번뜩 정신이 들었다. 결국, 그가 직접 마물을 죽였다는 소리였다.

도망보다 더 어마어마한 일에 휘말리고 온 몰빵 남주 때문에 눈앞이 아찔해졌다.

나는 이성적으로 생각하려고 노력하며, 한숨처럼 그를 불렀다.

“이클리스.”

“…….”

“설령 그런 일이 일어났더라도, 너는 내게 가장 먼저 달려왔어야지.”

“주인님.”

“내게 돌아와서 보고를 하고 도움을 요청했어야 해.”

위험에 처한 고국인들을 보는 이클리스의 심정이 얼마나 참담했을지, 솔직히 상상도 가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냉정하게 현실을 되뇌었다.

적국의 노예가 거리를 나돌아다니며 검을 자유자재로 사용했다.

이를 누군가 고발한다면, 자칫 공작가가 역모를 꾸민다는 오해까지 살 수 있는 문제였다.

그의 스승을 구해 달라고 부탁할 때, 데릭이 가장 우려하던 일이었다.

“넌 지금 제국에서 검을 쓸 수 없는 노예 신분이고, 내가 널 책임지고 있으니까.”

딱딱하게 굳은 내 표정에 이클리스의 표정이 희미하게 흐트러졌다.

“……저도 알아요, 제가 그들에 비하면 얼마나 윤택한 생활을 하고 있는지, 또 얼마나 주제넘은 짓을 하고 왔는지요.”

이클리스는 이를 악문 목소리로 대꾸했다.

“하지만 제가 마물을 모두 죽일 동안, 제국에서는 어떤 지원도 오지 않았어요.”

“공작저에서 지원을 할 수 있도록 조치했을 수도 있었겠지.”

“사람들이 모두 다 죽어 버린 후에요?”

“이클리스.”

“저는 마물을 죽일 수밖에 없었어요, 주인님.”

무미건조했던 회갈색 눈동자가 그 어느 때보다 형형하게 번뜩였다.

나는 결국, 입을 다물었다가 한참 후 다시 열었다.

“마물을 죽인 후엔 왜 곧바로 돌아오지 않았니?”

“……사람들이 많이 다쳤어요.”

이 물음에는 면목이 없는지 그가 나와 마주하던 눈을 피해 고개를 숙이며 웅얼거렸다.

“그러는 와중에도 노예들은 다친 제국의 평민들까지 살폈고요.”

“…….”

“상처에 바를 약 하나 없는 그 열악한 곳에서, 저는 사람들이 상처에 쓸 풀떼기나 장작들을 주워 주는 것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어요.”

“…….”

“제가 할 수 있는 게 그것밖에 없었어요…….”

말을 마친 그의 눈꼬리가 아래로 조금 처졌다.

평소에 워낙 표정이 없어서 그런지 그 미세한 변화가 무척이나 크게 느껴졌다.

시무룩한 그 얼굴에 목 끝까지 차올랐던 초조함과 긴장감이 조금씩 완화됐다.

나는 전보다 조금 누그러진 목소리로 가장 염려되는 것을 물었다.

“……감시인들은? 노예들을 관리하는 제국인들도 있었을 거 아니야.”

이클리스는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 근처는 모두 빈민가예요. 농장에 구속구를 채운 노예들을 풀어 놓고 일정한 때가 되면 수확한 작물만 걷으러 온다고 합니다.”

그는 그 말을 함과 동시에 테이블 위에 올려 둔, 내 왼손에 흘끔 시선을 던졌다.

노예의 구속구에는 위치 추적 마법이 새겨져 있다던 집사의 말이 떠올랐다.

치안이 안 좋다는 우려 또한 덩달아 수긍이 갔다.

이클리스의 절절한 호소가 끝나자 방 안에는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가 도망갔을지도 모른다는 가정에 비정상적으로 치올랐던 흥분이 어느 정도 가셨다.

그러자 창백한 그의 낯빛이 눈에 들어왔다.

노예치곤 깔끔했던 평소와 달리, 지저분해진 몰골도.

탈출까지 둥가둥가만 해 주려고 최선을 다했는데, 오늘 보니 내가 없는 곳에서는 잔뜩 구르기만 하는 것 같아서 속이 상했다.

“……어디 다친 곳은 없니?”

나는 다소 늦은 걱정 어린 음성을 내었다.

이클리스가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명료한 정신으로 샅샅이 훑어보았지만, 먼지와 흙만 잔뜩 묻어 있을 뿐 다행히도 핏자국은 없었다.

“다행이구나.”

그래도 혹시 모르니, 집사를 통해 의원에게 보이도록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이클리스, 앞으로 이런 일이 있으면 마부를 통해서라도 내게 무슨 일이 있는지 전달하도록 해. 그러라고 딸려 보낸 사람이니까.”

나는 단호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네가 돌아오지 않았다는 소리를 전해 듣고 내가 얼마나 놀랐겠니.”

“…….”

“무슨 일이 생겼나, 당장 사람을 풀어야 되나, 몇 시간을 할 일도 못 하고 걱정한 줄 알아?”

나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굳이 연기를 하지 않아도 아까 전에 느꼈던 그 피 마르는 심정들을 떠올리니, 절절한 목소리가 튀어나 왔다.

이클리스의 눈동자에 한차례 파문이 일었다.

그는 입술을 달싹거리다, 어렵사리 내뱉었다.

“그러려고 마물을 죽이고 곧바로 찾아갔는데…… 그가, 이미 먼저 돌아간 후였어요.”

나는 그의 말을 듣자마자 오만상을 찌푸렸다.

집사에게 입이 무겁고, 최대한 이클리스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고 수발을 들 만한 자를 붙이라고 지시했기 때문이다.

‘한참을 기다리다가 돌아왔다더니…….’

내 험악한 기세에 이클리스가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화…… 나셨어요?”

“아니.”

나는 고개를 저었다.

“제대로 신경 쓰지 못한 내 잘못이지.”

“…….”

“그자가 제 주제를 몰랐나 보구나. 새로 붙여 줄 마부에게는, 네 훈련이 끝나는 시간까지 한 시간 정도 여유를 두라고 일러둘게.”

그 순간, 그의 눈이 크게 떠졌다. 나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온전한 자유 시간이야. 그 안에 해야 할 일들을 하렴.”

“……주인님.”

이클리스가 조금 당황한 기색으로 나를 불렀다.

그 시간 동안은 안 좋은 상황에 처한 동향인들을 만나 도와도 좋다는, 파격적인 허락이었다.

이것을 데릭에 들킨다면, 나 또한 처벌을 면치 못할 것이리라.

“하지만 그 이상은 안 돼.”

나는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1시간, 그 안에 할 수 있는 선에서 도움을 주는 것은 괜찮았다.

그러나 그 이상 뭔가를 해 줄 수 없었다.

그가 정식으로 검을 배우고 쓴다는 것을 들키면, 노예가 된 델만인들이 몰살당하는 것뿐만 아니라 공작저까지 위험하다.

“그 이상은 안 돼, 이클리스.”

다시 한번 부드럽게 종용하자 그는 흔들리는 눈으로 나를 응시하다가, 이내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저도…….”

이클리스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뜬금없는 것을 물었다.

“주인님께, 쓸모 있는 사람이 되었어요?”

“……응?”

나는 맥락에서 벗어난 질문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갑자기 그런 질문을 하니?”

“쓸모가 없거나, 문제를 일으키면…… 경매장으로 돌려보낸다고…….”

“아.”

나는 곧바로 그가 뭘 우려하는지 깨달았다.

- 그러니 네게 지불한 1억 골드가 아깝지 않도록, 너는 내게 네 가치를 증명해야 할 거야.

- 내가 언제까지고 쓸모없는 이를 이곳에 두겠다고 우길 수만은 없는 일이잖니.

내가 일전에 그를 데려오며 했던 말이었다.

오늘 문제를 일으켰으니, 자신을 내치지 않을까 우려하는 것이다.

그가 아직도 그것을 잊지 않았다는 사실이 좀 놀라웠다.

“이클리스.”

나는 손을 뻗어 그의 두 뺨을 어루만지듯 살포시 들어 올렸다.

눈이 마주쳤다.

이클리스의 얼굴이 또다시 미세하 게 꿈틀거렸다.

나는 코가 닿을 만큼 바짝 들이밀고 달콤하게 속삭였다.

“이제 그 말은 잊어.”

“……주인님.”

“너는 내게, 아주 중요한 사람이야. 그렇지 않으면 내가 왜…….”

“…….”

“이만큼이나 너를 신경 쓰겠니.”

나를 응시하는 회갈색 동공의 흔들림이 멈췄다.

그와 동시에, 이클리스의 호흡 또한 멈추는 게 느껴졌다.

어렴풋이, 그의 눈빛이 혼몽하게 풀리는 것 같다는 착각이 일었다.

그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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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0만 골드 / 명성 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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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보유 자금 : 58,000,000 골드)

[호감도 94%]

‘6%’

드디어, 정상이 보였다.

그의 얼굴을 잡지 않은 손이, 바르르 떨렸다.

* * *

며칠 후.

나는 ‘사라진 이클리스’라는 작은 소동을 기회 삼아, 이클리스 엔딩에 쐐기를 박기 위해 꽤 커다란 꾸러미 하나를 들고 연무장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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